[역사 속 오늘] 오늘로부터 37년 전인 1981년 10월 16일,
옛 러시아공사관 발굴 과정서 지하 비밀통로와 밀실 발견 첫 보도
옛 러시아공사관 발굴 과정서 지하 비밀통로와 밀실 발견 첫 보도
19세기 말, 서방 국가들은 최신식 무기와 군함을 앞세워 조선을 불법으로 침략했다. 이들은 상품시장과 원료 공급지 선점을 위해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려 했다. 이는 곧 서방 국가들 사이의 권력 다툼과 함께 조선을 대상으로 한 불평등 통상조약인 조미·조독·조영 조약의 체결로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 또한 조선과의 국교 체결에 적극 나섰다. 당시 러시아는 임시 대리공사를 직접 조선에 파견했다. 그 결과 조·러 수호조약이 비준되고, 이후 덕수궁 인근에는 러시아공사관이 들어섰다.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바로 옆에 자리한 옛 러시아공사관은 조선 고종 27년(1890년)에 러시아 양식으로 지은 최초의 공관 건물이자 국내에 몇 안 되는 개항기 서양식 벽돌조 건물이다. 시내 중심가 높은 곳에 세워진 러시아공사관은 어디서나 보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 건물을 ‘아관’이라 불렀다.
러시아공사관의 건립은 러시아가 영국, 미국 등과 나란히 조선의 정치무대로 등장하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이곳은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된 ‘을미사변’ 이후 고종 황제가 약 1년여 동안 세자와 함께 피신했다고 알려진 ‘아관파천’의 장소로 유명하다.
이렇게 건축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높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공사관을 둘러싼 야사가 수없이 떠돌았다. 신빙성 있는 자료가 별로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전쟁으로 인해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주변 개발로 인해 유구(인간의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파괴되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 없는 잔존물) 또한 많이 훼손돼 건물 본래 모습을 정확히 밝히는 것은 불가능한 듯 보였다.
‘아관’에는 지하 비밀통로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로부터 37년 전인 1981년 10월16일, 옛 러시아공사관 발굴 과정에서 지하 비밀통로와 밀실이 발견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85년 만에 지하 밀실이 발견됐지만, 그동안에는 지하 밀실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로만 전해져왔다. 러시아공사관이 자리한 정동 일대의 판잣집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공관에 50m 길이의 땅굴이 있으며 통로 끝에 두 개의 지하실이 있다는 얘기였다. 누군가는 집 없는 사람들이 이 굴속에서 살림을 했다고도 말했다. 이를 두고 ‘고종의 피신을 위한 덕수궁 통로다’, ‘러시아인의 비밀 사무실이다’ 등의 추측만 무성했다.
하지만 비밀통로와 밀실이 발굴됨에 따라 아관파천 직후 고종이 이 밀실에서 머물렀을 것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당시 발굴단은 “지하통로와 밀실이 웅장한 석조건물 밑에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고, 사용된 벽돌 등 구조물이 현재 남아있는 양관의 구조물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밝혀져 건물을 건축하면서 함께 설치한 것 같다”고 말했다.
지하 밀실은 공사관 본 건물 집터 아래 3m 지점에서 발견됐다. 가로 7m, 세로 4m의 장방형으로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붉은 벽돌로 축조되었다. 이 지하 밀실과 본 건물을 연결한 비밀통로는 동·서를 가로질러 20.3m 가량 뻗어 있었다. 윗부분이 100㎝이고, 아랫부분은 45㎝로 V자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성인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좁았다. 하지만 통로 중간지점에 폭 50㎝, 길이 5㎝의 흠이 파여 있어 통로에서 서로 맞닥뜨릴 경우 한 사람이 대기할 수 있도록 했다. 발굴단은 이 같은 구조로 볼 때 통로를 왕래하는 사람이 잦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지하 비밀통로의 벽은 벽돌로, 바닥은 석회로 칠해진 채 완벽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었다. 이를 보면, 고종이 아관파천을 한 뒤 고종을 찾으려는 일본인들에 의해 지하 비밀통로가 뚫렸을 것이라는 일부 주장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입증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고종 부자는 궁녀 가마를 타고 ‘파천’했다
명성왕후가 일본인에 의해 살해당한 뒤 친일 내각은 조선의 내정간섭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고종을 경복궁에 유폐하고 왕의 모든 권력을 탈취했다. 이에 이범진과 이완용 등 당시 친러파는 고종과 세자를 궁에서 피신시키기로 한다. 이들의 명분은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희망에 따라 왕과 왕세자를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실제 계획은 고종을 조정해 친일 내각을 무너뜨리고 친러 내각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노골적인 내정간섭 계획에도 불구하고 을미사변의 참변에 놀란 고종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고종은 결국 궁을 버리고 ‘파천’하기로 결정한다. 1896년 2월11일 새벽,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궁녀들이 사용하는 교자를 타고 궁궐을 몰래 빠져나왔다. 이 과정에서 왕과 왕세자는 공사와 친러 대신 이범진, 이완용의 영접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러시아 공사관과 조선
아관파천 이후 고종과 왕세자는 사실상 ‘러시아의 지시에 의한’ 타국 공사관 집정을 시작하게 된다. 이로써 일본의 협박에서 벗어난 조선의 국왕은 ‘또 다른’ 열강의 내정간섭과 노골적인 약탈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 시기 러시아는 고종을 압박해 삼림 채벌권과 광산 채굴권, 전신선 설치권 등의 경제적 이권을 차지했다. 이는 조선의 철도 부설권 등이 헐값에 외국에 넘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고종이 궁궐을 떠나 있는 동안 조선 정부 각부도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었다.
고종은 독립협회 등 여러 단체들의 환궁 요구가 거세지자 아관파천 1년 만인 이듬해인 1897년 2월20일에야 러시아공사관을 떠났다. 환궁한 고종은 이후 오랜 꿈인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이는 더 이상 일본과 청, 러시아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 독립국임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은 결국 전쟁을 일으켰다. 1904년 2월부터 1905년 9월까지 이어진 이른바 ‘러·일전쟁’이다. 전쟁 이후 한국과 러시아 간의 조약이 폐기되면서 한국에 대한 러시아의 모든 권한도 없어지게 되었다. 러시아공사관은 광복 이후 1925년부터 1950년까지는 소련영사관으로 사용하다가 한국전쟁으로 훼손돼 탑과 지하 일부만이 남은 채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이후 러시아공사관은 1973년 탑만 복구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가 1977년 사적 제253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한편 서울시는 122년 전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피신했던 길을 3년 만에 복원해 이달 정식 개방을 앞두고 있다. ‘고종의 길’이라 이름 붙여진 이 길은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건너편에서 시작해 옛 러시아공사관이 있는 정동 근린공원까지 이어지는 총 110m 길이다. ‘고종의 길’은 당시 열강의 권력 다툼 속에서 대한제국의 아픔을 담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1890년 대 옛 러시아공사관 모습. <한겨레> 자료 사진.
구한말 정동 일대의 희귀 사진. 러시아·미국·영국 공관과 덕수궁 건물들의 배치 구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파노라마식 구도의 유일한 사진이다. <한겨레> 자료 사진.
<경향신문> 1981년 10월16일 치.
러시아공사관 본 건물 집터 아래서 발견된 비밀 지하통로. 사진 출처 <한국문화재재단>
아관파천 당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사관에 주재하는 동안의 편의와 안전을 보장하는 등에 관한 5개 조항의 규약. 사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 후기 경복궁 건춘문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덕수궁 서쪽과 북쪽 후원에는 궁궐에서 외국공사관으로 직접 통하는 오솔길과 쪽문인 통용문(사진)이 있었다. <한겨레> 자료 사진.
1973년 복구된 옛 러시아공사관 탑. <한겨레> 자료 사진.
‘고종의 길’ 옛 모습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희귀사진. 미국 주간지 1897년 7월 24일치에 수록된 사진(미국 사진작가 윌리엄 헨리 잭슨(1843~1942)이 한국을 찾은 1896년에 찍은 것으로 알려짐. 출처 김수정).
참고문헌
<구한말 서울 정동의 러시아공사관에 대한 복원적 연구 > 김정신 ·발레리 알렉산드로비치 사보스텐코 ·김재명
<20세기 초 건축물 사진실측 조사 > 문화재청
<동아일보 > 1974년 12월 8일 치 , 1976년 7월 21일 치
<경향신문 > 1981년 10월 16일 치
도움주신 분
이계형 <국민대학교 박물관> 특임교수
서윤희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연재역사 속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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