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이탈리아 여성 거장 젠틸레스키의 자화상(1638~39년 작 추정).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가 보여주겠어요. 당신은 카이사르의 기운을 품은 한 여자의 영혼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17세기 초 피렌체와 로마를 무대로 당대 이탈리아 바로크 화단을 휘저었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전성기 시절 한 컬렉터에게 의기양양한 다짐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온통 남성 작가만 득실거리던 당시 그림판에서 유일한 여성 화가였던 그는 로마제국의 황제 정치를 열어젖힌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 같은 존재가 되고자 분투를 거듭했고, 편견과 홀로 싸웠다. 유명한 자화상과 페미니즘 미술사의 고전이 된 <수산나와 두 장로>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같은 걸작들이 그렇게 탄생했고, 후대에 ‘최초의 여성주의 미술가’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하지만 타계 300년이 훨씬 지나도록 본격적인 재조명 회고전은 열리지 않아 그는 여전히 저평가된 작가로 남았다.
올해는 카이사르의 기운을 품었다는 젠틸레스키의 영혼을 확실하게 재발견할 수 있는 원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컬렉션이 다수 소장된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가 첫 대규모 회고전을 4월4~26일 열기 때문이다. 남성 예술가들과 남성의 시선을 위한 전통적 주제를 그리면서도 그림 속에 강인하고 끈질긴 여성의 이미지를 심은 그의 주요 걸작과 초상화, 편지와 기록이 한자리에 모인다.
젠틸레스키의 사상 첫 대규모 회고전은 여성 미술과 여성 미술사가 대세가 된 올해 세계 미술 전시의 지형도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지난 수년 동안, 전 세계 문화예술계에 휘몰아친 미투 열풍과 여성 작가들의 약진을 배경으로 지난 연말과 연초 라인업을 선보인 세계 주요 미술관·박물관의 전시는 여성 거장과 이들의 과거 작업을 재조명하는 여성 서사, 여성 미술사 관련 기획전이 압도적으로 많다. 최근 여성주의 진영에서 불고 있는 과거 여성사의 재조명 흐름과도 맥이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독일계 베네수엘라 여성 작가인 게고(게르트루트 골트슈미트)가 생전 허공에 기하학적인 줄선을 형상화하면서 작업하는 모습.
현대미술 맥락에서 그 첫머리에 놓일 수 있는 전시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설 미술관인 도쿄 모리미술관의 ‘어나더 에너지전: 계속 창조하는 여성 아티스트’(가제·10월1일~내년 1월3일)전이다. 2차 대전 전후 여성주의 미술의 맥락에서 1950~70년대부터 지금까지 정력적으로 활동을 지속하는 세계 각지의 70대 이상 원로 여성 작가를 집중 조명하는 초유의 기획전이다. 안나 보기귀안, 릴리 뒤주리, 베아트리스 곤살레스, 수잰 레이시, 미시마 기미요, 로빈 화이트 등 서구, 남미 등의 여성주의 작가들을 대거 초대해 그들의 작업 전반과 예술가로서의 생존 방식 등을 살펴본다. 일본 현대미술계의 여걸로 꼽히는 거물급 큐레이터 카타오카 마미가 새해 모리미술관의 새 관장에 오르면서 내놓은 첫 작품이란 점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정면을 향해 총을 겨눈 여성주의 작가 니키 드 생팔의 필름 스틸사진(1972년).
퍼포먼스 아트 분야에서 현존 최고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세르비아 출신 여성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9~12월 영국 런던 왕립예술원(로열 아카데미)에서 여는 대규모 개인전도 큰 화제를 모을 것으로 보인다. 왕립 아카데미 250년 역사상 첫 여성 단독 전시회인 이번 개인전에는 그가 별도로 촬영해 온 사진과 비디오 신작들이 퍼포먼스와 함께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아브라모비치는 2010년 미국 뉴욕 모마미술관에서 730시간 이상 일반 관객과 대면하면서 평화롭고 그윽한 시선으로 눈을 맞추는 ‘예술가는 출근 중’이란 퍼포먼스로 감동을 안겨주었다. 어떤 형식이나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는, 행위예술의 최고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 그가 과연 영국 무대에선 어떤 작품을 들고나올지 많은 애호가의 궁금증을 낳고 있다.
모리미술관 회고 기획전에 초대된 남미 작가 베아트리스 곤살레스의 남녀군상 연작(1981년).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지 뉴욕도 여성 미술 대가들의 회고전으로 주요 전시를 채웠다. 1970년대 남성성을 지닌 목표물을 저격하는 권총 발사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프랑스의 대가 니키 드 생팔(1930~2002)의 대규모 회고전이 뉴욕 모마의 피에스원(PS1) 전시장에서 열린다. 모델 출신으로 30대 이후 예술가로 활동한 그는 다채로운 색감을 담은 그로테스크한 조형물과 레즈비언 운동과 연관된 퍼포먼스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번 전시에 대표작 100여점이 선보일 예정이다.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도 독일계 베네수엘라인 설치미술가 게고(게르트루트 골트슈미트)의 회고전을 10월9일부터 내년 3월21일까지 열게 된다. 매달리며 작업한 철조망 조각으로 미술사에 남은 그의 작품을 재현해 보여주면서 특유의 기하학적이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작품 세계를 여러 맥락에서 새롭게 살펴보게 된다.
이불이 1990년 벌인 퍼포먼스 ‘수난유감-당신은 내가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알아’의 실연 광경.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올해 또 다른 흐름 가운데 하나는 국제적인 스타 여성 작가의 초기작을 보여주는 전시회가 여럿 펼쳐진다는 점이다.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한국의 스타 작가 이불씨는 서울시립미술관이 마련한 아시아 순회전 첫 전시인 ‘비기닝’(12월15일~2021년 3월)을 통해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그가 벌였던 여성주의적 조각과 퍼포먼스를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기이한 괴생명체 모양의 덩어리를 두르고 시내를 활보한 퍼포먼스를 담은 ‘수난유감’ 연작과 ‘사이보그’ 연작, 그의 누드 퍼포먼스 등이 나온다. 점들이 연속되는 ‘땡땡이 호박’으로 널리 알려진 일본 작가 구사마 야요이도 9월부터 내년 1월까지 독일 베를린 그로피우스 바우에서 초기 드로잉과 회화, 퍼포먼스 연작을 중심으로 회고전을 꾸렸다. 한국 국립현대미술관도 7~10월 덕수궁관에서 한국 화가 운보 김기창의 부인이자 회화와 공예에서 큰 성취를 이룬 여성 박내현의 탄생 100돌 기념 첫 대형 회고전을 마련한다. 최근 한국 작가들 가운데 국제적으로 가장 활발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 양혜규 작가는 5월 영국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여는데 이어 하반기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현대자동차 지원 전시프로젝트를 선보일 예정이다.
세계 미술계에서 퍼포먼스 아트의 최고 거장으로 꼽히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올해 9~12월 영국 런던 로열아카데미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연다. Marina Abramović Archives
배명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올해 국내외에서 잇따라 열리게 될 다양한 여성 미술기획전들은 ‘미투’ 이후 여성주의와 여성 문화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크게 바뀐 세태를 반영한 것”이라며 “여성주의와 여성 서사, 여성의 일상에 대한 다양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정한 방향의 트렌드로 조망하기보다는 미술계의 자장과 시선이 그만큼 확장되고 깊어졌다는 의미로 봐야 할 것 같다”고 분석했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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