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스의 개운만화(그림 수원댁). 릴리스 제공
대학생 때 우연히 들어간 사주카페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끔 울화통이 터진다. 상담가는 나의 생년월일시를 듣더니 “남편한테 사랑받고 아이 둘 낳아 잘 키울 팔자”라며 “더 볼 것도 없이 여자로서 좋은 사주”라고 했다. 취업운이 궁금해서 갔던 것인데 고객의 질문도 듣지 않고 5분 만에 상담을 끝냈다. 옛날 어르신 덕담 수준에 구체성이 하나도 없는 비전문성은 둘째치고, 남편한테 사랑받고 아이 둘 낳아 기르는 삶을 ‘여자로서 좋은 사주’로 정한 그의 가정에 심히 불쾌했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여성 누가 오든 똑같은 설명을 한 뒤 돈을 받아 챙겼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인생을 ‘여자 팔자’라는 프레임에 가둬버리는 사주 상담 문화는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소프라노 조수미는 그간 언론에서 자신의 팔자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다. 2010년 경인년 호랑이해 1월1일에 한 신문에 기고한 조수미의 칼럼을 보면, 자신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주팔자에 호랑이가 세 마리씩이나 있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고 했다. 어릴 적 동네 할머니들은 “남자로 태어났으면 천하를 통합하고 휘두를 장군감이지만 여자라서 기가 세다… 아이 팔자가 너무나 셀 것”이라며 혀를 찼다고 했다.
신이 내린 목소리의 세계적 음악가를 ‘팔자 센 여자’로 만들어버리는 게 사주 상담의 현주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사주를 본다. 그런 문화를 생각하면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을 좌지우지해온 사주상담이 성차별을 조장해온 공로는 부정할 수 없다. 독립적인 삶을 사는 여성에게 ‘남편 복이 없다’고 하고, 주도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의 여성 사주를 보고 ‘팔자가 세서 걱정’이라고 한다. 당장 유튜브에 떠도는 사주 영상들 제목만 봐도 ‘사나운 팔자 가진 여자 구분하는 법’, ‘남자 복 없는 여자 팔자 특징’ 같은 성차별적인 내용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아직도 여성 손님에게 ‘남자 복’ 운운하는 사주상담가들은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꾸리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타인에게 잘 기생하라고 조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사주상담은 태아 성감별 같은 것에도 일조했는데, 엄마는 내가 어릴 적 앞으로의 자녀계획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주상담가를 찾아다녔는지 모른다. “제 팔자에 아들이 있을까요”란 질문을 들고 말이다. 자연의 이치를 설명하는 명리학 자체는 죄가 없다. 이를 해석하고 활용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사주상담에 왜 유독 남존여비식 풀이가 많을까. 조선시대 때 발달한 명리학이 같은 시대에 꽃핀 유교 사상과 섞이면서 남존여비식 풀이가 사주상담에 반영된 것으로 나는 추측한다. 최근 궁합에 관한 명리학 논문을 읽다가 ‘시대가 달라져도 명리학은 더디 변하는구나’를 또 한번 느꼈다. 배우자 운이 좋은 사주의 경향성을 설명하는 논문이었는데, 저자는 여러 이론들을 설명하다 갑자기 ‘애교가 풍부한 여성은 남성의 자존감을 세워줘 배우자 운이 좋다’고 쓴 게 아닌가. 저자의 ‘뇌피셜’이 명리학 이론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21세기 사주상담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최근 우연히 본 책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만났다. 성평등한 사주풀이를 지향하는 페미니스트 사주상담가 릴리스의 <내 팔자가 세다고요?>(북센스, 2020)다. 명리학 이론을 성차별적 프레임 없이 소개하고 그동안 사주상담이 얼마나 여성 억압적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상담가로 일하며 겪은 경험담과 함께 전했다.
내가 누구인가. 책을 읽고 바로 상담을 받아봤다. 지금껏 으레 사주상담을 받으면, ①결혼적령기에 남자를 만나 ②제때 결혼해야 하며 ③늦지 않게 자식을 낳고 ④부모에게 순종하고 시댁에 사랑받고… 이른바 ‘정상가정’의 삶을 상정해 놓고 그에 따른 조언을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조언은 모두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했을 때만 정상 아닌가. 가부장제가 만든 정상성에서 탈피하면 ‘결혼은 장기연애를 하다 40대 때쯤 하셔도 좋을 것 같다’처럼 고객의 사주에 맞는 조언이 나온다. 그동안 성차별적 사주 상담으로 불쾌한 경험을 해야 했다면 성평등 사주 상담으로 갈아타보자.
봄날원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