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추모곡 ‘11월12일+1’을 발표한 민중가수 연영석. 연영석 제공
50년 전 11월12일 밤을, 그는 떠올렸다. 거룩한 한 인간의 삶에 온전히 깃든 마지막 밤을 오래도록 생각했다. 달빛 속에서 고뇌하던 ‘아름다운 청년’의 마음과 스물두살의 젊은 육신이 보이는 듯했다. 노래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를 안아주고 싶었어요.” 가수 연영석이 말했다. 청년은 이튿날인 1970년 11월13일, 짧은 삶을 불태우고 떠나갔다.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였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청년 전태일이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다. 그가 남긴 불씨는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거대한 횃불로 번졌다.
연영석은 전태일을 비췄을 11월12일의 ‘달’에 집중했다. 모두 잠든 밤, 삶의 마지막 날을 예비하고 있을 청년의 고단한 어깨 위에 가닿았을 달빛을 떠올리니, 겨우 노래가 빚어졌다. “미싱대 위에, 먼지 속에/ 따스한 두손에 든 풀빵 위로/ 달이 비치네 이 짙은 어둠/ 창백한 소녀들을 비추는 달/ 달이 비치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나는 돌아가네/ 저마다 빛나고 있는/ 나의 내일아” ‘달과 태일’이라는 부제를 단 전태일 추모곡 ‘11월12일+1’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연영석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전태일 열사가 떠나고 반세기가 지났지만, 그가 꿈꾸던 세상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해 평균 2400명의 노동자가 산재 사고로 사망하고, 수많은 택배기사가 고질적인 장시간 노동으로 기계처럼 일하다가 과로사하는 등 여전히 우리의 노동 환경은 열악하다.
전태일 추모곡 ‘전태일다리에 서서’를 쓴 박은영. 박은영 제공
작곡가 박은영은 바로 이런 세상을 노래로 엮었다. ‘전태일다리에 서서’는 청년 전태일의 눈으로 오늘의 우리를 보려 한다. “나의 삶은, 죽음은, 투쟁은 어디로 갔는가/ 필요할 때 소환되어 이리로 저리로 휩쓸리다/ 시멘트 바닥에 두 다리 잠긴 채/ 움직일 수 없게 붙박이로 세워진/ 나에게 꽃을 주지 마라/ (…) / 새벽 모두가 잠든 밤에 무거운 짐 지고 계단을 오르는 노동자 그 숨 가쁜 삶이여/ 스크린도어 그 좁은 틈새에, 쇠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저 용광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끌려 나는 매일 죽어간다” 박은영은 “지금 노동자가 처해 있는 상황을 전태일 열사가 본다면 어떤 마음일까, 하는 생각이 노래의 출발점이었다”며 “지난 50년 동안 전태일 열사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지만, 얼마만큼 우리가 그의 정신을 계승해왔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태일티비’ 유튜브 계정을 통해 발표된 전태일 추모곡 영상 갈무리. 왼쪽 위에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11월12일+1’의 연영석, 박은영의 ‘전태일다리에 서서’를 부른 박준, 강전일의 ‘아직도 그댈 그리네’를 부른 예술인연대, 정윤경이 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을 부른 꽃다지의 정혜윤. 유튜브 화면 갈무리
오는 13일 전태일 50주기를 앞두고 음악가와 대학생 노래패 등이 그를 추모하는 노래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전태일의 삶과 정신을 재해석하고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담은 창작곡들이다. 전태일기념사업회 등을 비롯해 전국 167개 시민사회노동단체가 꾸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50주기 범국민행사위원회’와 서울시가 마련한 전태일 50주기 기념행사 ‘2020 우리 모두 전태일 문화제’의 하나다. 지난달 14일부터 ‘전태일티비’ 유튜브 계정 등을 통해 차례로 공개해왔다. 6일 현재까지 공개된 추모곡은 모두 15곡이다. 이 행사는 오는 15일까지 이어진다.
전태일 추모곡 ‘아무렇지도 않은 듯’을 쓴 정윤경. 정운 제공
추모곡 가운데는 대중가요와 같은 친근한 멜로디의 노래도 있다. 민중가요그룹 꽃다지의 음악감독 정윤경이 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표적이다. 꽃다지 보컬 정혜윤의 맑은 목소리를 타고 흐르는 이 노래는 ‘행동을 하자’고 이야기하지도 ‘투쟁’을 외치지도 않지만, 비장함이 느껴지면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찬찬히 돌아보게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위험한 일들을 더 위험하게 만들어/ 오늘도 일곱명의 노동자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만든 그런 무리들에게/ 철퇴를 내리지 않으며/ 감히 사람이 먼저라는 말을 할 수는 없지” 정윤경은 “변하지 않는 것들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게 문재인 정부의 슬로건이잖아요. 그런데도 수많은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어요. 고쳐지지 않는 거죠. 시스템과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걸 화내지 않고 노래하려고 했어요.”
전태일 추모곡 ‘아직도 그댈 그리네’를 쓴 강전일. 강전일 제공
20대 청년의 노래도 눈에 띈다. 작곡가 강전일이 쓴 ‘아직도 그댈 그리네’는 이 시대 여전히 필요한 ‘전태일 정신’을 노래한다. 그는 “부질없다 미련하다/ 모두 그대 밀어낼지라도/ 먼지투성이 작은 다락방/ 어린 동심 지켜낸 한 사람”이란 노랫말에 자신의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주변 방해 세력에도 꿋꿋이 노동운동을 했던 전태일에 대한 존경심을 녹였어요.” 멜로디에는 블루스 등을 접목한 대중가요적 요소를 담았다. 기존 민중가요에 또래 친구들이 거리감을 느끼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1996년생인 그가 전태일 열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뭘까. 그는 “초등학생 때 읽은 근현대사 관련 만화책”이라고 말했다. “열사의 항거를 담은 장면이 아주 짧게 묘사돼 있었는데, 그 강렬함이 저를 사로잡았어요.” 책을 보며 어머니께 전태일이 누구냐고 물어봤다. 어머니는 전태일의 생애를 담은 만화 <태일이>(박태옥 글, 최호철 그림)를 사 주셨다. 대학생이 돼서는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강씨는 “전태일 열사 죽음 이후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현실은 아직 어둡기만 하다”고 말했다. “살인적 업무에 시달려 과로사하는 택배기사, 안전장치가 미비한 공사 현장에서 추락사하는 노동자, 직장 갑질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회사원 등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것은 아직도 이 사회에 전태일 열사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게 아닐까요?” 수많은 이들이 여전히 전태일을 노래하는 이유다.
김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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