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50년, 여기 다시 전태일들]
3부 2020 전태일, 무엇이 필요한가
③노동 밖 대안 ‘기본자산’
이제 본격적으로 논의 시작할 때
3부 2020 전태일, 무엇이 필요한가
③노동 밖 대안 ‘기본자산’
이제 본격적으로 논의 시작할 때
기본자산, 불평등 고착화 해결에 초점 기본자산의 핵심 개념은 부모를 대신해 사회가 일정한 목돈을 ‘상속’해 끊어진 계층 간 사다리를 다시 세우자는 것이다. ‘기초자산’ ‘보편자산’ ‘사회적 지분’ 등이 기본자산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세습 자본주의로 회귀”를 경고한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책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도 고착화하고 있는 불평등을 풀 수 있는 해법으로 기본자산이 소개된 바 있다. 피케티는 프랑스를 예로 들며, 1인당 평균 자산인 20만유로(2억6400여만원)의 60%인 12만유로(1억5800여만원)를 25살이 되는 모든 청년에게 배당하자고 제안했다. 사실 기본자산은 224년의 역사를 지닌 제안이다. 미국의 저술가 토머스 페인이 1796년 ‘21살이 되면 (당시) 연간 농업 수입의 절반 정도인 15파운드를 지급하자’며 처음 기본자산을 거론했다. 그는 “빈곤한 대중이 세습으로 빈곤을 물려받는다. 이들이 자력으로 빈곤에서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현금 지급이라는 점에서 기본소득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브루스 애커먼과 앤 올스톳은 그들의 저서 <분배의 재구성>에서 기본소득에 빗대 ‘사회적 지분’이라는 이름으로 기본자산을 이렇게 설명한다. “매달 받는 기본소득 400달러로 단기적인 재정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액수가 너무 작아 그들이 수십년을 내다볼 수 있는 실질적인 자유를 얻게 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인생을 선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다. 반면 사회적 지분은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나가도록 한다. 8만달러를 은행에 넣어두고 청년들은 어떻게 그들의 목표와 능력을 펼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단기적인 관점이 나중에 후회하게 될 상황으로 이끌지 아닌지를 생각할 것이다.” 김만권 경희대 교수(정치철학)는 “불평등이 계층이동에 커다란 장벽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 전반적으로 공유된 감성”이라며 “소위 ‘수저론’ ‘헬조선’ ‘노오력’ 담론의 중심에는 ‘사회계층의 고착화’란 문제가 담겨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기본자산제는 계층이동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3천만원을 상속받은 청년이 셋만 모이면 뭐라도 시도해볼 수 있는 목돈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8년 11월 내놓은 ‘현세대 청년 위기분석’ 결과를 보면, 어릴 때 빈곤이 교육 수준과 일자리에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7살 이전 6년 이상 장기빈곤을 경험한 청년(18~28살) 가운데 68.8%가 고등학교 졸업 이하로 학력을 마쳤는데, 경제활동 참여 상태는 일용직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이 비경제활동, 실업자, 임시직 순이었으며 정규직이 가장 적었다. 2015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청년(19~34살) 15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의식조사에서도 ‘우리 사회는 노력에 따른 공정한 대가가 제공된다’는 응답이 13.9%에 그쳤다. ‘공정한 대가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답변은 86.1%였다.
정의당·김두관 등 최근 정치권에서도 관심 정치권에서도 최근 기본자산에 부쩍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 4월 제21대 총선을 앞두고 정의당이 내놓은 ‘청년기초자산’ 공약이 대표적인 사례다. 20살 청년들에게 3천만원의 밑천을 제공하자는 제안이다. 정의당은 1년에 최대 1천만원씩 3년 동안 분산 인출하도록 하면 첫 5년 동안 연평균 소요 예산이 14조5천억원 정도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이 재원은 상속증여세 약 5조5천억원(2020년 기준)에 종합부동산세 등 보유세를 늘리면 마련할 수 있다는 게 정의당의 제안이다. 청년기초자산의 사용처는 본인 재량으로 하되 △학자금 △취업준비금 △주거비용 △창업자금 등으로 제한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김병권 정의정책연구소장은 “(3천만원의 밑천은) 대학 재학 기간의 교육비를 감당하거나, 주거 임대보증금과 2년 정도의 임대료를 내거나 혹은 학자금 대출로 인한 부채 상환, 초기 창업자금이 될 만한 정도의 금액”이라고 설명했다.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신생아에게 2천만원을 지급하고 특정 이율을 적용한 뒤 이들이 성인이 되면 목돈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의 기본자산제를 제안했다. 김 의원은 지난 10월5일 ‘양극화 시대, 왜 기본자산인가’ 토론회를 열어 “부의 대물림 속에 청년들의 기회 균등이 희석되고 공평과 공정의 가치도 훼손되고 있다”며 “자본주의가 고도화하며 자산이 자산을 불리는 시대가 되었다. 자산 없이 소득만으로는, 엄청난 고소득자가 아니고서는 자산 형성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진단했다. 김 의원의 제안은 영국이 2004년 도입한 ‘아동신탁기금’과 취지가 비슷하다. 아동신탁기금은 매해 태어나는 아이 70만명에게 최대 800파운드(약 120만원)의 계좌를 열어주고 20년 정도 국가가 자금을 운용해 금액을 불린 뒤 성인이 됐을 때 이를 지급하는 제도다. 기본자산제는 기본소득제보다 재원 마련 등에 있어 상대적으로 현실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필요한 재원 규모가 기본소득제보다 작다. 기존 세제와 복지 체계를 크게 손댈 필요 없이 기존 체계에 더해지는 형식으로 설계가 가능하다. 예컨대 기본소득으로 한달에 30만원씩 5천만명에게 지급할 때 드는 1년 예산은 180조원이지만, 기본자산으로 3천만원을 일시에 20살 청년(약 60만명)에게 지급하게 되면 10분의 1인 18조원이면 가능하다. 영국의 아동신탁기금 역시 필요한 비용은 4억8천만파운드(약 7300억원)에 불과했다. 다만 이 제도는 2010년 보수당이 집권하면서 재정 적자를 이유로 폐지돼 그 최종 결과를 알 수 없게 된 상황이다.
수혜자 편중·‘문턱 효과’ 등 한계도 기본자산제의 가장 큰 약점은 다양한 연령대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정의당의 청년기초자산 공약이나 김두관 의원의 기본자산제를 현실화한다면, 수혜자가 20살에 한정된다. 기본소득은 전 국민이 수혜자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같은 연구·사회운동 모임이 있는 기본소득과 달리 기본자산과 관련한 시민운동이 아직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어떤 시점에 제도를 시행한다고 해도, 며칠 전 20살 생일을 지나 기본자산을 받을 수 없는 이들 등이 정책에 저항하는 이른바 ‘문턱 효과’가 생길 수 있다. 자녀 출산 계획이 없는 기성세대의 지지를 받는 것도 과제다. 이런 한계들을 고려해 대안으로 ‘생애주기별 기본자산제’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만권 교수가 제안한 이 제도는 20살과 40살, 60살이 됐을 때 등 생애주기별로 기본자산을 지급하고, 60살 이상 유권자들에게는 기초연금을 강화해 보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전 세대의 정책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영국의 ‘아동신탁기금’ 방식을 적용해 특정한 연도에 0살, 20살, 40살이 되는 국민의 계좌에 300만원씩 배당하고, 국민연금처럼 국가가 이 자금을 20년 동안 운용한 뒤, 3천만원 정도를 20살, 40살, 60살이 되는 국민에게 지급하는 게 이 방안의 뼈대다. 수령 조건으로는 △일정 기간 이상 범죄기록이 없고 △수령 뒤 이민 가면 배당금을 반환하고 △배당금과 관련해 국가는 재정교육을 학교교육과 연계해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수령자는 이 교육을 반드시 수료하는 내용 등이 제시됐다. 김 교수는 “탈노동적 분배 대안인 기본자산제가 도입되려면 노동 중심적 분배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수용할 수 있게끔 동원 가능한 재원을 바탕으로 하고, 정치적으로 다수 구성원의 지지를 받도록 설계해야 한다”며 “영국의 아동신탁기금이 상당한 인기를 누렸지만 보수당이 집권하면서 폐기된 점을 미뤄볼 때 좌·우파를 넘어서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책을 시작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고 말했다.
유용한 일 하면 ‘참여소득’ 지급…또 다른 대안 기본소득이나 기본자산은 ‘일하지 않은 이에게 돈(급여)을 준다’는 점에서 정치적·정서적 저항에 부딪힐 수 있다. 이를 고려하면 영국의 경제학자 앤서니 앳킨슨이 1996년 제안한 ‘참여소득’은 또 다른 대안이 될 수 있다. 기본소득·기본자산이 시민권을 조건으로 급여를 지급한다면, 참여소득은 참여를 바탕으로 급여를 주는 개념이다. 농촌의 낙후된 집을 청소하는 등의 다양한 자원봉사 활동부터 집에서 유아기 어린이 또는 노약자들을 돌보는 돌봄노동, 가사노동, 구직활동이나 교육훈련 수료 등이 ‘참여’의 개념에 포함될 수 있다. 다만 어떤 수준까지를 ‘유용한 일’이나 ‘참여’로 볼지 등을 놓고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승윤 중앙대 교수(사회복지)는 “참여소득의 장점 중 하나는 일자리 보장의 성격이 있어서 노동시장을 통한 분배를 주장하는 경제학자들까지 지지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국내총생산에 기여하기 때문에 국채를 발행하는 방식으로 재원을 마련하더라도 급여 지급에 따른 예산 소실을 보전할 수 있다”며 “참여의 범위 등을 정부가 ‘톱다운’ 방식으로 규정하는 게 아니라 ‘보텀업’ 방식으로 공동체가 유용한 일이 무엇인지를 정하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설계된다면 제대로 된 참여소득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