턴테이블을 하나 장만해보려고 벼르고 있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아티스트, 일레븐(11)이 불쑥 찾아와 레코드와 카세트테이프를 주고 갔기 때문이다. 그는 늘 ‘소리’에 관심이 많았다. 디제잉을 하면서 ‘소리’를 섞더니, 이내 ‘소리’를 수집하는 데 열심이었다. 빙하가 녹는 소리와 갑각류의 걸음을 녹음한 소리를 듣는 청음회를 함께 열었던 것은 잊을 수 없다. ‘소리’를 채집해서 들려주다, 채집한 ‘소리’에 건반 연주를 올려 듀엣으로 만들었다. 드럼을 치는 민(min)과 함께 만든 이 음반에는 어떤 음악이 담겼을까 궁금해서 오래된 턴테이블의 먼지를 털었는데, 아뿔싸 전원도 들어오지 않는다. 지갑을 털어야 할 형편이 되었다.
자연스레 턴테이블 옆에 놓인 음반들로 눈이 간다. 내게 있는, 가장 오래된 판은 모리스 장드롱이 연주한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다. 중학교 졸업식 때, 짝사랑하던 선생님께 드리려고 푼돈을 모아 마련한 것인데 기회를 놓쳐서 내 차지가 되었다. 시디(CD) 시대로 넘어가서 파블로 카살스의 모노 녹음을 주로 듣기 전엔 늘 플레이어에 걸어 듣던 녀석이다. 옆에 있는 푸른하늘의 <겨울바다/하얀사랑>. 미팅 상대였던 친구가 레코드 가게에서 사서 글을 써주었네. 러시아가 소련이던 시절, 그곳의 음반이 싸다고 죽을 고생을 하면서 들고 온, 음반이 수십장 있다. 그중에서는 예브게니 키신의 데뷔 음반을 좋아했다. 무게를 겨우 이기면서 공항을 헤매던 기억이 아찔하네. 눈치챘겠지만, 나는 별로 음악적 취향이 없다. 하지만 버리지도 못하고 듣지도 않는 음반들엔 추억들이 걸려 있다.
음반들 사이에,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가 눈에 띈다. 영어 실력이 모자라서 가사도 모르고 좋아한 노래였다. 어둠이 모르게 심어놓은 환상의 씨앗이 네온 불빛의 자극을 받아 깨어나고, 서로 소리를 내지만 나누지는 못하는 상황을 담은 이 노래를, 무슨 생각을 하면서 들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 음반에 담긴 녹음을 했다는 공원에 갔을 때, 이 노래가 떠오르긴 했다.
<오리온 라디오의 밤>의 첫번째 이야기는 이 노래에서 시작된다. 오리온 자리도 잘 보일 정도로 맑은 겨울밤에 잘 들리는 오리온 라디오. 행방불명되어 찾을 수 없는 형의 소식을 오리온 라디오가 ‘침묵의 소리’와 함께 전한다. 작가는 하늘에 별이 가득한 장면에 노래 가사를 싣고 싶었는데, 저작권 문제로 넣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작가의 권유를 따라 노래를 들으면서 만화를 읽고 있다.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 메리 홉킨의 ‘그때가 좋았지’(Those were the days), 제이거 앤드 에번스의 ‘서기 2525년’(In the Year 2525), 밥 딜런의 ‘해 뜨는 집’(The House of the Rising Sun) 같은 오래된 팝송들과 시대와 시간이 변형시킨 작가의 기억이 엇갈리면서 혁명, 유리겔라, 집 나간 아빠, 기다리는 아이, 인공 뇌의 기억 속에서 사는 미래, 친구들의 우정과 엇나간 질투와 같은 이야기들이 책 속에 빽빽하다. 노래로 기억과 환상 사이를 휘젓더니 갑자기 등장한 영화들. 로저 코먼의 비(B)급 에스에프 괴수 영화 <세계가 멸망한 날>, 얼 켄턴의 <드라큘라의 집>, 그리고 빅터 플레밍의 <오즈의 마법사>. 이 영화들도 노래처럼 추억과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노래든 영화든 때가 있다. 만들어진 때, 노래를 부른 때, 영화가 상영된 때, 유행한 때, 다시 듣거나 다시 보는 때. 그리고, 떨어진 시간들은 기억이 잇는다. 불규칙하게 이어진 기억은 기쁘고 아련하고 슬프고 애잔하다. 그 감정의 떨림이 이제는 뒷방으로 물러간 레코드판이나 라디오를 다시 꺼내도록 만든다. 음원을 통해 듣는 멜로디에서만 찾을 수 없는 기억들은 음반에, 혹은 그 플레이어에 묻어 있다. 앨범 재킷에 쏟은 커피, 만년필로 갈겨쓴 메모, 찌그러진 모서리, 바늘 나간 플레이어. 소파 위에서 뒹굴거리며 본 영화에는 담배 물고 동동거리며 도착한 재개봉관의 음습한 냄새가 없다. 프랑스식 꽃다발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바라보던 샹들리에도.
만화애호가
※격주에 한번,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