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창간 90돌을 맞은 건축디자인 잡지 <도무스>의 1939년 발간본 표지. 원오원플러스 제공
내가 처음 만든 잡지는 초등학교 학급문집이었다. 친구들의 글을 모아 가면 선생님이 필경사가 되어 반듯한 글자로 기름종이를 긁어 쓰셨다. 그 위에 비단 천을 붙이고 잉크가 묻은 롤러를 굴리면 긁어낸 부분으로 잉크가 스며들어 종이 위에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손이 새까맣게 될 때까지 등사기를 돌려 만든 갱지들. 낱장을 묶어 잡지를 만들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선명하다. 내가 아직도 잡지를 만들고 있는 것은 그 기억 때문은 아닐까?
따지고 보면, 나는 세상 모든 일을 잡지를 통해 배웠다. 광고 일을 하셨던 아버지가 월말이면 다양한 잡지를 집으로 들고 오셨다. 여성지, 만화잡지, 교양지, 그리고 시사지들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낄낄대면서, 찔끔거리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시험 하루 전날에도 교과서와 참고서를 뒤로 치우고 숨어서 잡지를 뒤적였다. 매달 수십권씩 쏟아지는 잡지들을 소화하느라 고생 좀 했다. <이다>라는 문화잡지를 함께 만들자고 찾아온 친구들의 손을 선뜻 잡은 것도 잡지에 대한 오랜 기억과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인연이 이어져 50년 넘게 나오고 있는 <문학과 사회>의 발행인을 맡기도 했다. 친구들과 모여 <인문예술잡지 에프>를 만들었고 지금은 <과학잡지 에피> 16호를 마감하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생각과 취향이 비슷한 친구들과 모여서 잡지를 만들었고 그보다 조금 더 많은 독자들만 만난 셈이니, 상업적으로는 실패한 잡지들만 만든 셈이다. 20세기를 풍미한 취향과 아이콘을 다룬 만화 <친애하는 20세기>는 내가 만든 잡지들과 달리 성공한 잡지들을 다룬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라이프>, <도무스>, 그리고 <비저네어>.
지구의 일기장이라고 불리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시작은 내가 친구들과 모였던 것과 별다르지 않았다. 초대 발행인이었던 가드너 허버드가 1888년에 법률가, 군인, 은행가, 발명가, 생물학자, 탐험가, 기상학자, 지리학자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리 지식을 전파하기 위한 협회를 만들었고 잡지도 창간했다. 20세기를 앞두고 길버트 호비 그로브너가 편집장이 되면서 인상적인 사진을 중심으로 잡지를 개편했고 극지부터 우주까지, 세계 곳곳의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선사했다. 종이잡지가 사라져가는 지금도 28개국에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사진을 한가득 담은 또 다른 잡지 <라이프>는 1936년에 창간했다. <타임>과 <포천>을 만든 잡지왕 헨리 루스의 작품이었다. <라이프>는 각종 전쟁의 현장에서, 그리고 먼로나 비틀스 같은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사진에 담아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창간호 초판 38만부는 하루 만에 매진됐고 4개월 만에 100만부, 3년 후에는 200만부를 돌파했다. 가장 잘 나갈 때는 850만부를 찍기도 했다. 하지만 티브이(TV) 보급과 함께 주간지 <라이프>는 폐간되었다. 1972년이었다.
1928년에 조 폰티가 창간한 <도무스>는 20세기의 실내 공간과 조경과 원예, 반려견 등 다양한 생활·문화 정보를 담았다. 1979년에 조 폰티가 88살을 일기로 사망한 이후에 <도무스>를 이어받은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에토레 소트사스, 미켈레 데 루키와 같은 걸출한 디자이너 친구들과 디자인계를 확 뒤엎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그동안 디자인이 기능에 집착한 나머지 사람들 각자의 감성과 취향을 빠뜨렸다고 생각했다. 개성과 멋을 빼면 남는 것은 편리한 기계일 뿐이라는 이들의 주장이 호응을 받았다. 지금도 89개국에서 <도무스>를 발행하고 있으니 그들이 세상에 심은 이미지는 20세기라는 모자이크의 가장 큰 조각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강렬하고 극적인 이미지들이 평면에 깔린 잡지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패션모델 세실리아 딘, 메이크업 아티스트 제임스 칼리아도스, 사진작가 스티븐 강이 모여서 1991년에 시작한 <비저네어>는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고 듣고 즐기고 때론 입기도 하고 맛보기도 하는 잡지이다. 가격도 형식도 제각각인 실험들이 이어지고 있고, 그것이 21세기를 읽는 키워드가 될 수도 있다. 내가 만든 잡지들의 상업적인 실패는 이 시대 잡지들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이젠 범람하는 하나의 이미지 시대는 가고 작고 다양한 이미지들의 모자이크 시대가 됐다. 한곳의 발신을 수신하는 다수가 아니라 모두가 발신하는 세상에서 잡지는 가난할 수밖에 없다.
만화애호가
※격주에 한번,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