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비에스(SBS) <골 때리는 그녀들>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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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야, 시작!” 실로 놀라운 기세다. 에프시(FC) 구척장신(이하 구척장신)의 골키퍼 진정선은 에프시 불나방(이하 불나방)의 미드필더 박선영의 호쾌한 중거리 슛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다. 진정선의 손을 맞고 흘러나온 공은, 공교롭게도 골대를 향해 달려가던 불나방의 공격수 강소연의 코앞에 떨어진다. 세컨드볼 기회를 놓치지 않은 강소연이 슛을 날린다. 경기 종료를 1분 남겨놓은 후반 9분, 구척장신에 2:0으로 뒤지고 있던 불나방은 추격 골을 기록한다. 이제 스코어는 2:1이다.
과연 추격 골에 한골을 더해서 동점을 만들 수 있을까? 축구에서 2:0과 2:1은 아예 차원이 다른 점수라고, 1분 안에 드라마를 몇번은 쓸 수 있는 게 축구라고 하지만 상황이 그리 쉽지는 않다. 불나방의 정신적 지주이자 플레이메이커인 박선영의 다리는 진작부터 근육이 올라와 있는 상태다. 박선영도 이제 한계에 도달했는지, 필드를 종횡무진 뛰어 다니다가도 짬이 날 때면 두 손으로 종아리를 꾹꾹 누르며 근육을 풀어보려 애를 쓴다. 그러나 지켜보던 팀 내 동료들과 다른 팀 선수들, 감독들, 중계진은 모두 입을 모아 말한다. 한골이 들어갔으니 남은 시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낙관의 이유는 박선영이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환히 웃어 보인 박선영은, 경기 종료가 1분밖에 남지 않은 시점인데도 소리 높여 말한다. 이제 시작이라고. 다리 근육이 올라와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절뚝거리면서도 박선영은 조금도 투지를 꺾지 않는다. 마치, 거기에 자신의 인생이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기세를 본 사람들이라면, 아니, 박선영의 플레이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이라면 분명 모두가 수긍했으리라. 이러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고. 추격골을 기록한 불나방의 기세가 저렇게 등등하고, 리그의 ‘절대자’인 박선영의 투지가 저렇게 형형하니 말이다.
지난 14일 방영된 에스비에스(SBS) <골 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은 무릎 관절 악화로 당분간 리그를 떠나게 되는 박선영을 중심으로 서사를 펼쳤다. 안 그래도 누가 골때녀 슈퍼리그 3위에 올라 단상에 오르는 마지막 팀이 될 것인가를 두고 치열했던 불나방과 구척장신의 3·4위전은,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기약 없는 회복에 들어갈 박선영의 ‘라스트 댄스’를 승리로 장식하고 싶어 하는 불나방의 승부욕 때문에 더더욱 뜨거워졌다.
부상이나 컨디션 악화로 프로그램을 떠나는 선수들은 많았지만, 이렇게 팀 전체가 뜨거워지고 리그 전체가 술렁이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선영이니까. “저는 끝이라고 생각 안 하고, 회복 다 하시고 당연히 돌아오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의 정체성이시니까.” 골때녀의 정체성, 이날 불나방과 맞붙었던 구척장신의 주장이자, 파일럿 때부터 박선영과 함께 골때녀를 지켜온 이현이의 말이다. 슈퍼리그와 챌린지리그를 합쳐 60명의 선수들이 뛰고 있는 골때녀 전체의 정체성을 어떻게 한 선수의 존재로 축약할 수 있을까 싶지만, 박선영이라면 그럴 수 있다. 골때녀는 그 출발부터 박선영에게 기댄 프로그램이니까.
리얼리티 예능 <불타는 청춘>에서 박선영이 보여준 예사롭지 않은 운동 실력을 눈여겨본 제작진은, 박선영의 존재를 믿고 골때녀를 만들었다. 과연 박선영은 대부분의 선수들이 미니축구의 룰을 모르고 헤매던 파일럿 시절, 홀로 압도적인 플레이를 선보이며 리그의 스타 플레이어이자 ‘절대자’로 등극했다.
자칫 아직 축구가 낯선 선수들의 몸개그를 보고 웃는 것으로 전락할 뻔했던 이 기획은, 그라운드를 가르며 통쾌하게 골을 넣고 포효하는 박선영의 존재 덕분에 그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시즌 초창기, 골때녀의 다시보기 클립의 상당수는 박선영의 그림 같은 마르세유 턴과 놀라운 득점 장면들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축구를 잘한다는 것만으로 박선영을 ‘골때녀의 정체성’이라 부르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박선영조차 제대로 축구를 하게 된 건 골때녀가 처음이라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일까.
에스비에스(SBS) <골 때리는 그녀들> 화면 갈무리.
초등학교 때부터 육상을 했고 대학도 농구로 합격한 사람이지만, 박선영은 이상하게 축구와는 인연이 없었다. 대학생 시절 학교에서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모집 공고가 떴지만, 그때는 이미 박선영이 모델 커리어를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박선영은 조기축구회에도 가입했지만, 제대로 된 축구를 하기 어려웠다. “조기축구회에 가입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회원은 대부분 남자였죠. 여자들은 들러리처럼 세워두기만 하기에 ‘우리는 언제 뛰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여자들이 뛰면 오프사이드도 없는 걸로 하고, 공을 손으로 잡아도 되는 걸로 규정을 완화해서 적용하더라고요. 그러니 재미가 없죠. 그나마 필드에서 뛰는 여자는 저뿐이기도 했고요.”(<한국일보>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조기축구회선 들러리” 이젠 맘껏 ‘골 때리는’ 배우 박선영’)
그랬으니, 여자들끼리 축구를 할 수 있다는 소식에 고민 없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쉰둘의 일이었지만 박선영은 주저하지 않았다. “50이 넘었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대신, “50이 넘어서 축구를 할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나”라며 도전을 선택했다. 박선영은 도전이 버겁지 않냐는 질문을 받으면 “인생에 크고 작은 도전이 없으면 하루가 너무 길지 않으냐”고 반문하는 사람이고, 자신이 모델의 길을 걷느라 놓쳐버린 축구의 기회를 두번 놓칠 생각 따윈 없는 사람이었다. 겁 없이 축구에 도전해서 멋지게 해내는 여자, 박선영이 골때녀의 정체성인 이유다.
이런 도전은 특유의 당당함 덕분에 가능했으리라. 1992년 문화방송(MBC) 탤런트 공채 시험을 보러 간 자리, 카메라 테스트에서 상대역으로 호흡을 맞춰주던 선배 김찬우가 웃음을 참지 못하자, 박선영은 심사위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곤 김찬우에게 정색하고 화를 낸다. 내 연기가 아무리 서툴러도 그렇지, 열심히 하는데 웃지 말고 제대로 받아달라고. 이미 데뷔해 스타의 자리에 오른 선배에게 정색하고 화를 내며 ‘제대로 받아달라’고 당당히 말하는 일은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30여년 전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당당한 도전정신으로, 박선영은 남들은 흔히 걷지 않은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드라마 <아들과 딸>(1992) 속 후남이(김희애)를 좋아하던 성소수자 옥자 역을 맡아 열연했고, 영화 <가슴 달린 남자>(1993)에선 지독한 성차별과 성추행이 난무하는 남초 회사에 남장을 하고 입사하는 남장여자 혜선 역으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에스비에스(SBS) 시트콤 <오경장>(1993)에선 오지명이나 임현식 같은 나이 많은 남자 경장들을 거느린 파출소장 역할을 맡았다. 성소수자, 남장여자, 남자들을 거느린 여자 상사 역할도, 지금 기준으로 봐도 흔하지는 않은 배역들이다. 박선영은 ‘센’ 배역들을 맡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본인이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쫓아다녔다. 공채 탤런트로 뽑히자마자 단역이 아닌 옥자 역을 할 수 있었던 건, 본인이 감독에게 먼저 그 역할을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누구보다 먼저 앞으로 나아간 개척자이면서도 박선영은 결코 혼자 가지 않는다. 박선영은 리그 최고 수준의 공격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팀이 리빌딩을 하는 동안 후방에서 볼 배급에 전념했다. 팀 동료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움직이려면, 게임 전체를 보고 팀을 아우르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경기가 끝나고 나면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가장 먼저 상대 팀 선수들에게 격려의 인사를 건네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으리라. 골때녀라는 프로그램이 잘되려면 리그를 구성하는 모든 팀들이 다 기량을 발휘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리그 내 선수들이 모두 동료라는 사실을 박선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3·4위전에서 최선을 다한 것도 자신의 영광 때문만은 아니었다. “꼭 단상에 올라간다는 이유이기보다는, 그냥 ‘이런 즐거움이 있다’는 걸 (팀원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박선영의 도전은 전염성이 셌다. 수많은 여자들이 ‘아직 늦지 않았구나’라는 자신감으로 축구 교실에 등록했고, 박선영의 그림 같은 플레이를 반복해서 리플레이하며 자신도 하고 싶다는 욕심을 부렸다. 멍투성이인 다리를 당당하게 드러내며 창피하게 여기지 않았고, 함께 축구를 배우는 여자들과 함께 팀을 만들어 경기에 나섰다. 이날 경기에서 박선영이 속한 불나방은 끝내 추가 골을 기록하지 못하고 2:1로 졌지만, 그럼에도 경기를 지켜본 모두가 기립해 박선영의 퇴장에 박수를 친 건 그런 이유였으리라. 당당한 도전자이자 연대하는 개척자에게 보내는 감사의 박수.
위대한 선수들의 플레이는 종종 시대의 풍경을 바꾼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박찬호의 호투가 국제통화기금(IMF)의 원조를 받던 암울한 시기의 한국인들을 고무시켰듯,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 진출한 박세리의 우승이 수많은 ‘박세리 키즈’를 낳았듯. 그리고 박선영의 플레이는 직접 축구를 해보고 싶다는 수많은 여자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 의미에서 멍들고, 까지고, 부어오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여자들이 그라운드를 당당하게 누비는 우리 시대의 광경은, 분명 박선영에게 일정 부분 빚을 진 것이다. 그가 회복을 마치고 다시 골때녀 그라운드로 돌아올 날을 고대한다. 수고하셨습니다, 캡틴.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