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연극을 한편 보러 갔다가 유쾌한 경험을 했다. 공연 쪽과 합의 안 된 녹화나 녹음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는 안내방송은 익히 들어 익숙했지만, 배우들이 직접 객석 사이를 돌아다니며 “시리야!” “헬로 빅스비!”를 외치는 건 처음 겪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능청스레 스마트폰에 탑재된 음성 어시스턴트를 호출하는 명령어를 외치는 배우들 앞에서, 관객들은 웃으며 스마트폰을 껐다. 와,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며칠 뒤 보러 간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리사이틀. 합의 안 된 녹화나 녹음이 문제가 되는 거로는 클래식 공연만큼 치명적인 경우도 드물 테지만, 안내요원들은 정중히 스마트폰 및 전자기기의 전원을 꺼달라고 요구할 뿐 이렇다 할 몸수색 같은 건 없었다. 간혹 인터미션 중에 스마트폰 전원을 켜서 텅 빈 무대를 촬영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구태여 이를 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사회관계망서비스가 뒤집어지는 사건이 있었다. 키워드는 ‘속옷검사’였다.
“가슴 좀 만진다면서 만지다가 ‘(애플)워치죠?’ 하면서 나를 작은 공간으로 끌고 가더니 옷을 올리라고 했다. (몸수색을) 밀어붙여서 어쩔 수 없이 (옷을) 올렸는데 어떤 분이 문 열고 들어와서 내가 속옷검사 당하는 걸 봤다. 너무 수치스럽고 인권이 바닥이 된 기분이었다.”
“가슴 만지는 건 (멤버) 바로 옆에서 했고, 벗겨야겠다 싶거나 더 만져봐야 알겠다 싶으면 뒤로 데리고 갔다. 나도 끌려갔는데 아무것도 못 찾아놓고 사과 한마디 없이 ‘나가실게요’ 이러더라.”
“윗가슴 꾹꾹 눌러보더니 밑가슴도 꾹꾹 눌러보고 열심히 만지길래 당황해서 ‘그건 제 가슴이에요’ 이랬다.”
공항 출국 심사도 이렇게는 안 할 거다. 국내 최대 기획사 하이브가 일본 시장을 겨냥해 제작한 신인 아이돌그룹 ‘앤팀’(&Team)은 지난 8일 서울에서 두번째 미니앨범 발매 기념 대면 팬사인회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 사인회에 참석한 여성 팬들은 집요하고 무례한 몸수색을 견뎌야 했다. 현장 스태프들이 ‘녹음 또는 촬영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스마트워치 등의 전자기기 소지 여부를 확인하겠다며 팬들을 대상으로 성추행 수준의 몸수색을 진행한 것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라온 참가자들의 토로는 그야말로 끔찍하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하이브 산하 팬커머스 플랫폼 ‘위버스샵’은 9일 사과문을 올렸다. 그런데 이 사과문도 상태가 썩 깔끔하진 않았다. “(전략) 팬사인회는 아티스트와 팬 간 일대일 대화의 자리로, 녹음 내용이 외부에 유출돼 팬과 아티스트가 함께 곤란해지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녹음과 촬영이 가능한 전자장비의 반입을 엄격하게 제한해왔습니다. 그동안 많은 팬분들께서 이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셨습니다. 그러나 8일, 전자장비를 몸에 숨겨 반입하는 사례가 다수 발생하여 이를 확인하는 보안 보디체크가 여성 보안요원에 의해 진행되었고, 기쁜 마음으로 행사에 참석한 팬 여러분에게 불쾌감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후략)”
요약하자면 이런 이야기다. “당신들이 자꾸 전자장비를 숨겨 들어오니까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몸수색을 한 거 아니냐.” 다 팬들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를 납득할 수 있는 팬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애초에 아티스트와 팬 사이의 대화가 외부로 유출되는 게 그렇게 문제가 된다면, 기록이 가능한 ‘영통팬싸’(영상통화 팬사인회. 영상통화를 기반으로 아티스트와 팬이 일대일 대화를 나누는 이벤트)는 도대체 왜 진행하는 것일까? 영통팬싸에서는 하지 않을 말실수가 대면 팬사인회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기라도 한다던가?
아티스트를 보호해야 하는 기획사로서는 통제 불가능한 리스크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점을 아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팬사인회에 참여한 모든 팬이 합리적이고 정중한 요구만을 한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합의되지 않은 촬영이 아티스트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지적 또한 일리가 있다. 실제로 2017년 3월에 있었던 걸그룹 ‘여자친구’의 팬사인회에서, 초소형 몰래카메라가 장착된 안경을 쓰고 온 남성 팬이 멤버들에게 적발된 사건도 있었다. 아티스트의 정신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수 있는 이와 같은 사례들을 ‘건강한’ 팬 문화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팬사인회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는 것이 모두 팬들의 잘못이기만 할까? 최근 팬사인회가 돌아가는 구조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렇게 말하기 어려워진다. 아이돌 팬사인회는 실물 앨범을 구매한 사람들에 한해 추첨제로 자리가 난다. 그러다 보니 팬사인회에 당첨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앨범을 적게는 수십장에서 많게는 수백장을 구매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몇장 정도를 구매해야 당첨이 가능한지”에 대한 정보까지도 현금으로 거래된다. 수백만원을 지출해야 간신히 아티스트와 만나는 1분 남짓한 시간에 응모라도 해볼 자격을 획득하는 뒤틀린 팬사인회 구조 속에서, 팬들의 기대치 또한 높아질 수밖에 없다.
물론 앞서 든 사례와 같이 아티스트 몰래 일방적으로 ‘도촬’을 시도하는 음습한 사례는 당연히 저지되어야 하고, 기획사는 그런 일로부터 단호하게 아티스트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스마트폰 등을 꺼내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고, 그 1분 남짓한 만남의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 간직하고 싶은 욕망까지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애초에 그 욕망의 근본적인 책임을 찾아 올라가다 보면, 끝내 건강하지 않은 구조로 돈을 벌어온 기획사들로 귀결된다.
지난 3월15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포럼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는 방시혁 하이브 의장. 연합뉴스
이와 같은 사건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이돌그룹 ‘엑소’(EXO)의 2016년 북미 콘서트, 필리핀 마닐라 콘서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고, 2019년 하이브 소속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러브 유어셀프’ 투어 일본 콘서트에서도 한국 여성 팬을 상대로 몸수색을 진행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조금만 검색해봐도 비슷한 사례들이 쏟아져 나온다. 가깝게는 2021년부터 멀게는 2012년까지. 긴 치마를 입고 콘서트장에 입장하려던 여자 팬에게 “다리 사이에 카메라 대포렌즈를 숨겼을 수도 있으니 치마를 걷어보라”고 요구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여성 팬들은 그때마다 분노했지만 그것도 다 그때뿐이었다. 자신들이 응원하는 아이돌의 이미지에 낙인이 찍힐까 두려웠던 여성 팬들은 기획사를 향한 항의와 사과 요구를 크고 요란스레 할 수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앤팀의 팬들은 기획사 하이브의 대처에 분노하면서도, 혹시라도 이 사건이 앤팀 멤버들에게 폐가 될까 조심스러워하고 있다. 자신들의 문제 제기로 인해 팀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건 또 피하고 싶은 것이다. 애초에 이 싸움에서 팬과 기획사는 대등한 위치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다. 팬들은 팬사인회에 한번 참석하려면 수백만원을 써야 하는데, 그걸 대등한 위치라고 볼 수가 있나.
그러니 기획사에선 사과문을 발표하고도 이런 입장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사과문을 발표한 다음날인 10일, 하이브는 한 언론을 통해 이런 입장을 밝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부 팬들의 주장은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중략) 현장 외주 운영사의 여성 보안요원이 현장에서 ‘잠시 터치하겠습니다’라는 안내 멘트를 한 후 손등으로 전자기기 의심 위치를 대략 체크했고, 팬 스스로 기기를 제거하도록 안내했다. 옷 속에 손을 넣거나 옷을 직접 올리는 등의 행위는 없었다.”(<스포츠조선> ‘[종합] 앤팀 팬사인회 논란, ‘속옷검사 성추행’ 사건의 전말은’ 2023년 7월10일 백지은 기자) 그러니까 일부 유난스러운 사람들이 통상적인 몸수색을 과장한 것이라고 말하며 사태가 넘어가길 바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늘 그렇듯 조용해질 테니까.
기획사의 팬덤 대우가 이러니 업계의 모든 사람이 여성 팬들을 하찮게 여긴다. 십수만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콘서트장에서 보안요원들에게 반말로 무례한 안내를 받는 것은 물론, 공항 입출국 등 여성 팬들과 접점이 생기는 현장에서 보안요원들의 아티스트 과잉 보호로 인해 여성 팬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사례도 셀 수 없이 많다. 케이팝 업계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도록 시장을 지켜온 산업의 중추인 여성 팬들은, 돈과 시간과 열정으로 가장 많이 헌신하면서도 가장 천시당하는 자리에서 ‘그렇게 대해도 되는’ 취급을 받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한국 아이돌 산업의 태동기 때부터 여성 팬들을 ‘빠순이’라 부르며 멸시해왔던 오래된 습속의 잔재이며,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기는커녕 대놓고 동조하며 팬들을 착취해온 업계 전체의 문제다.
이번 앤팀 팬사인회 속옷검사 사태를 두고 “금속탐지기를 도입하라” 같은 해답을 도출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녹화나 녹음 장비가 문제라면 금속탐지기를 도입하면 되고, 현장에 금속탐지기를 도입하는 데 큰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아이돌을 좋아하는 여성 팬’들은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업계 전체의 인식에 있다. 글의 첫머리에 예로 들었던 것처럼, 연극계도, 뮤지컬계도, 클래식계도, 그 어떤 업계도 팬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팬을 대하는 업계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이와 같은 일들은 언제 어디에서든 다시 반복될 것이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