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미경의 TV남녀
8일 오전 서울의 한 종합병원 복도. 하얀 가운을 입은 한 무리의 의사들이 휘적휘적 지나간다. 왠지 병정들의 사열행진 같다. 맨앞, 반보 앞서 걷는 이가 대장 같다. 득의양양한 얼굴로 입을 뗀다. “외과의는 수술이 생명이야~!”
의학드라마 <브레인>(한국방송) 촬영현장이다. 대장놀이를 즐기는 듯 보이는 그 의사는 천하대병원의 신경외과의 이강훈이다.
“와, 신하균이다.” 촬영장을 애써 찾아온 듯한 10~30대 남녀들이 멀찍이 떼를 지어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댄다. 요즘 드라마 팬 사이에선 ‘신하균 앓이’가 대세다. 신하균 때문에 아프단다. 20부 중 16회가 방영된 현재 <브레인> 게시판엔 1만8500건의 시청자 글이 올라 있다. <뿌리깊은 나무>(7500여건), <천일의 약속>(3700여건)을 압도한다. 디시인사이드 ‘브레인 갤러리’에는 7만5000여건! 아마도 영화 <지구를 지켜라>, <공동경비구역 제이에스에이>를 통해 자기만의 연기영역을 구축한 뛰어난 배우라는 상찬을 들었을 때도 이처럼 대중적인 ‘앓이’의 주인공은 아니었지 싶다.
병원내 정치를 다룬다는 이 드라마를 처음부터 본방사수한 건 아니었다. 주말 재방을 몰아 보다가 신하균이 연기하는 이강훈의 ‘묘한 캐릭터’에 놀랐다. 욕망덩어리! 저런 속물이 있나! 처음엔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인 줄 알았다. 속물, 권력, 욕망. 이 세 낱말이 몸속 깊이 박힌 인물이다. 물론 그는 실력도 최고다. 권력 중심에 서려고 제 능력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다. 남의 업적을 제 것이라고 사기 치진 않지만, 이른바 ‘정도’가 아닌 편법도 때로 택한다. 극중 천하대병원 조교수에 임용되려고 신경외과 과장의 논문을 써주는가 하면 그 과장 앞에 굴신한다. 내 기억에 극의 갈등 제조기인 악역이나 조연이 아니라면, 이렇게 드러내놓고 출세에 몸을 던지는 속물 드라마 주인공은 드물었다. 대개 주인공의 욕망은 보편적 시청자들이 보기에 수긍할 만한 ‘옳은 방법’의 틀 안에서 구현된다. 그래서 악역의 음모에 맞서는 주인공의 행동은 간난신고 끝에 ‘꿈’을 이루는 모습으로 느껴진다. 이강훈은 과거 <하얀 거탑>의 권력지향형 외과의 장준혁(김명민)을 연상시키지만, 출세 방법론에서 더 노골적이다. 주목할 것은 이강훈이 가난한 집안의 자식, 곧 개천에서 난 용이란 점이다. 반면 그 상대역 서준석(조동혁)은 아버지가 같은 병원 의사다. ‘대물림 의사’로서 태생이 ‘귀족’인 그는 실력이 이강훈보다 못한데도 병원 권력구도 속에서 먼저 조교수를 꿰찼다.
이 권력게임에서 밀려났던 이강훈이 한 기업총수의 뇌를 수술해주고 천하대병원에 복귀하자, 이 드라마를 연출하는 유현기 피디의 말을 전하면, 시청자 게시판엔 “영웅의 귀환”이라는 둥 환영 글이 넘쳤다. 계층상승 통로가 점점 좁아지는 오늘 한국사회를 사는 수많은 ‘개천 용’들에게, 이강훈은 성공의 판타지를 작성하고 있다. 그의 성공을 기뻐하는 내게, 그래도 물음은 남는다. ‘개천 용’은 편법을 써도 되나? 유 피디가 에둘러 답한다. “실력 있어도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잖아요. 많은 직장인들이 이강훈을 연민하고 공감하더라고요. 가진 거 없는 사람이 저리 큰소리치며 돌아다니니까.”
방송미디어팀장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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