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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딸바보 아버지들 가슴 적시는 ‘내 딸 서영이’

등록 2012-11-16 19:35수정 2012-11-17 11:39

[토요판] 허미경의 TV남녀
한 남자의 얼굴에 비로소 그득하게 미소가 번진다. 서울의 부자동네 골목길, 을씨년스러운 전봇대 뒤다. 허름한 점퍼 차림의 늙수그레한 이 남자, 누가 볼세라 숨어 있다. 물끄러미 뭔가를 지켜보고 있다. 그가 웃을수록 이마와 눈가, 뺨을 따라 지그재그로 파인 주름이 더욱 자글자글해진다.

저만치, 솟을대문을 열고 날렵한 스포츠복 차림의 젊은 부부가 아침 운동을 나서는 모양이다. 남자가 무릎을 굽힌 채 사뭇 다정하게 여자의 신발 끈을 매만져 준다. 여자가 손을 내리뻗어 남자의 머리칼을 무심히 쓰다듬는다. 둘은 행복하다.

둘을 지켜보는 전봇대 남자, ‘이삼재’(천호진)의 얼굴이 외려 더 환해진다. 젊은 부부는 그의 딸 ‘서영’(이보영)과 사위(이상윤)이다. 딸의 행복을 몰래 엿봐야 하는,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는 아버지의 ‘행복한’ 주름살. 이 아버지의 애잔함에 보는 이의 가슴이 뻐근해진다.

드라마 <내 딸 서영이>의 아버지 이삼재(천호진). <한국방송> 제공
드라마 <내 딸 서영이>의 아버지 이삼재(천호진). <한국방송> 제공
<내 딸 서영이>는 아버지를 위한 드라마이다. 30%대 시청률로 방송 프로그램을 통틀어 가장 많은 안방 관객을 모은다. 최근 몇년 사이 괄목할 만큼 늘어난 ‘텔레비전 보는 아저씨’, 40~60대 남성 시청층에 부응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가난한 집 딸과 아버지의 애증과 화해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내 딸 서영이>는 이 딸이 멀쩡한 아비의 존재를 부정하고 고아라고 거짓말한 뒤 3년 넘도록 그 거짓을 남편과 시집에 숨긴 채 산다는, 이른바 ‘막장성’을 부인하기 어려운 설정에서 출발한다. 그런데도 보편적인 호응을 끌어내는 까닭은 인물들을 지극히 인간미 있게 그려낸다는 데 있다. 한효주·이승기 주연의 2009년 히트작 <찬란한 유산>에서 그랬듯이 작가 소현경씨의 특장이다.

배우 천호진이 열연중인 이삼재는 이 시대 ‘힘없는 서민’ 아버지들을 표상한다. 아이엠에프 실직 뒤 ‘한탕’ 사업에 몰두하다 번번이 거덜내고 엄청난 빚과 끼니마저 걸러야 하는 가난을 아내와 딸에게 떠넘기고 사라졌던 아버지이다.

<내 딸…>은 이삼재와 함께 또다른 두 아버지를 돋을새김한다. 친구 회사에서 갖은 치사함을 견디며 일하면서도 집에선 찬밥 대접을 받는 아버지(홍요섭), 준재벌급 기업을 일군 자신만만한 아버지(최정우)이다. 흥미로운 점은 설령 아버지가 아내를 저버리고 외도(최정우의 경우)를 할지언정 품격 있는 인물로 그린다는 점이다. 반면 극중 어머니는 내조를 위해 ‘사장 부인’인 친구에게 간·쓸개 내놓으면서도 정작 남편은 대놓고 무시하는 여자(송옥숙)이거나, 고상한 척하지만 실제론 허영기로 꽉 찬 여자(김혜옥)로 그려진다. 아버지는 무능하지만 따듯하고(천호진·홍요섭), 유능하고 합리적인(최정우) 반면, 어머니는 리얼하게도 속물성이 넘친다. <찬란한 유산>이 그랬듯, 여성작가 소현경씨의 드라마에선 남성작가에게 보이는 모성 판타지는 없다. 대신 그 자리를 부성 판타지로 채우는 셈이다.

서영은 아버지가 집 나간 뒤 동생 학비를 벌었고 고3 때 전교 1등이면서도 학교를 그만두고 돈벌이에 나서 어머니와 함께 빚쟁이들을 감당하고 빚을 갚았다. 어머니마저 잃은 딸은 아버지를 차갑게 외면한다. 여전히 한탕에 미련을 둔 아버지의 가슴에 딸은 이렇게 못을 박는다. “저는 아버지가, 큰돈을 버는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아버지이기를 바랐어요. 늘 집에 들어오는, 한달에 50만원을 버는 아버지이기를! 그런데 아버지는 그걸 견디시지 못했다고요. 지금도요!”

‘200만원도 아니고 50만원만 벌었으면 되는데, 단번에 근사한 아버지가 되겠다는 욕심에 내가 50만원을 견디지 못했구나.’ 아버지의 슬픔과 회한, 아버지를 버린 딸의 눈물과 후회가 관객의 마음을 적시는 드라마이다.

허미경 대중문화팀장 carmen@hani.co.kr

사진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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