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한국방송2)
허미경의 TV남녀
안방 드라마의 기본 코드? 출생의 비밀, 기억 상실, 신데렐라 판타지. 흔히들 “뻔한 설정”이라며 막장드라마의 3요소로 꼽기도 하지만, 그건 표피만 보고 하는 얘기다. 출생의 비밀은 죄가 없다. 쌔고 쌘 신데렐라 캐릭터도, 툭하면 나오는 기억상실도 다 이유가 있다. 왜? 재미있으니까. 시청자들이 좋아하니까. 이야기의 탄생이 본래 그러했으니까. 쑥과 마늘을 먹고, 곰에서 인간이 된 고조선의 웅녀는 신분상승을 실현한 한국 신데렐라의 원조다. 고구려 유리왕도 출생의 비밀을 풀어줄 반쪽 칼을 품고 아버지 주몽을 찾아 헤맸고, 서양의 고대신화 속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도 출생의 비밀에서 시작했다. 우리 몸에 새겨진 드라마의 원형이랄까. ‘뻔한 설정’이니 하는 비난을 받을 만한 죄가 있다면 그 코드를 썼다는 게 아니다. 어떻게 썼느냐에 있다.
현재 최고 시청률(30%대)을 자랑하는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넝굴당·한국방송2)에도 그 세 가지 코드가 다 들어 있다. 그런데 새롭다. 인물들은 바로 우리네 가족과 이웃에서 텔레비전 속으로 굴러들어간 듯 현실감을 발산한다.
“오늘이 누구 제사인지 아니?”
여섯살 적 잃어버렸다가 얼마 전 30년 만에 찾은 ‘손자’(유준상)를 보고 할머니(강부자)가 말한다. 할아버지 제삿날인데도, 우리의 주인공 ‘손자며느리’(김남주)가 어쩐 일인지 저녁이 다 늦도록 회사에서 귀가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다.
“할아버지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고 아꼈는지 몰라. 돌아가시던 날, 너를 꼭 찾아야 한다고. 그게 그 냥반 마지막 말씀이셨다. … 너나 니 처한테는 갑자기 생긴 시댁, 제사 그런 것이 거추장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분 위해 할 수 있는 게 뭐겠냐. 따듯한 밥 한 끼 해서 올리는 거.”
“제가 하겠습니다.”
“하긴 뭘?”
“음식 준비요.”
“니가 왜? 니 댁 오면….”
“할아버지가 저 때문에 아파하셨는데, 제가 해야죠.”
“그건 니 댁이 해야지.”
“할아버진 제 아내 얼굴도 모르시잖아요. 제 얼굴을 보러 오시는 건데 제가 해야죠.”
출생의 비밀과 유년의 기억상실 코드를 간직한 이 남자, 미국에 입양돼 30년을 살다 귀국한 위인이다. 남녀 역할 구분이 강한 ‘한국의 전통적인’ 집안에서, “귀한 내 손주새끼”가 음식을 만들 순 없다며 몸 던져 만류하는 할머니를 뿌리치고, 누나와 여동생, 외숙모 등등 여자들을 모두 밀어내고 제삿날 부엌에서 팔을 걷고 전을 부치는 30대 중후반 남자의 모습은 상큼한 웃음과 기묘한 긴장감을 동시에 자아낸다.
시댁과 며느리 관계의 ‘한국적 특수성’을 탐구하는 이 드라마의 재미는 대부분 인물이 제 입장에 충실한 데 있다. 이는 곧 이중성이다. 며느리를 ‘딸같이 여기겠다’던 시어머니(윤여정)는 틈 나면 시어머니표 잔소리를 하기 바쁘다. ‘30년 만에 아들 찾은 가족’의 뉴스를 전해듣곤 “그 부모 심정이 어떻겠냐. 그 아들네, 부모한테 잘해야겠다”던 친정어머니(김영란)는 그 가족이 자기 딸의 새 시댁임을 알고는 ‘어머어머, 우리 딸 어떡해, 옴붙었네’ 하며 한 입으로 두말한다. 이런 시어머니의 이중성을 콕콕 꼬집는, 주인공의 올케 역시, 자신의 어린 아들이 여자친구한테 잘해주는 모습에는 참지 못한다. 신데렐라 성공담 같은 판타지형 드라마가 주류를 이루는 안방에 모처럼 잘 빚어진 ‘리얼리즘 드라마’가 찾아왔다.
허미경 방송미디어팀장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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