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스 101> 시즌2 마지막회가 방송되던 지난 16일 밤, 친구와 서울 시내의 한 호텔방을 빌려 함께 티브이를 봤다. 자정이 넘은 시각, 티브이에서 우리가 지지하던 연습생의 데뷔가 결정됐을 때 “꺅”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 ‘남자애들끼리 모인 프로그램이 재미있겠나’ 생각하다가 엠넷 <프로듀스 101 시즌2>를 봤다. 어느새 내 ‘고정픽’에 투표해달라며 영업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왜 이렇게 연락할 사람이 없지….’
금요일이던 지난 16일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협소한 인간관계가 하루이틀 된 이야기도 아닌데 스마트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며 인생을 돌이켜보게 됐다. 연락 안 한 지 몇년은 된 대학 친구한테 카톡해도 괜찮을까. 이 사람은 친한 취재원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오죽했으면 업무용 팀 메신저방에 글을 썼다. 후배들이 미쳤다고 생각할까봐 눈물을 머금고 지웠다. 급전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뜬금없이 청첩장을 보내려 했던 것도 아니다. 나에겐 단지 데뷔시켜주고 싶은 한 남자가 있었을 뿐.
직장인에게 찾아온 ‘어빠’들
그날은 마지막 ‘프요일’이었다. 지난 4월7일부터 6월16일까지 케이블채널 엠넷에서 하는 <프로듀스 101 시즌2>(이하 프듀)가 방영된 금요일을 팬들은 ‘프요일’이라고 불렀다. 이날 퇴근한 뒤 친구와 서울 시내의 한 호텔방을 빌려서 함께 티브이를 봤다. “떨려서 혼자 못 보겠다”며 친구가 제안했을 때 덥석 물었다. 마지막 데뷔조가 결정되는 날이었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 우리가 지지하던 연습생의 데뷔가 결정됐을 때 “꺅”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 뒤로 우리가 맥주를 마셨던가 소주를 마셨던가, 아님 섞어 마셨던가….
중2 이후 ‘오빠들’에게 빠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특히 직장에 다닌 뒤부터는 그럴 시간도 없고, 에너지도 없었다. 그러나 괜히 ‘덕통사고’(덕후+교통사고)인가. 교통사고처럼 덕통사고는 스스로 내는 것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치이는’ 것이다. 지난 5월 어느 주말, 재방송으로 나오던 프듀의 한 회분을 우연히 봤다. 101명 연습생 가운데 경쟁을 거쳐 투표로 선택받은 11명만이 보이그룹으로 데뷔할 수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내가 봤을 땐 이미 연습생들이 한 차례 대거 탈락한 뒤였지만, 그래도 출연하는 연습생만 줄잡아 수십명이었다. ‘누가 누군지 구별이나 되나….’ 정신을 차려보니, 집에 있는 아이피티브이(IPTV)로 씨제이이앤엠(CJ E&M) 방송을 무제한 볼 수 있는 월정액을 결제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그동안 놓친 방송을 티브이로 크게 보고 싶어서였다. 역시 좋은 건 크게 봐야 좋다.
처음엔 나도 어빠들(어린 오빠들)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을 즐기던 ‘머글’이었다. 특정 연습생을 지지하지 않는 일반 시청자였단 뜻이다. 그러다가 `고정픽'(고정적으로 지지하는 연습생)이 생기자 유사연애 감정이 생겼다. 행복하면서 고통스러웠다. ‘설마 데뷔 못하면 어떡하지….’ 순위가 한주는 오르고, 한주는 떨어졌다. 데뷔 안정권은 끝까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티브이에 어떻게 비치느냐에 따라 언제든 순위는 밀려날 수 있었다. 순위가 떨어지면 내 탓을 하게 됐다. ‘맞아, 그날 내가 피곤하다고 투표도 안 하고 그냥 잤지.’ 호되게 자책했다. 그다음부터 아침에 일어나 비타민 챙겨 먹듯 투표를 했다. 친한 ‘머글’ 친구들한테도 엠넷 누리집 회원가입을 시키고 투표를 독려(를 빙자해 강요)했다. 일하다 짬이 나면 네이버티브이에 올라온 직캠 영상을 돌려보고 기운을 냈다. 월요일이면 한없이 프요일이 기다려졌다.
10여년 만에 ‘덕질’을 하려니 새로운 문물과 언어를 배워야 했다. 나의 ‘최애’(가장 좋아하는 연습생)도 경쟁에 놓여 있지만 팬들도 상시적 경쟁체제에 놓여 있었다. 투표는 투표대로 하는 거지만, 지지하는 연습생을 단독 촬영한 ‘직캠’ 영상의 조회수도 끊임없이 올려줘야 했다. 자신이 보지 않더라도 영상을 틀어두는 팬들도 있다고 했다. (지금 팬질하는 10대들이 비디오 녹화를 알까?) 팬들의 ‘오카방’(오픈카톡방) 문화도 새로웠다. 서로 모르는 이들이 프로필도 가린 채 단체카톡방에 모여 해당 연습생의 최근 기사와 사진을 공유하며 ‘실시간 덕질’을 했다. 한두시간만 놓치더라도 메시지는 300건 이상 쌓여 있기 일쑤였다.
그나마 ‘현망진창’(현실이 엉망진창)이 덜 외로웠던 건 주변 친구들 덕분이었다.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입금하지 않는 건 마지막 자존심”이라던 친구가 “내 새끼 기살리려고” ‘조공’ 명목으로 10만원을 입금했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이 투표 인증샷을 보내주면 기프티콘을 보내주는 자체 이벤트를 하는 친구도 있었다. 또 다른 친구는 중국 출장 중에도 꼬박꼬박 투표를 했다. 나도 나지만, 너네 일 안 하니…?
엠넷의 <프로듀스 101 시즌2> 마지막 방송을 앞두고, 서울에 위치한 한 고등학교 교실에 붙었던 연습생들의 사진과 투표 독려 문구.
열성 엄마의 마음으로
프듀는 ‘시청자’를 ‘국민프로듀서’라고 불렀다. ‘시청자’는 소파에 누워서 편안히 티브이를 보지만, ‘국프’는 돈 한푼 받지 않고 자발적 노동을 한다.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알아서 갈아 넣는다. 지난 5월31일 기준, 서울 지하철 1~8호선 역사에 설치된 아이돌 광고판 101개 중 40개가 프듀 연습생들의 투표를 홍보하는 목적이었다. 광고 비용은 1개월에 하나당 100만원이 훌쩍 넘지만, 팬들은 빠르면 하루 만에 모금을 끝내기도 했다. 이런 ‘높은 구매력’은 프듀 시청자 구성이 전통적인 팬덤 연령대가 아닌 30·40대 여성들까지 확대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엠넷이 추정한 통계를 보면, 시청자 가운데 10대 여성이 24%로 가장 많았고 30대 여성(19%), 40대 여성(15%), 20대 여성(13%)이 뒤를 이었다.
왜 프듀에 빠졌느냐고, 20대 후반~30대 초반 주변 친구와 지인들에게 물었다. 대부분 처음엔 이렇게 대답했다. “어리고 잘생겨서.” 그런 사람 티브이에 많이 나오잖아. “나한테 없는 꿈이나 열정, 생기가 있어. 내 기분 맞춰 돌아가는 환경이 잘 없는데, 기를 쓰고 잘 보이려고 하니까 안쓰럽지만 귀엽기도 하고….”, “회사 다니면서 그런 거 잊고 살았잖아. 꿈, 열정 그런 거. 걔네는 아직 성공한 연예인이 아니고 간절하게 데뷔를 하고 싶어하니까 내가 이뤄주고 싶고…. 아들 키우는 거였지 뭐.”
대부분 ‘양육자의 마음’이었다고 고백했다. ‘내 새끼 내가 데뷔시킨다’는 마음. 많은 프듀팬들이 인터넷에서 스스로를 ‘○○맘’, ‘○○앰’으로 가리켰다. 어쩐지 우리는 ‘내 새끼’를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해 대학 보내는 열성적인 한국 학부모의 멘탈리티와 비슷해졌다. 늘 데뷔 커트라인에서 간당간당하던 연습생을 지지하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1·2위를 다투는) 강다니엘이나 박지훈 연습생 팬들이 부러워. 사실 둘 다 데뷔는 거의 한 거나 마찬가지고, 센터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잖아. 그건 자식이 서울대 가느냐 마느냐 정도의 문제라고. 우린 대학 추가합격 기다리는 심정이고.” 내가 ‘현생’에서 못 이룬 꿈 내 새끼는 이루게 해준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하나가 됐다.
사회생활에선 무엇 하나 쉽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지만, 투표를 통한 데뷔는 국프에게 ‘권력’을 주기도 했다. “회사에선 나쁜 애들이 설치지만, 여기선 투표로 권선징악을 보여주고 싶기도 해. 치졸하거나 얍삽하게 구는 애들이 있고 자기 희생하는 애들이 있으니까 투표로 결과를 보여주고 싶더라고.” 회사 생활에 지친 친구가 말했다.
공정함, 공정함을 원해
‘공정성’ 논란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숙명이지만, 프듀의 공정성 논란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됐다. 제작진은 ‘국민프로듀서들이 보이그룹을 만들 수 있다’고 했지만 한정된 방송 시간에서 애초부터 공평한 분량은 불가능한 얘기였다. 초기에 떨어진 수십명의 연습생은 대부분 국프들에게 얼굴도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탈락했다. 자연히 ‘피디픽’, ‘엠넷픽’이라는 말이 돌았다. ‘국프’들이 보기에 실력도 외모도 부족한데 분량을 얻는 건 오로지 제작진 마음에 든 덕택 아니겠느냐며 ‘피디픽’을 의심했다. 방송 시간 제한은 어쩔 수 없으니 인터넷에 ‘비하인드 영상’을 풀어달라는 요구도 거셌다. 그래야 정말 모든 연습생들이 ‘공정한’ 평가를 받지 않겠느냐는 취지였다.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과 달리, 프듀만의 특수한 ‘1인2픽(투표)’이라는 제도 자체가 ‘민의’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견제픽’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일부러 고정 팬층이 두텁지 않은 연습생한테 투표해 ‘내 새끼’와 경쟁 상대가 될 연습생을 떨어트리려는 기존 정치권 뺨치는 선거 전략이 나부끼고 있었던 것이다. 성실하게 ‘최애’와 ‘차애’(그다음으로 좋아하는) 연습생에게만 투표하던 팬들은 ‘1인2픽’을 없애라고 성토했다. 프듀의 안준영 피디는 프로그램 종영 뒤 언론 인터뷰에서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2픽이라고 생각해, 기획 단계부터 2픽을 얘기했다”고 말했다. 시즌1 때와는 다른 지점이었다. 국프들이 1명만 뽑을 수 있었던 건 마지막 생방송 때뿐이었다.
공정성 논란이 폭발한 건, 데뷔조를 만드는 마지막회에서였다. 20명 가운데 중간투표 결과를 11~14위까지 공개하면서, 투표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실제로 탈락 위기에 놓인 4명 가운데 3명이 최종적으로 보이그룹 ‘워너원’ 멤버로 뽑혔다. 제작진은 “긴장감을 위해서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제작진에게 중요한 건 쇼의 ‘재미’와 ‘흥행’이었고, 팬들은 공정한 시스템 안에서 ‘내 새끼’ 데뷔가 전부였다. 둘은 쉽게 만나기 어려웠다.
쇼가 끝나자, 아들을 대학 보낸 뒤 찾아오는 우울감이 이런 것인지 내겐 알 수 없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친구들은 하나둘 ‘탈프듀’를 한다고 선언했다. 좋아하던 연습생이 데뷔를 하지 못해서, 데뷔를 했더라도 함께 뽑힌 다른 연습생이 좋지 않아서. 이유는 분분했지만 목표를 잃은 국프들은 쇼가 진행될 때만큼의 동력을 상실했다. 그래도 당분간 흥분은 지속될 전망이다. 7월1~2일 프듀 콘서트가 열린다. 정가 7만7000원이던 티켓 가격은 암표로 120만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최근엔 콘서트 티켓을 원하는 이들의 푼돈을 가로챈 10대가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알고 있다. <프로듀스 101>은 어린 연습생들의 꿈을 저당잡아 쇼비즈니스로 만든 잔인한 프로그램이다. 이들은 방송 내내 출연료 한푼 받지 못했다. 행여나 욕심 많고 이기적인 캐릭터로 편집돼 방송에 비치면 마음고생까지 덤으로 겪어야 했다. 하지만 피말리는 경쟁 사회의 냉혹한 시스템 자체를 비판할 수는 있어도 그 안에서 개개인의 노력까지 무의미한 건 아니다. 현실이 그렇듯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내 ‘최애’를 응원하고 싶었다. 101명의 연습생들, 그동안 고마웠어. 우리 시즌3에선 만나지 말자.
은퇴한 국프
엠넷의 <프로듀스 101 시즌2>는 남자 아이돌팀을 구성하기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10~40대 여성들로부터 인기를 모았다. 엠넷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