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해영이 4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신장을 적출당한 채 눈을 뜨고 누워 있는 주검. 방영 중인 드라마 <듀얼>(오시엔)은 9회에 등장한 이 한 장면으로 반전됐다. 긴장감이 떨어지던 이야기 흐름에서 불쑥 등장한 이 장면은 늘어져 있던 심장을 순식간에 조였다. 주검의 싸늘한 시선이 카메라를 향해 있어 마치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 오싹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표정만으로 화면을 압도한 내공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관심이 쏠렸다. 배우 이해영(47)이다. “연구할 틈도 없이 중간에 투입됐어요. 드라마에 폐를 끼칠까 걱정했는데, 제대로 잘 전달됐다니 다행입니다.” 4일 <한겨레> 신문사 사옥에서 만난 이해영의 실제 눈빛은 선했다.
드라마 <듀얼>(오시엔)의 한 장면. 방송 갈무리
이 눈빛의 어디에서 그런 싸늘함이 나올까. 1990년대 초반부터 40편이 넘는 연극과 드라마, 영화를 넘나든 공력이다. 그는 <듀얼>처럼 비중에 관계없이 맡은 역할마다 제 몫을 해왔다. 지난 1월 개봉한 영화 <공조>에서는 냉철한 형사로, 2014년 영화 <명량>에서는 이순신 곁을 지키는 든든한 장군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3월 끝난 드라마 <보이스>(티브이엔)에서는 강력계장으로 범인인지 아닌지 모를 미묘한 연기로 긴장감을 조성했다. “꾸준히 작품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자신을 낮추지만, 캐스팅될 때마다 기대 이상을 해내어 관계자들 사이에서 ‘믿고 쓰는 배우’로 꼽힌다. 한 드라마 피디는 “이 역할을 누가 해낼 수 있을까 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이해영을 찾는다”고 했다.
그의 연기는 서서히 스며드는 점이 다르다. 이른바 ‘감초’라고 불리는 배우들이 개성 강한 연기로 단번에 눈도장을 찍는 반면, 그는 첫눈에 반하진 않지만, 정신 차리고 보면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 액션이 크지 않고 외모의 변화도 적지만 작품마다 전혀 다른 인물이 된다. <보이스>에서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주름 짓는 것으로, <듀얼>에서는 “이 신장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것만으로 섬뜩함을 자아냈다. 그는 “내가 연기를 했다는 걸 들키는 게 싫다”고 했다. “여기서 내가 돋보여야 한다는 의도를 갖고 연기하면 그 장면은 재미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얕은 느낌이 들어요. 연기를 하기 전 흐름을 먼저 생각하고, 그 흐름 안에 녹아들려고 노력해요.” 팬들은 영화 <하이힐>에서 출입국관리소 직원으로 차승원과 대화하던 평범한 장면을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기도 한다.
작품안에 녹아들어 물 흐르듯 흘러가는 배우. 그래서 한번 작업한 피디들은 그를 다시 찾는다. <보이스>에서 함께 작업한 김홍선 피디도 2014년 <라이어 게임>(티브이엔)에서 처음 만나 2016년 <피리부는 사나이>(티브이엔), <보이스>까지 이어졌고, 방영 예정인 새 장르드라마 <블랙>(오시엔)도 함께 한다. 장진 감독과는 4편을 함께 했다. 아는 사람이 다시 찾는 건 그만큼 믿는다는 뜻이지만 그는 “하나씩 하나씩 옷을 벗는 느낌이어서 더 잘해야 한다는 고민이 크다”고 했다. 28년간 연기했는데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에 현장에서 피디한테 끊임없이 질문하는” 노력은 그를 ‘믿고 쓰는 배우’로 만든 힘이다.
이해영이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건 2008년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4>(티브이엔)에 출연하면서부터다. 열혈여성인 이영애와 대비되는 냉정하고 차분한 ‘장동건’으로 주연 못지않은 사랑을 받았다. 이후 <보이스>에서 간장게장이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이름을 알렸다. “<보이스> 이후 (거주지인) 남양주에서도 많이 알아본다”는데, 장동건에서 간장게장까지 9년 걸렸다. “30대 초반에는 조바심도 났어요.”
그도 처음에는 스타를 꿈꿨다. 밴드를 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밴드에서 기타 치는 게 꿈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때 뒤늦게 영화 <대부>를 보고 영화를 꿈꿨다. “<대부>를 보면서 내가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느낌이 좋아서 영화로 진로를 바꾸게 됐죠.” 서울예대에서 연출을 전공하다가 2학년 때 교수의 권유에 배우로 전향했다. 1996년 드라마 <자전거를 타는 여자>로 데뷔한 후 1998년 <순풍산부인과> 등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승승장구할 줄 알았는데 2002년부터 3년 동안 일이 없어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며 용산 씨지브이 극장 등 건물을 짓기도 했단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싶었어요. 2005년 장진 감독의 권유로 <연극 열전-택시 드라이버>에 출연한 게 잘되면서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로 이어졌고 다시 일이 풀리기 시작했죠.” 그러는 사이 정재영, 황정민 등 친구들은 모두 스타가 됐다. “상대적 박탈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식당에서 친구들이 사인해주는 동안 메뉴판만 빤히 보고 있기도 했고.(웃음) 그러나 허물없는 친구들이라 그들이 잘된 게 너무 좋아요.”
실제 만나본 이해영은 서글서글한 이미지에 젠틀했다. 주량은 소주 반잔이고 쉴 때도 유일한 취미인 골프 외에는 동네를 산책하고 영화 보는 게 전부라고 했다. ‘바른생활’은 배우에겐 장점이지만, 또 다양한 변신을 막는 벽이 될 수도 있다. “배우라면 극과 극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 성격이 그러지 못해서인지 역할도 극적인 역할은 잘 안 들어와요.” <보이스>와 <듀얼>을 계기로 이제 그 틀을 좀 깨보려고 한다. 최근에는 거친 이미지를 위해 수염도 길러보면서 “극단으로 치닫는 사이코패스” 역을 욕심내본다.
그를 아는 시청자들은 “이 사람, 이제 뜰 때도 되었다”고들 한다. 지금이 그때가 아닐까라고 물으니 “그 이야기가 나온 게 십년도 더 됐다.(웃음) 완만한 그래프 곡선이 올라가듯 조금씩 나아가는 게 나한테 맞다고 생각한다”며 선한 눈빛을 반짝였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이해영이 빛난 작품 5편
이해영은 1996년 드라마를 시작해 약 40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그중에서 배우 이해영을 대표하는 작품 5편을 스스로 꼽았다. 비중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그는 작품마다 깊은 인상을 남겨왔다.
■ 여심을 흔들다 <막돼먹은 영애씨>
이해영이라는 배우를 시청자들한테 처음으로 알려준 작품. 영애의 남자라는 별명이 생기는 등 반듯한 이미지로 여성 팬들한테 사랑받았다.
■ 묵직한 존재감 <명량>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다지만, 큰 영화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그의 묵직한 존재감이 빛났다.
■ 색깔 있는 연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청각장애를 앓는 이정현의 남편으로 등장해 평소 이미지와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며 틀을 깬 연기를 선보였다.
■ 대중성의 증명 <보이스>
‘간장게장’이라는 별명이 생기는 등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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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톱의 가능성 <
퀴즈왕>
출연자들을 진두지휘하는 인물. 영화에서는 함께 나오지만 혼자 촬영하는 장면이 많았다. 혼자서도 화면을 압도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