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8월 영화 <택시운전사>가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을 무렵,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지 묻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대부분 영화에 깊은 감동을 받고, 자신과 같은 감상을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그 감동을 재확인하고 싶었던 이들이었다. 미안하게도 내 반응은 늘 그들이 바라는 것보다는 시큰둥했다. 실제로는 한반도의 정치 상황을 꾸준히 지켜보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광주로 들어왔던 위르겐 힌츠페터의 캐릭터가, 영화 안에서는 다분히 평면적이 된 게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생계 때문에 광주행을 택했다가 국가폭력을 목격하고 각성하는 인물로 그려진 택시운전사 김사복씨 또한 실제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을 가진 투사였다. <화려한 휴가> 때에도 그랬지만,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들은 종종 관객들을 설득하기 위해 광주항쟁에 참여한 이들이 대부분 상식을 벗어난 불의에 맞서 싸운 평범한 시민들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과정에서 신군부의 민주주의 역행을 저지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전남대 앞 시위를 조직했던 학생들의 모습은 주변부로 밀려나거나(<택시운전사>) 일찌감치 서사에서 탈락한다(<화려한 휴가>). 항쟁이 지니는 입체적인 면모가 지나치게 납작해지는 게 내겐 늘 불만이었다.
하지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나는 <화려한 휴가>와 <택시운전사>에 대해 다시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광주항쟁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첫 계기가 <화려한 휴가>나 <택시운전사>였다고 말한 이들이 의외로 많았던 게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전교조 선생님들을 만나 한국 근현대사 조기 교육을 받았던 나와 달리, 이 영화들이 아니었다면 광주항쟁에 대해 간략한 개괄 이상의 정보를 접하지 못했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던 영화가, 다른 누구에겐 요긴하고 절실한 영화였을 수 있다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게 된 것이다. <화려한 휴가>나 <택시운전사>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광주항쟁 영화라고 말할 생각은 여전히 안 들지만, 이 영화들이 사람들에게 광주항쟁을 알리고 설득하는 효과적인 텍스트였다는 점만큼은 흔쾌히 높게 평가하게 됐다.
작년의 경험을 최근 새삼 상기하게 된 계기는 인도 영화 <당갈>이었다. 적은 개봉관 수와 징검다리 상영 시간표에도 꾸준히 입소문을 타며 유의미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이 작품은, 인도의 레슬러 자매, 기타 포가트와 바비타 포가트,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이자 코치인 마하비르 포가트의 실화를 다룬 스포츠 전기영화다. 영화를 볼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들려온 관람평은 극과 극이었다. “여자가 레슬링을 하는 걸 이상하게 보는 주변의 시선을 뿌리치고 세상 앞에 자신을 증명한 당당한 여성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라는 호평과, “엄한 가부장으로부터 페미니즘을 강제 주입당하는 딸들이 주인공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느냐”는 혹평 사이의 온도차는 작지 않았다. “아버지가 떠먹여준 페미니즘”이랄지 “나라에 금메달을 안겨줘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주제의식과 여성의 자아실현을 응원하는 페미니즘적 주제의식의 기묘한 동거”라는 지적까지 들었을 때, 나는 일단 영화를 보고 판단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과연 <당갈>은 기묘한 영화이긴 했다. 단순히 재능이 있어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식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딸들을 윽박질러 혹독한 레슬링 훈련을 시키는 마하비르(아미르 칸)는 아무리 좋게 봐도 폭군이고, 그런 폭군이 딸들에게 “너는 상대팀뿐 아니라 여자를 하찮게 보는 모든 사람들과 싸우는 거다. 네가 내일 이긴다면 넌 너 혼자 이기는 게 아니라 인도의 모든 여자아이들과 함께 이기게 될 거다”라는 말을 건네는 장면은 희한했다. 하지만 <당갈>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 여전히 딸이 14살만 넘으면 낡은 가구를 처분하듯 시집을 보내버리는 조혼 풍습이 공고하며, 남녀 성비가 심하면 128 대 100에 이르는 심각한 남초 지역이라는 걸 생각하면 “금메달을 따는 데 아들이 따면 어떻고 딸이 따면 어떻단 말인가”라고 반문하는 <당갈>이 주는 쾌감은 부정하기 어렵다. 자신보다 덩치가 큰 남자 선수들과 호각으로 싸우다가 마침내 상대를 가뿐히 들어 메치며 월등한 기량을 뽐내는 기타(파티마 사나 샤이크)와 바비타(사니아 말로트라)의 당당한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나, 그들이 코먼웰스 게임(영연방 국가들이 참여하는 스포츠 경기)에서 우승한 이후 수많은 인도의 여자아이들이 조혼의 압박에서 벗어나 레슬링을 연마하기 시작했다는 자막이 주는 뿌듯함은 상상 이상이다. 어떤 이들에겐 <당갈>이 많이 찜찜하고 불충분한 텍스트이겠지만, 그렇다고 <당갈>이 많은 걸 성취한 영화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기술의 발전과 인권 의식의 성장에 따라, 사회는 그 개방과 연결의 폭을 넓히는 중이다. 예전엔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 포용되지 않았던 이들이 자신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중해줄 것을 요구하고, 그동안 은폐되어왔던 차별들이 하나둘 인권의 의제로 거론되기 시작한다. 이런 시대일수록, 모두를 만족시키는 좋은 텍스트를 만드는 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저마다 머릿속에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그려둔 그림이 있는데, 그 다양한 욕망을 모두 충족시키는 게 갈수록 어려워지니까. 인종적으로 편향되지 않고, 성별 비율에 치우침이 없어야 하며, 비장애인 캐릭터뿐 아니라 장애인 캐릭터 또한 배제되지 않는 텍스트인데, 그 와중에 인물들이 스테레오타입으로 묘사되지 않고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면모가 충분히 살아있어야 하며… 더 좋은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은 머릿속에 그려둔 이상적인 목표치가 있고, 그 이상치를 충족시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작품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나 공격으로 오인하곤 한다. 사람은 작품을 지지하면서도 그 작품의 한계를 비판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작품을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그 작품의 성취는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다. 지지하느냐 아니냐의 양자택일의 중간지대를 찾아 작품의 성취와 한계를 모두 바라보아야, 비로소 어떻게 하면 더 이상적인 텍스트를 만들 수 있을지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수록 정보의 홍수에 질려가는 사람들은 그 복잡한 논의를 “그래서 작품이 좋다는 거냐, 아니라는 거냐”라는 질문으로 압축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비평이나 감상의 영토는 점점 축소되고, 영화에 대한 감상은 점점 온라인 쇼핑몰 구매 후기와 비슷한 맥락으로 소비된다. 인터넷 포털의 네티즌 영화 평점란에는 선택할 수 있는 점수가 1점부터 10점까지 다양하지만, 조금이라도 논쟁적인 면모가 있는 작품의 점수 분포는 두 개의 탑을 그린다. 우르르 몰려가 1점을 준 사람들의 탑과, 그 반대편에서 우르르 10점을 준 사람들의 탑. “그래서 이거 사요, 말아요?”라는 양자택일의 질문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당갈>은 많은 부분에서 페미니즘적인 실천을 하고 있는 영화인 동시에 그 한계 또한 명확한 영화이며, 그 둘 다 깊게 숙의되어야 한다. <화려한 휴가>나 <택시운전사>는 광주항쟁의 여러 면모를 임의로 생략한 텍스트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동시에 많은 이들에게 광주항쟁을 알리는 창구로 작용한 영화다. 우리는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갈피를 잃을까 두려운 탓에, 지지와 반대라는 양자택일의 선택지만을 놓고 “너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것으로 고민을 멈추려 하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논의를 얄팍하게 만드는 주된 이유인지 모른다. 물론 제한된 지면 안에서 글의 선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이유로 자주 단언해온 나 또한 이와 같은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지하느냐 아니냐의 이분법을 넘어 성취와 한계를 모두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대화하는 법을 다시 익히기 시작할 것이다. 지방선거가 끝난 주에 반복해서 곱씹어본 생각은 이런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