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4월 문화방송 대하드라마 <땅>의 강제종료 이후 울분을 술로 달래던 김기팔 작가는 12월 끝내 세상을 떠났다. ‘해방 이래 땅의 소유 여부가 빈부 격차를 재촉해온 과정을 조명한 첫 사회경제사 드라마’로 평가받는 <땅>은 15회 만에 석연찮은 이유로 중단됐다. 사진은 <땅>의 주연 3인방, 왼쪽부터 최낙천·오지명·길용우. 엠비시 가이드 제공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김기팔 작가는 일찌기 1960년대초 동아방송 라디오의 <정계야화>부터 문화방송 티브이의 <제1공화국> <제2공화국> 성공으로 ‘정치 다큐 드라마’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했으나 91년 <땅>에서 정경유착 기득권의 벽에 막혀 쓰러지고 말았다. 사진은 86년 한국방송 <욕망의 문> 촬영장에서 출연배우 백인철(왼쪽)·정한용(오른쪽)과 함께 한 김기팔(가운데) 작가, 보기 드문 정장 차림이다. 사진 정한용씨 제공
김기팔의 죽음, 거인의 쓰러짐, 이것은 방송사적 변화의 예고다. 이제 한국의 방송에서 ‘거대 서사’는 끝나고 있는 것이다.
어느날 김기팔 작가는 푸념하듯 여러 차례 말했다. “그 선배가 그냥 있었다면, 한국의 방송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한 선배 연출가와 김기팔은 서울대 선후배로 좋은 짝이었다. 동양방송(TBC)에서 <춘하추동>이라는 연속극이 잘 방송되고 있던 1969년 어느날, 김포공항이라며 불쑥 그 선배 연출가가 걸어온 전화를 받는다. “나 지금, 미국으로 이민 가네….” 뜻밖이었다. 부인의 강권에 못 이겨 급거 떠난다는 그 선배가 야속했다. 그의 이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이민 몇년 만에 부인의 ‘바람’을 감지했고, 멕시칸과 밀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카고공항 로비 한가운데서 팔짱 끼고 들어오는 부인을 향해 권총을 난사했다. 영화처럼 공항 로비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멕시칸은 즉사했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조사와 재판을 받아 구속되었다. 한인 동포들의 구명운동이 일고 있을 즈음, 부인은 절벽으로 차를 몰고 가다 추락사했다. 사고인지 자살인지 크게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 뒤 동포들의 끈질긴 구명 끝에 그는 7년을 복역하고 출감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재능을 아쉬워했다. 김기팔은 ‘그 선배의 부재’를 무척 아쉬워했다. 실감나지 않았다. 영웅 한명이 나라를 구한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막상 김기팔의 부재를 당면하면서 그 말이 실감났다. 그의 서거 이후 ‘판’ 자체가 바뀌고 있다. 창조와 진화의 구조 속에, 빅뱅의 ‘판구조론’처럼 중심이 기울며 한국의 방송이 끼우뚱거리고 있다.
1991년 1월 대하드라마 <땅>은 시작되었다. <제2공화국>의 인기를 뒤로하며 <땅>은 시작부터 위용을 떨쳤다. 첫 회부터, 무엇이 이유였건 청와대 비상대책회의가 열렸고, 엄혹한 감시 속에 이 땅의 아픈 역사가 그려졌다. ‘오늘의 땅’부터 시작하여 ‘통곡의 땅’ ‘분단된 땅’ ‘사랑과 미움의 땅’을 지나 ‘하나 되는 땅’에 이르기까지 지조있게 그려졌다. 돌연 중단당할 때까지 매회 큰 획을 그었다. 15회로 <땅>도 죽고 김기팔 작가도 죽었다. 그의 육필 원고에서 <땅>의 작품의도를 다시 들여다본다.
“땅은 생명의 원천이다. 인간은 땅 위에서 살며, 땅에서 나는 물과 곡식을 먹고 산다. 그래서 땅을 갖기 위한 경쟁을 치열하게 해왔다. 땅은 불이 날 염려도 없고 도둑맞을 염려도 없어 저마다 땅을 소유하려 했다. 그래서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는 사람과 만석꾼 지주의 빈부 격차가 있어왔다. 결국 땅의 소유 여부가 빈부 격차의 심화를 재촉해왔다. 이 드라마는 8·15 해방이라는 대격변기를 겪는 1945년부터 땅의 문제를 살펴볼 예정이다.” 간단하지만 명료하다. 이 명료한 주제를 풀지 못하고 작가는 죽었다.
1993년 12월 4일 김기팔 작가 2주기를 맞아 고인의 동창과 지인들이 뜻을 모아 경기도 파주 통일로변 장곡공원에 ‘통일염원 김기팔 방송비’를 세웠다. 문화방송 제공
이제 고인이 된 김기팔의 뜻을 되새기려, 그의 친구와 선후배들이 모여 비석을 세웠다. 돌에 김지하의 시를 담아 심정수가 조각했다.
‘밤새 뜬눈으로 지새다 신새벽에 돌아가셨다/ 밤새 사악한 무리를 질타하고 한 품은 이들을 달래시던 님은/ 민주와 통일의 먼동이 틀 무렵 기어이 돌아가셨다/ 그리시던 북녘 고향 저만큼 보이는 이곳에서 님이여/ 아직도 온전히 걷히지 않는 어둠을 지켜 끝내는 다가올/ 찬란한 대낮으로 증거하시라.’
1993년 건립된 ‘통일염원 김기팔 방송비’에는 서울대 문리대 시절부터 오랜 술친구였던 김지하 시인의 추모시를 심정수 조각가가 새겼다. 문화방송 제공
1993년 12월4일 김기팔 2주기를 맞아 통일로변 장곡공원 구석에서 ‘통일염원 방송비 제막식’이 열렸다. 안평선 피디가 중심이 되어, 김기팔의 젊은 날 꿈을 함께 키웠던 중앙고와 서울대 철학과 동창들, 그리고 그의 작품 활동 기간에 고락을 같이했던 방송인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고 그의 통일염원을 기리기 위해 뜻을 같이해 세운 것이다. 이 자리에는 최창봉(전 문화방송 사장), 노희엽(전 고려대 문과대학장), 임영웅(극단 산울림 대표·한국연극연출가협회 회장), 윤활식(전 <한겨레> 전무), 한운사(작가) 그리고 방송계 선후배들이 많이 모였다. 중앙고 동창인 건립추진위원장 김주용(현대전자 사장)의 인사말로 추모비 건립식은 시작되었다.
1991년 12월 끝내 눈감은 김기팔 작가
“한국 방송의 ‘거대 서사’도 끝났다”
93년 2주기 때 ‘통일염원 방송비’ 건립
친구 김지하 시 조각가 심정수 새겨
“그가 있었다면 방송 이렇게 되지는…”
2001년 김중배 문화방송 사장과 독대
“드라마 ‘땅’ 50부 다시 만들자” 제안
새 작가 찾아 후반부 내용 구상 ‘몰입’
한달쯤 뒤 드라마국장 전화 ‘중단 통보’
“원작료 협의가 해결되지 않아서…”
1993년 12월4일 경기도 파주 장곡공원에 열린 ‘통일염원 김기팔 방송비’ 제막식에서 고석만(위) 연출과 김지하(아래) 시인이 잔을 올리고 있다. 문화방송 제공
이날 행사의 프로그램에 들어 있는 정규웅(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추모글을 옮긴다.
“그는 좀처럼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작가였다. 타협할 줄 모르는 작가였다. 그래서 그가 필봉을 휘두르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민나도로보데스.’ 그가 집필한 티브이 드라마 <거부실록>에서 이 말이 전파를 탔을 때 사람들은 곧장 이 말을 유행시켰다. 1980년대 초라는 당시의 혼란한 세태를 가장 적절하게 풍자한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중략) 6·25 때 고향인 평양을 버리고 남으로 내려온 그는 어렸을 적부터 소설가가 되기를 꿈꿨다. 대학에서의 전공을 택한 것도 꿈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영근 것은 소설이 아니라 드라마며 희곡이었다. 대중과의 영합이 인기작가의 첩경이었으나 그것을 철저하게 거부하면서도 그는 곧장 인기작가로 발돋움했다. 그의 독특한 현실관, 인생관, 세계관이 사람들의 아픈 곳, 가려운 곳을 감싸주고 긁어주는 데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세계가 그렇듯 그의 생활신조도 힘센 쪽, 가진 쪽, 옳지 못한 쪽을 철저히 배격하고 약한 쪽, 가난한 쪽, 옳은 쪽을 옹호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방송국 쪽에서 소외받고 있었던 많은 연기자들이 그의 강력한 입김으로 유명 연기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그의 생활신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그는 지난 4월에 역시 방송 중단된 마지막 티브이 드라마 <땅>의 소설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소설가가 되고자 했던 어린 시절의 꿈을 실현시키고 드라마로 채 보여주지 못했던 현실적인 여러 가지 문제들을 소설 형식으로나마 재현시키려는 이중의 목적이었다. 그 작업의 완결을 눈앞에 두고 그는 숨을 거뒀다. 데뷔 무렵, “칠전팔기(七顚八起)한다”는 의미로 이름까지 김용남에서 ‘김기팔’(金起八)로 바꿨던 그는 이 시대의 아픔을 누구보다 처절하게 겪었던 작가였다.”
1993년 김기팔 방송비 제막식에는 고인의 친구이자 91년 <땅>을 중단 시켰던 최창봉 전 문화방송 사장(왼쪽)은 물론 원로작가 한운사(오른쪽) 등 방송계 지인들이 두루 참석했다. 문화방송 제공
제막식 프로그램에 실린 김기팔 작가의 글 3편 가운데 하나를 다시 읽는다.
“요새는 거의 잊고 있는 이름이지만 어쩌다 ‘동아방송’ 소리를 듣게 되면 나도 모르게 가슴부터 저려온다. 동아방송(DBS) 개국 초 20대 중반의 ‘청년작가’로 제작에 참여해서 수많은 작품을 썼다. 1980년 40대 초반의 중년기에 통폐합이란 이름으로 동아방송이 한국방송(KBS)으로 넘어가면서 나와 ‘동아’와의 인연이 끊기게 된다. 그 18년이란 세월이 한 인생에게는 꽤 긴 세월이었기 때문인가. 나는 동아방송을 생각할 때마다 마치 첫사랑의 연인을 떠올리는 듯한 아련한 추억 속에 잠기게 된다. 동아방송은 상업방송이면서도 다른 민간방송들과 달랐다. 요사이는 공영방송 체제라면서도 방송국 간 시청취율 경쟁이 지나쳐 뜻있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미 10년 전에 문을 닫은 동아방송은 예외였다. 동아방송에서 거의 전속작가처럼 활약하던 그 시절에도 방송작가로서 나는 한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상업성=시청률=저속함’의 등식이 동아방송에서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정계야화>만 해도 동아방송은 청취율을 고려해서 재미있게 써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나도 저속한 이야기 중심으로 각본을 써 청취자와 야합할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당시 동아방송은 언론의 바른 길을 걷겠다는 신념이 충만해 있었고, 어떠한 권력과 부당한 압력에도 굽히지 않으려는 정신도 투철했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동아방송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런 만큼 10년 전 그 살벌했던 가을의 통폐합 사태를 나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80년 4월 나는 5년 동안 절필하고 있다가 <정계야화> 부활과 함께 다시 집필 활동을 시작했는데 불과 7개월 만에 그 사태를 만났던 것이다. 동아방송이 문을 닫던 날 나는 ‘도대체 정권이 뭔데 민중의 소리, 민족의 방송을 말살해도 되는 건지’ ‘인간 세상에는 엄연한 순리라는 것이 있고 역사의 심판이란 것도 있는데 저 무지막지한 정치군인들이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짓을 저지르는지’ 통탄하면서 밤새워 술을 퍼마셨던 것이다.”(<동아일보> 1990년 11월30일치)
김기팔 작가는 작고 1년 전인 1990년 11월30일 언론통폐합 1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도대체 정권이 뭔데 민중의 소리, 민족의 방송을 말살해도 되는 건지”라며 정권의 외압을 규탄했다.
1991년 한국프로듀서연합회에서는 <방송시대> 창간호에 ‘프로그램 집중분석’ 섹션을 만들어, 대하드라마 <땅>에 대한 전문가집단 논평을 실었다.
◇ 전재수(방송평론가) “(전략) 브레히트의 연극은 대개가 서사적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심오하고 열정적인 참여 극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로, 그에게 연극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라는 목표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섣불리 자신의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관객에게 주입하려 들지 않았다. 관객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드라마 <땅>은 어떤가. 드라마는 땅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는 갖가지 모순과 비리를 들추어내 사회변화 효과를 기대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후략)”
◇ 이진수(도시빈민연구소 연구원) “(전략) 설사 <땅>이 종영된다 해도 그만이다. 그걸 ‘정치 드라마’라고 보는 자들이 있는 한, 이데올로기에 절고 절어 만사가 불온해 보이는 그들이 설쳐대는 한 <땅>의 문제는 절대로 안 풀린다. 90년대의 사회운동은 절대 ‘장건식’ 식으로 전개되지 않을 것이다. 그 자리에 불패의 대중운동이 한발 한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 김광식(정치학·한신대 강사) “땅은 생명의 원천이며 만인의 삶의 터전이다.”(중략)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땅은 생산의 원천이 아닌 투기의 대상이며, 만인의 삶의 터전이 아니라 영주의 장원이어야만 하는가? 땅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누가 땅을 뒤흔들고 있는가. 우리는 ‘땅’ 이야기를 좀 더 자주 하여 땅에 관한 상식을 회복하여야 한다.”
1993년 ‘통일염원 김기팔 방송비’ 제막식에서 나란히 선 연출 고석만(오른쪽)과 후배 김승수(왼쪽). 김 피디는 2001년 <땅>의 재제작 추진 때 드라마국장으로 ‘중단’을 통보했다. 문화방송 제공
김중배 선생이 문화방송 사장으로 부임한 2001년, 어느날 점심 초대를 받았다. 단둘이 만났다. 뜻밖에 <땅>의 부활을 제안해왔다. 김 사장은 <땅> 도중하차 뒤 언노련이 준 ‘민주언론상’을 공동수상하여 <땅>과는 또 다른 인연이 있잖은가. 김중배 사장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 50회를 모두 하자”고 했다. 당시 나는 국립영상간행물제작소 소장과 한국정책방송(KTV) 대표를 겸임하고 있을 때였다. “모든 직을 다 내놓고 <땅>의 부활 연출을 기꺼이 하겠다.”
얼마 뒤 문화방송 내부 숙의에 들어갔다고 전해 들었다. 김승수 드라마국장이 원작과 관련하여 김기팔 작가의 셋째 딸(김말희)과 협의를 하였고, 상호 원작료를 제시하였다고 한다. 부활을 준비하는 우리는 새로운 극작가를 모색하고, 후반부의 구상에 몰입하였다. <땅>의 부활은 꿈만 같았다. 그렇게 한달 이상을 몰입하고 있던 어느날 아침, 드라마국장이 전화를 했다. “선배님, 오래간만입니다. 지금 출근길입니다. 자하문 고개를 넘어가는데, 저기 청와대가 안개에 덮여 있습니다…허허…원작료 협의가 해결되지 않아서…허허…내부 논의 끝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과하게 친근감을 표한 뒤,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전화 설명만으로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뒤에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날 서울의 아침은 안개가 자욱했었다. ‘땅의 부활’은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땅, 그리고 김기팔’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해는 꼭 다시 뜬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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