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선임된 보도국 기자 출신 후배 최문순 사장의 ‘삼고초려’에 고석만은 제작본부장을 맡아 10년 만에 엠비시에 복귀했다. 그해 4월 고석만(가운데) 제작본부장이 부임 이전 기획된 다큐드라마 <제5공화국> 제작발표회를 주재하고 있다. 엠비시 제공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2005년 3월 10년만에 서울 여의도 엠비시 사옥으로 ‘두번째 첫 출근’을 한 고석만은 ‘콘텐츠 제작사가 아닌 발주사’로 변한 방송사의 현실을 실감했다. 엠비시 제공
엠비시(MBC)로의 10년 만의 귀향이다. 2005년 3월, 정문에 들어서자 현관 쪽에서 쏟아져 나오는 쿠데타 병사들이 보인다. 그들은 ‘혁명군’ 완장을 차고 카빈총을 들고 있다. 20여명 우르르 나와 뒤쪽으로 내달리더니 다시 10명은 현관 옆 마당에 있는 탱크에 오른다. 지휘관은 절도있게 분산배치시킨다. 또 30여명이 나오더니 버스 쪽으로 내달린다. 출근길 사원들은 놀란 표정이다. ‘또 쿠데타가 일어났는가?’ 이내 드라마 촬영 출동 중임을 안다. <제2공화국> ‘5·16 쿠데타’ 촬영 때가 떠올랐다. <제3공화국> ‘10·26’ 때도, <제1공화국> 김구 장례식 때도, <억새풀>의 해방 때도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사원들은 놀랐지만 출연자들은 신나 했었다. 우리는 사실주의에 입각한 현장 촬영을 기본으로 지켰다. 중앙청도 빌려서 찍고 시청 앞도 명동도 막고 찍었다. 10년 전만 해도 리얼리즘이 가치 서열의 맨 앞이었으니까.
시(C)스튜디오에 들어서니 낯선 사람들이 원 카메라로 드라마 촬영 중이다. 외주에 맡긴 것이다. 여유있어 보인다. 엠비시의 드라마 녹화 속도를 쫓아올 방송사는 없었다. 3분의 1 규모의 스튜디오 악조건을 극복하는 방법은 집중력뿐이었다. 거의 생방송 수준으로 해냈었다. 그때의 연기는 생명력이 있고 리듬감이 있었다. ‘만나면 좋은 친구!’ 10년 사이 변했다. 자사 출신 사장이 정착되며 자율성을 획득했지만, ‘노조 방송’ 비난의 소리도 높다. 겉늙어 백악기 공룡을 보는 듯하다. 지진의 전조, 예진 같기도 하다.
사옥의 많은 부분을 세트가 차지하고 있다. 좁은 미술세트 창고는 뚫고 뚫고 올라가 그사이 5층 높이까지 밀고 갔다. 경영 차원에서는 불합리해 보였으리라. 방송사가 이제, 제작사가 아니라 발주사로 바뀌고 있다. 직원들이 퇴직 이후까지 보장받고 싶어한다. 진정한 제작은 밖에서 다 해서 오고, ‘갑질 체질’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미술부의 세트 파트는 사흘에 한번씩 날밤을 새우는 극한직업이다. 내 작품의 세트가 세워지는 새벽에 막걸리라도 서너병 사 들고 가면 감동받곤 했다. 세트의 ‘리쥬’(무대 깔판)라도 같이 들어주면 그들은 울고 말았다. 작품 속에 전우애가 싹텄었다.
32년 전, 엠비시 출근 첫날이 떠오른다. 연수를 마치고 제작부에 배속되어 부장에게 신고할 때 음악반장의 첫마디가 다시 들리는 듯하다. “야, 인마, 넥타이 풀어!” 제작부 특히 드라마 파트의 호칭은 “형” 아니면 “야”. 처음엔 어색하더니 지날수록 참 편했다. 이런 동지애가 프로그램을 빛나게 했다고 확신한다.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혈육 같은 결속감이 있었다. 엠비시만의 독특한 끈적거림이 있었다. 파업과도 무관했던 드라마 만드는 사람들, <수사반장> 최중락 자문역을 보도국 시경 출입기자가 무례하게 대했다고 6층과 3층을 오르내리며 보도국 기자들과 패싸움하던 일, 싸움 끝에 원수 같던 타임체크기를 때려 부수던 일, 자율출근제를 쟁취했을 땐 “형! 이겼다!” 소리쳤다. 그런데 지금 “형!” 하고 부를 사람이 없다.
전체 사원 중에 3분의 1은 반갑게 악수하고, 3분의 1은 눈인사 정도, 또 3분의 1은 생면부지인 듯했다. 탤런트실 로비도 낯선 연예인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그들 뒤에는 기획사의 매니저들뿐이다. 싸구려 돈가방을 휘두르고 다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득실거린다. 조폭 사무실 분위기 같다. 10년 사이 지각변동이 일어난 모양이다. 이동 인파의 급물살에 난파선처럼 현관으로 밀려 나왔다.
때마침 동문 앞 작은 광장에서 김기팔 선생의 노제가 초라하게 열리고 있다. 50여명의 피디와 간부가 헌화하고 있다. 5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나며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의 죽음은 이 땅에서 거대한 서사극의 종말을 예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땅>의 부활을 위해, 4명의 사장에게 직간접으로 타진했으나 아무도 복귀를 허락하지 않았다. 왜 이뤄지지 않았던 걸까. 허망한 마음은 또 있다. <야망의 25시> 도중하차의 공소시효를 눈앞에 두고 범인의 그림자를 밟았지만 그들은 꼼짝 않는다. 최초 명령자는 누구이고 부역자는 누구인가. 문득 10층 옥상이 보인다. 그때 저 옥상에서 뛰어내려 이 사회에 경종을 울리려 하지 않았던가. 매천 황현의 말이 떠올랐다. “죽을 의무는 없으나 자결하는 선비 하나쯤은 있어야.” 그는 국치 직후 죽음을 택했다. 지금 김기팔 선생의 노제엔 슬픈 음악만 흐를 뿐이다. 14년이 지났다. “살아서, 절대 살아서, 한을 풀어야 한다.”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종속적인 관계를 끊어버리는, 능동적으로 자신을 해방시키는 행위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면 나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지배당하며 그의 통제를 받게 된다. 그 용서는 피보다 진했다. 지옥은 그 인간이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엠비시 복귀 첫날이 혼란스럽다. 이비에스(EBS) 사장의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엠비시로 돌아온 것은 일생일대 패착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비에스 취임 첫날부터 모든 지혜를 쏟아냈다. 짧지만 한없이 쏟아냈다. 폭포처럼 쏟아냈다. 낙차 폭만큼 엠비시를 비롯한 주변은 유혹을 했고, 그만큼 나 자신은 흔들렸다. 그들은 물론 ‘사탄’이 아니다. 고향 회귀본능을 자극했다. 이비에스 후배들에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엠비시 복귀 과정을 털어놓지 않을 수가 없다.
2005년 2월25일 서울 여의도 엠비시 스튜디오에서 열린 사장 이취임식에서 신임 최문순(왼쪽) 사장이 특유의 겸손한 자세로 임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엡비시 제공
‘학은 날갯죽지가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소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는다.’ 2005년 2월, 방송문화진흥회 이상희 이사장에게 이비에스 교육자금 지원 요청, 엠비시와 이비에스의 합병설 파문, 방문진 이사 김형태 변호사의 ‘엠비시 사장 출마’ 제의, 주변 우호세력의 전화 쇄도, ‘사장 공모’ 응모 결심, 엄기영 이사에게 최문순 불출마 의사 타진, 이수호 이사와 뜻을 같이하는 방문진 이사 5명과 비밀회동, 이비에스노조의 반발과 ‘내일 아침부터 출근저지 투쟁’ 선언! 그때 만약 나를 내몰지 말고 손잡아 막았었다면…. 방송위원회 노성대 위원장에게 전화로 ‘이비에스 사장’ 사의 표명, 최문순 출마설 회자, 청와대 ‘이비에스 사의’ 철회 촉구, 언노련 신학림 전화로 사의 확인, 노성대 위원장 ‘사의 반려’ 종용, 김형태 변호사 ‘최문순의 장기 계획’ 포착, 집으로 찾온 이비에스 후배들의 ‘사의 반려’ 설득, 다음날 방문진 정례회의, 방문진 복도에서 엠비시노조 피켓 시위, ‘청와대 근무한 고석만 사장 반대’, 방문진 1차 회의에서 ‘컷오프’, 끝났다.
2005년 2월 고석만 피디는 엠비시(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몇몇 이사의 출마 제안을 받고 ‘첫 사장 공모’에 응모했으나 1차에서 탈락했다. 엠비시노동조합의 반대가 주요인이었다. 그해 2월25일 취임식 날 최문순(맨 오른쪽) 사장이 엠비시노조 사무실을 방문한 사진과 함께 <오마이뉴스>는 노조의 지지가 최 사장 선임의 큰 변수였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바로 다음날 짐을 꾸리고 미국행 항공권을 샀다. 샌프란시스코의 막내딸 신혼집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때 최문순 일행이 집으로 찾아왔다. 공항까지 배웅해주려는 친구들이 집에 먼저 와 있었다. 최문순 일행을 집 근처 갤러리아백화점 커피숍에서 만났다. 이쪽저쪽 다른 테이블에서 참모들이 지켜보고 있다. 최문순은 특유의 겸손함과 웃음으로 인사하며 “부사장을 맡아주십시오”, 한마디로 거절하자 “회장을 해주십시오”, 또 거절했다. 다음엔 “엔에이치케이(NHK) 모델의 경영위원회를 만들겠습니다. 위원장으로서 독립적으로 운영을 맡아주십시오”, 끝내 정중하게 거절하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최문순 주변의 인사들이 끊임없이 샌프란시스코까지 국제전화를 했다. 시차 탓에 밤을 꼬박 새웠다. 아침이 되어 나 자신을 돌아보니, 전화기를 끄지 못하는 ‘못난 미련’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때야 휴대전화의 파워를 꺼버렸다. 이것은 여행도, 도피도 아니다. 그길로 다시 서울행 항공권을 예약했다. 공항까지 배웅 나온 막내딸이 손에 조그마한 봉투를 쥐여주고 돌아갔다. 비행기에 탑승한 뒤 아내와 함께 봉투를 열어보니 ‘사랑한다’는 말이 적힌 종이와 꼬깃꼬깃 접힌 500달러가 들어 있다. 아내는 참았던 괴로움을 터뜨렸다. 소리 내어 울었다. 시집간 딸에게 받는 최초의 선물이다. 서울까지 오는 긴 시간 가슴이 먹먹했다.
2005년 초 방문진 이사 ‘사장 출마 제의’
우호세력 전화 쇄도에 유혹 ‘응모’ 결심
‘최문순 불출마’ 타진…이비에스 ‘사표’
‘최문순 출마설’ 이어 ‘장기 계획’ 포착
엠비시노조 ‘청와대 근무 고석만 반대’
방문진 정례회의 ‘1차 사장 후보’ 탈락
곧바로 미국행 채비…최문순 사장 ‘독대’
“부사장…회장…독립 경영위원장” 거절
‘최 일행들’ 국제전화에 휴대폰 ‘오프’
인천공항 내리니 ‘최문순과 일행’ 도열
‘제작본부장’ 제안에 즉석에서 ‘승낙’
2005년 3월 엠비시 ‘두번째 첫 출근’
방북 ‘광개토대왕’ 등 남북합작 합의
인천공항에 도착한 저녁 8시께, 비행기에서 내리며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켜니 문자메시지가 수십개 쌓여 있다. 최문순 주변 인사들의 ‘회유성 메시지’다. 어떤 사람은 20통 가까이 보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문을 나서자 최문순을 비롯한 7~8명이 영접 라인에 도열해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전화기가 끊기자 항공사마다 직접 전화해 탑승 여부를 확인했단다. 이 정도 용의주도하면 무슨 일인들 못하랴 싶었다. 최문순은 다시 한번 간곡하게 동참을 호소했다. 제작본부장을 제안했고 그 자리에서 받아들였다. 2005년 3월1일이다.
어쩌면 그때 암세포가 침투했던 것일까. 아내가 폐암 진단을 받았다. 이사할 때마다 짐스러웠던 먼지 덩어리 대본 1800권을 모두 없애버렸다. 가볍게 나를 버리기로 했다. 이제 나 자신을 찾는 길로 나아가기로 했다.
지나간 10년을 돌아보며 새로운 10년을 그려나가야 했다. 그 핵심으로 ‘68혁명 정신’이 떠올랐다. 그로부터 40년 단절된 한국을 일깨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68혁명’은 1968년 5월 파리에서 발화되어 베를린과 로마로 번졌고, ‘철의 장막’을 넘어 ‘프라하의 봄’을 점화하고, 도버해협을 건너 런던에서 타오른 뒤, 그 불길이 대서양을 넘어 뉴욕, 북미 대륙을 횡단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닿았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 도쿄까지 덮쳤다. 그러나 이 거대한 세계혁명의 불길은 한반도 군사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와 베트남에 보낸 32만 전투병이 막아서고 있었다. 지금, 40년 지각한 68혁명의 정신을 목도하고 있다.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시대정신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밝혀야 한다. 페미니즘과 여성인권, 백인 선망과 유색 차별, 장애인·동성애자·난민·소수자에 대한 인권의식 부족, 성해방 의식과 정치적 상상력 빈곤, 사회적 정의에 대한 감수성 확립과 반권위주의의 교육 부재, 입신양명 척결 등 미래를 위한 정신을 담고 있다. 이 혁명 과제를 ‘엠비시 어젠다’로 삼아 이 시대를 선도하자. 앞서가자.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간부도 피디도 노조도 설득했다.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꼼짝 않는다.
드라마는 호흡이 길다. 2년 앞을 기획해야 한다. 우선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원작료 3억원에 샀다. 최문순 사장은 드라마화를 크게 기대하고 있다. 곧바로 제작에 착수하자 했다. ‘1년 기획, 1년 촬영’, 다음 대통령 선거 1년 전에 방송을 시작하자고 큰 그림으로 설득했다. 그런 한편 통일신라 중심의 ‘삼한지’를 준비하고 있던 최완규·정형수 작가를 설득해 우리의 장구한 고대사를 그리자며 <주몽>을 출범시켰다. 예능에서 <무한도전>이 시작되었다. <피디수첩>의 한학수 피디가 찾아와 장기 출장을 상신하며 ‘황우석 사건의 진실’을 토로했다. 제작본부장 직권으로 미국 6개월 출장을 결재했다. 황우석 사건은 우리 사회 초미의 관심사였다. 엠비시는 소리쳤고, 사장은 외풍에 시달렸지만 잘 버텼다. 이때쯤 보수는 엠비시를 ‘급진세력’으로 낙인찍었고 질기게 사냥감이 되었다.
2005년 8월 고석만 제작본부장은 최문순 사장, 손정도 목사의 후손 이학유 영화감독 일행과 북한을 방문해 남북합작 영화 <광개토대왕>과 다큐멘터리 <손정도 목사> 제작 추진을 합의했다. 그때 평양에서 최문순(왼쪽) 사장 일행이 김영남(오른쪽)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면담하고 돌아왔다고 엠비시 <뉴스데스크>가 보도한 화면이다.
최문순 사장, 그의 지인인 이덕유와 셋이 방북 일정을 잡았다. 드라마 <광개토대왕>의 시놉시스를 완성하고 ‘손정도 목사’ 다큐와 함께 남북합작의 청사진을 그렸다. 방북은 전격적으로 이뤄졌고, 북한 역사학회의 주선으로 김영남, 김기남 등을 만났다. ‘아리랑’ 공연도 특별관람했다. 최문순 사장은 경평축구를 끈질기게 요구하며 평양에 엠비시 지사 설립을 제안했다. 시대를 앞질러 갔다. 언젠가 꼭 이루어진다 확신했다.
‘상주 압사 사건’이 터졌다. 엠비시의 공개 방송을 보러 왔던 시민 11명이 공연장 앞 운동장 입구에서 인파에 밀려 사망한 것이다. 포장마차 상인들과 상주시장의 유착이 ‘입구 병목 사태’의 원인으로 파악됐다. 가까스로 사태 수습을 하고 귀경하자마자 허리병으로 입원했다. 병문안을 온 최문순 사장은 부사장 자리를 제안했다. 그런데 보름 뒤 퇴원하니 특임이사로 발령이 나 있다. 영문을 모르겠다. 특임이사는 손발이 끊긴 식물이사와 다름없다. 무슨 배경인지 묻지 않았다.
2005년 10월 엠비시는 조정래 작가와 <태백산맥> 드라마 판권 계약을 맺고, 전남 보성 등에 촬영 세트 건립까지 추진했으나 ‘석연찮은 이유’로 5년 시한이 지나도록 드라마는 제작되지 않았다. 지난해 엠비시 프로그램에 출연한 조 작가는 ‘무산 이유를 모른다’고 공개했다. 엠비시 화면 갈무리
<태백산맥>을 드라마로 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최문순 사장은 이제 미동도 않는다. 5년 계약에서 3년째였다. 준비부터 방송까지 최소 2년은 걸린다. 5년이 지나면 계약은 백지가 된다. <태백산맥> 작품의 주제와 방송 의미는 지금이 적기다. 보혁 대결 구도의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잖나. 지금 착수해도 바쁘다. 발빠르게 직접 연출하는 방안도 강구해보았다. 조정래 작가를 두세차례 만나 사장을 설득해주기를 요청했다. 대강의 시간표에 합의하고 조 작가가 사장실로 들어갔다. 아래층 방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었다. 그 뒤에도 소식이 없더니 끝내 5년 계약이 지났다. <태백산맥>을 방송하지 못하는 엠비시의 미래가 보였다.
‘2007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두고 있다. 엠비시 상암동 새 사옥 부지 허가를 놓고 이명박 서울시장은 출마 직전까지 결정을 미루며 담금질을 하고 있다. 이 시장의 정치적 꼼수는 어떤 것이고, 끌려다니던 엠비시의 정치적 함수는 무엇인가. 부지는 확보했지만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지금, 상암에 있는 엠비시 사옥의 위용을 올려다보곤 한다.
2005년 10월 뜻밖의 ‘특임이사’ 발령으로 제작 일선에 물러난 고석만은 2007년 10월 한국콘텐츠진흥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콘텐츠진흥원장 시절 대표적인 ‘케이팝 한류스타’인 걸그룹 소녀시대 멤버들과 함께한 모습이다. 고석만 피디 제공
가장 급진적인 혁명가일수록 가장 보수적으로 돌변한다고 했던가. 이 시대의 폴리페서, 폴리널리스트, 그들의 권력과 진실은 무엇인가. 대선 회오리가 거세게 불고 있던 2007년 10월, 임기를 4개월 남기고 ‘헤드헌터’에게 즐겁게 포획되었다. 까다로운 심사를 마치고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집필 고석만,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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