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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김기팔이 발굴한 ‘제이슨 리’ 영화로 할리우드 꿈꿨으나…”

등록 2018-10-06 16:28수정 2018-12-28 15:15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38회)
‘제이슨 리’ 영화 진출
‘1930년대 미국 시카고의 마피아 조직에서 알 카포네의 부하로 활약했다는 전설적인 한국인 풍운아 제이슨 리(사진)의 삶’과 제이슨 리와 연관된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족사는 70년대 초반 김기팔에 의해 가장 먼저 알려졌다. 도산은 1902년 이래 세차례 18년간 미국에 머물며 3남2녀를 낳았다.
‘1930년대 미국 시카고의 마피아 조직에서 알 카포네의 부하로 활약했다는 전설적인 한국인 풍운아 제이슨 리(사진)의 삶’과 제이슨 리와 연관된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족사는 70년대 초반 김기팔에 의해 가장 먼저 알려졌다. 도산은 1902년 이래 세차례 18년간 미국에 머물며 3남2녀를 낳았다.

1930년대 미국 시카고 암흑가를 주름잡은 최대 마피아 조직의 우두머리 ‘알 카포네’의 심복이었던 전설적인 인물 ‘제이슨 리’. 한국 이름 이장손. 알 카포네의 신망으로 시카고를 장악하고 할리우드까지 세력을 넓혔던 제이슨 리가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에 진출했다가 사고를 치고 도주 행로 끝에 모나코의 도박장에서 검거된다. 이때 그를 구해준 이는 할리우드의 명배우 ‘그레이스 켈리’, 바로 모나코의 왕비다. 이 사건이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그의 명성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제이슨 리>의 일대기가 김기팔 작가에 의해 극화되었다.

‘이장손은 강원도 양구에 살다가 9살 때 부모를 따라 하와이 이민선을 탄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다 19살 되던 해 샌프란시스코로 밀항, 부두 노역부터 시작해 최하층 잡역을 거치던 시기, 차이나타운의 자웅을 겨누는 마피아와 삼합회의 대결 때 부둣가 폭력조직에 가담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마피아의 일원이 되며, 알 카포네의 본령인 시카고로 진입한다. 그때부터 제이슨 리가 된 이장손은 특유의 대담성과 빠른 손으로 알 카포네의 눈에 띄고, 거침없이 수직상승한다.

알 카포네 지도집단 18위 시절 내부 폭동이 일어나고 이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알 카포네의 신임을 얻은 제이슨 리는 시카고 주류 유통을 맡게 된다. 이어서 나이트클럽의 경영책임자가 되고 시카고의 밤의 황제에 등극한다. 이때 안창호의 둘째 딸을 돌봐주는 인연도 생긴다. 이어 할리우드로 영역을 확장하며 세력을 번창시킨다. 존 포드 감독 등과 친교를 맺고, 신인배우 그레이스 켈리를 주인공으로 발탁한 것도 제이슨 리의 힘이다. 제이슨 리가 일본 요코하마에 거대한 나이트클럽을 개장할 때 오픈파티에 전설적인 여배우 에이바 가드너가 축하인사를 온 것은 일본은 물론 미국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일본 야쿠자로부터 견제를 받게 되자 제이슨 리는 희대의 사건을 벌인다. 그는 야쿠자 집단의 나이트클럽에 트럭을 몰고 실내까지 폭탄처럼 진입하여 기관총을 난사, 야쿠자 일당을 일거에 제압하고 만다. 그 뒤 한국으로 도피해 아무도 없는 고향 양구를 찾는다. 양구를 안내한 반도호텔의 음악 디스크자키와 순수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 뒤 한국에서는 제이슨 리의 비자가 금지된다. 사랑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럽 등지를 방랑하던 제이슨 리가 머문 모나코. 카지노에서 불법도박으로 체포되고 지명수배자로 밝혀져 구속된다. 이때 모나코의 왕비 그레이스 켈리가 나타난다. 자유로운 몸으로 한국의 사랑을 찾아 귀국을 시도하나, 이승만 정부는 안창호와의 인연을 시비 걸었다.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필리핀 낯선 섬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유복자인 막내아들 필영(랠프·체육교사), 맏아들 필립(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유일한 한국인 배우), 둘째아들 필선(엔지니어), 맏딸 수산(미 해군 대위), 부인 이혜련, 둘째딸 수라(외식 사업)의 해방 전후 모습.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유복자인 막내아들 필영(랠프·체육교사), 맏아들 필립(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유일한 한국인 배우), 둘째아들 필선(엔지니어), 맏딸 수산(미 해군 대위), 부인 이혜련, 둘째딸 수라(외식 사업)의 해방 전후 모습.

<제이슨 리>의 이야기는 작곡가 길옥윤의 구술에 의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길옥윤은 일본의 나이트클럽에서 색소폰 연주자로 일할 때 제이슨 리를 만난다. 그를 통해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듣고 김기팔에게 구술한 것이다. 후속 취재에 나선 김기팔은 제이슨 리의 통쾌함과 민족적 기개에 힘이 났다고 술회했다. <제이슨 리>는 73년 <동아방송>에서 라디오 연속극으로 처음 세상에 드러났다. 주상현 성우의 독특한 해설로 시작하는 라디오 드라마는 최고의 청취율을 올렸다. 김기팔은 그때 이야기를 할 때면 어린아이처럼 들뜨곤 했다. 출중한 대중적 소재임엔 분명하지만 단순 갱스터가 아니고 우리의 현대사와 민족감정이 뒤엉켜 새록새록 새로웠고, 끝내 정치적 함의가 드러나며 작품의 품격이 달라 보였다. 초반은 ‘뿌리’, 중반은 ‘대부’, 후반은 ‘007’. 전체적인 구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제이슨 리는 영화제작사의 대주주로, (1953)의 주인공 에이바 가드너, 그레이스 켈리 등 스타 배우들과 교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50년대 일본에서 색소폰 주자로 활동한 길옥윤은 훗날 김기팔에게 제이슨 리의 이야기를 전했다.(오른쪽 사진)
제이슨 리는 영화제작사의 대주주로, (1953)의 주인공 에이바 가드너, 그레이스 켈리 등 스타 배우들과 교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50년대 일본에서 색소폰 주자로 활동한 길옥윤은 훗날 김기팔에게 제이슨 리의 이야기를 전했다.(오른쪽 사진)

김기팔은 라디오 방영 직후 소설 <제이슨 리>도 펴냈고, 그의 사후 1993년에도 같은 제목으로 재출간(폴리미디어)됐다. 영화로 제작하겠다는 사람이 한두명 나타났지만, 이러저러한 조건이 맞지 않아 실행되지 못했다. 아무나 손댈 수 없는 대작이다. 96년, 해적판 <제이슨 리>(김수로·2부작)가 등장했다. 소송에 이르렀다. 그때 한겨레신문사의 전무 윤활식이 흔쾌하게 도와주었다. 동아방송에서의 제작 경위와 창작 과정을 소상하게 증언하자 재판은 단 한번으로 ‘김기팔 완승’을 손들어 주었다. 해적판은 전량 자진회수하는 조건으로 소액의 벌금형이 부과되며 정리되었다.

김기팔 극본 <제이슨 리>는 1973년 동아방송 라디오에서 일일 연속극으로 방송돼 큰 인기를 모았다.
김기팔 극본 <제이슨 리>는 1973년 동아방송 라디오에서 일일 연속극으로 방송돼 큰 인기를 모았다.

1991년 <땅> 중도 하차 이후 절치부심했던 우리에게 <제이슨 리>는 희망의 시그널이었다. 93년 엠비시(MBC)프로덕션에 <제이슨 리>의 영화화를 제안했다. 파격이었다. 자회사가 발빠르게 번져 나갔고, 방송사도 자본의 흐름에 눈떴다. 콘텐츠는 원소스 개발에 이은 융합의 파도를 타고 있다. 나아가 문화방송 본사에 정식으로 ‘영화산업 진출’을 제안했다. 단순 돈벌기가 아닌 ‘문화산업의 선진화’를 혁신안으로 주장했다. 프랑스의 ‘영화와 방송’을 눈여겨보자며 설득했다. 프랑스는 1985년에 이미 ‘의무할당제’가 도입되었다. 지상파 매출액의 5%, 케이블은 매출액의 9~12%를 프랑스 국내 영화와 유럽 영화에 지원·투자를 의무화한 제도다. 우리 방송에는 예고편이다. 93년부터는 비디오, 디브이디(DVD), 브이오디(VOD) 소비자가격의 2%의 기금을 부과하고 있으며, 인터넷도 논의중이었다. 지원체계가 구체화되고 있다. 우리 문화계에도 닥쳐올 일이다. 극장 객석에 뱀을 내던지는 수준의 ‘스크린쿼터제’에만 의존할 것인가. ‘우보천리’. 누적적으로 바꿔, 결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적인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1930년대 알 카포네의 심복 제이슨 리’
양구 출신 하와이 이민 한국인 이장손
시카고 밤의 황제로 안창호 가족 후원

일본 활동 때 인연 맺은 길옥윤 ‘제보’
73년 김기팔 라디오 연속극으로 ‘인기’

93년 김기팔 원작 소설로 영화화 ‘제안’
MBC프로덕션 ‘영화 진출’ 특별기획팀
‘제3세대 프로듀서’ 이춘연 대표 영입
‘한·미·일 합작’ 황금구도 착착 진행

최창봉 사장 ‘원소스멀티유스’ 대환영
“영화파트 이관” 편성쪽 반발로 ‘무산’

제이슨 리(오른쪽 셋째)와 안창호 가족이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으로, 고석만 연출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제이슨 리(오른쪽 셋째)와 안창호 가족이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으로, 고석만 연출에 의해 처음 공개됐다.

한국 영화는 제3세대 프로듀서 시스템으로 변모하고 있다. 40대 초반의 기획자들이 모여 새로운 영화 제작 시스템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도제식을 차고 나왔다. 대학에서 인문학 혹은 경영을 공부했거나, 해외에서 영화의 기능과 기술을 정식으로 배워 온 ‘해외파’가 새로운 영화 문화를 구축하고 있었다. 제3세대는 시스템을 갖추고 제작에 돌입했다. <결혼 이야기>(신씨네·1992년)가 모델로 시도해본 작품이다. 성공했다. 신철, 오정완, 이춘연, 유인택, 안동규, 김우석, 심재명, 이은 등이 모여 새로운 아카데미를 형성하고 있었다. 뜻이 있는 배우, 스태프들이 호응하고 나섰다.

엠비시프로덕션은 특별기획팀을 설립하고, 논의와 연구 끝에 제3세대의 좌장 격인 이춘연을 스카웃했다. 그는 현대극장에서 기획자로 크게 활동을 하다가 ‘황기성사단’으로 자리를 옮겨 <여고괴담> 등을 기획해 한국 영화의 누벨바그를 주창하고 있었다. 이춘연의 스카웃은 영화계의 작은 파문이었다. 문화방송의 ‘영화 진출’을 간접 선언한 것이다. 콘텐츠는 물론이고 고갈된 영화 투자 시장에 방송 자본의 유입은 가뭄 끝에 단비 같았다. 투자 시장이 흔들렸다.

이제 엠비시 특별기획팀은 가장 모범적으로 해외구조를 만들어 가야 했다. 첫 카드에 <제이슨 리>를 내밀었다. 한국은 콘텐츠를 기반으로 제작에 나서고, 일본은 자본 투자를, 미국은 세계 유통을 담당하는 황금구도였다. 미국과 일본 모두 <제이슨 리>를 선호했다.

이제 욕망과 정면으로 맞서지 말고 냉각시키어 물길을 잡아줘야 한다. 첫 작업으로 미국 ‘윌리엄모리스엔터’와 유통 관련 접촉을 하고, 일본 ‘도에이영화사’와의 교류도 잘 이루어졌다. 곧 사장과의 협상 자리가 도쿄에서 성사되었다. 관록과 연륜의 사장은 서둘지 않았다. 지상파의 방송 진출을 눈여겨보았고, 그것도 문화방송의 공신력은 협상의 첫 단추였다. 첫 미팅을 마치고 도쿄 신바시 호텔의 식당을 나설 때, 신씨네의 오정완 사장을 만났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고 놀라웠다. 조금 전의 투자담당 사장을 만나려 수십번 접촉했단다. 단번에 만나주는 우리를 부러워했다. 그날 우리팀은 영화 시사회 계획이 잡혀 있었다. 밖으로 나서자 비가 뿌렸다. 오 사장은 우산을 받쳐 들고 우리를 시사회장까지 안내하며 상황 파악에 적극적이었다. 일본이 중국과 합작한 영화 <미완의 대국>. 시사회는 2시간쯤 걸렸다. 그런데 시사회를 끝내고 주변 사람들과 왁자지껄 환담을 나누고 나오는 문 앞에 오 사장이 우산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때의 오 사장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이것이 자본의 힘이구나. 그날 도쿄의 빗속에서부터 서울에서의 몇차례 미팅, 오 사장과 긴밀한 얘기를 나누었다. 투자의 상황에 따라 “신씨네 기치를 내리고 합류할 수 있다”, 그 진지함과 당돌함에 감동받았다.

한·미·일 황금구도를 차근차근 구축하는 한편 <제이슨 리>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에 들어갔다. 우선 ‘갱스터’ 세계를 파고들었다. 한국의 조폭 세계부터, 일본의 야쿠자, 중국의 삼합회, 미국의 마피아의 역사부터 훑어나갔다. 당시 검찰청의 폭력 담당 박영수 부장검사로부터 자료를 지원을 받았다. 시카고의 마피아 흔적을 뒤지고 다녔고, 제이슨 리의 개인적인 연고를 찾아 나섰다. 이때 만난 안창호의 둘째 딸 안수라와의 접촉은 충격이었고 신선했다. 1940년대 시카고의 제이슨 리 영업장에서 카운터를 봤다는 안수라는 젊은 시절을 아름답게 회고했다. 미루어 짐작건대, 제이슨 리는 도산 안창호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큰아들 안필립의 할리우드 배우 활동을 후원했고, 그를 통해 안수라를 알아 도와준 것으로 보인다. 제이슨 리의 민족정신을 얘기하는 대목이었다. 안수라는 언니 안수산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었다. 안수산은 미국 최초의 여성 해군장교로서 2차대전에 참전하였다. 훗날 2016년 100살 때 그가 별세하자 <타임>은 ‘무명의 여성영웅’으로 뽑았고, 뉴욕시에서는 ‘3월의 역사적 여성’으로 뽑기도 했다. 안수라가 들려준 ‘안창호의 3남2녀 이야기’. 그 걸쭉한 이야기들은 한편의 영화 같았다. 시나리오 구성 단계에 활용할 ‘이승만과 안창호’의 정치역정과 갈등관계도 촘촘히 들여다보았다. <제이슨 리>의 심장 같은 이야기다. 다큐멘터리는 그 자체로서 독립적 가치가 있지만, 원소스 멀티유스(OSMU)의 ‘원소스’ 구실을 훌륭히 하고 있었다.

엠비시프로덕션과 합작이 무산된 뒤 고석만(오른쪽)은 독립프로덕션 드림써치 공동대표로  프로젝트를 재추진했으나 또다시 무산됐다. 1996년 김상열(왼쪽) 작가와 시카고 등지를 방문해 제이슨 리 자료를 직접 취재하기도 했다.
엠비시프로덕션과 합작이 무산된 뒤 고석만(오른쪽)은 독립프로덕션 드림써치 공동대표로 프로젝트를 재추진했으나 또다시 무산됐다. 1996년 김상열(왼쪽) 작가와 시카고 등지를 방문해 제이슨 리 자료를 직접 취재하기도 했다.

최창봉 사장은 철저하게 원소스 멀티유스의 찬성론자였다. 그래서 프로듀서 개인의 멀티플레이어 정신과 기능을 높이 평가했다. 몇 개의 자회사가 설립되고, 프로덕션은 편일평 초대 사장을 중심으로 사옥 맨바닥에 텐트를 치고 설립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 사장은 나를 따로 불러 선봉에 서 주길 바랐다. 프로덕션의 영화 진출에 대하여도 적극 찬동하고 있었다. 90년대 초엔 생소한 접근 방식이었다. ‘예술과 과학의 만남은 새로운 혁신으로 안내한다.’ 미국 패러마운트영화사의 부사장 ‘지니 한’은 “돈을 벌려면 무조건 원소스 멀티유스를 하라”고 했다. 그의 지론은 이렇다. “미국의 블록버스터 영화는, 미국 시장에서는 제작비의 기본을 뽑고 해외 시장에서 버는 돈은 전량 홍보비에 쓴다. 영화 만들어서 돈을 버는 길은 이 방법밖에 없다.”

한국의 지상파 방송사는 할리우드 영화 시장에서 작지만 바이어다. 방송사 영화부 프로듀서가 영화를 사러 할리우드에 뜨면 아침 뷔페 식탁 주변이 붐볐다. 우리가 영화 시장에 들어설 때 ‘주고받는’ 이 구조를 십분 활용해야 한다.

프로덕션의 ‘영화기획안’은 잘 준비되고 있었다. 이사회 하루 전 최 사장 앞에서 리허설까지 했다. 그 자리에서 프로덕션의 힘있는 유통을 위해 영화부의 구조적 지원을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그때 최 사장은 신명나게 “편성에 있는 영화파트를 프로덕션에서 가져가라”. 횡재라 생각했다. 제안서와 브리핑 차트를 수정했다.

그리고 다음날 이사회가 엄숙하게 열렸다. 여러 사안 중 ‘영화기획안’은 획기적이었다. 그런데 사장 보고 도중 편성이사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갔다. 나는 편일평 엠비시프로덕션 사장에게 말했다. “사표 쓰겠습니다. 제 사표 위에 사장님의 사표를 얹으십시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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