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9월 고석만 연출은 한국 방송으로는 처음 연길시 연변예술극장에서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설립 39돌 교포 위문 공연’을 맡아 한-중 수교 1년 앞서 ‘문화 첨병’ 구실을 했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동포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공연이 성황을 이뤄 연변 청소년회관 건립 기금 10만달러를 기증했다. 그때 국내 최정상 가수 이선희는 ‘링거 수액’을 맞으며 ‘열창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 고석만-첨병 (39회) ‘연변에 꽃을 심다’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91년 연변 대공연 때 가수·무용단·합창단·악단 등 32명의 한국 공연단은 연변가무단과 함께 2시간동안 합동공연을 펼쳤다. 공연 실황은 ‘녹화테이프 극비 운송 작전’으로 중국 공안의 감시를 뚫고그해 9월 23일 <문화방송>에서 무사히 방송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8년 올봄 평양 공연 ‘봄이 온다’를 보며 감회가 남달랐다.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공연이었다. 평화의 기대감까지 더하여 가슴 떨렸다. 1991년 9월, 지금으로부터 27년 전, ‘연변 대공연’을 했다. 주현미, 태진아, 최진희, 이선희, 김지애, 이상은… 이덕화 등등. 초호화 연예인 진영과 함께했지만, ‘밀행’이었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다 문화방송(MBC)으로 온 감사부의 마동익 위원이 여러 경로를 통해 얘기가 오갔다며, 연변 공연을 기획하자고 제안했다. 한-중 수교 1년 전, 중국 개방을 앞두고 한류 전초기지 구축이 큰 목적이지만, 대외적인 명분은 연변에 건립중인 ‘청소년회관’의 기금 조성으로 10만달러를 기증하는 것이다. 연변대극장에서 하는 첫 한국 공연이다. 긴 고민 끝에 가장 중요한 부분, 전체 코디네이터가 누구인지 물어봤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인물이 등장했다. 이·규·성.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마 위원은 ‘자신이 보장한다’며 나섰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은 ‘문화 첨병’ 구실이다.
‘꽃 구근을 한가마 가득 얻었다. 실한 덩어리다. 동해안과 울릉도에서 태어난 우리의 토종 ‘참나리’의 알뿌리. 양지바른 화단을 돋웠다. 구근을 주먹에 쥐고 손목까지 푹 빠지게 담아 심었다. 15㎝, 흠뻑 물을 주었다.’
1991년 연변 대공연 때 이덕화가 엠시를 맡아 쇼를 진행하고 있다. 연변쪽 주최자들과 프로그램을 두고 논쟁이 벌어져 공연은 무려 10시간 늦은 밤 12시에 시작할 수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조직을 꾸리기 시작했다. 쇼 관련해 연출 신승호와 가수·무용·합창·악단 등 32명, 기술 관련으로 중계차 기술감독 한백수와 엔지니어 12명, 제작 관련 카메라 김명균·김영철, 프로듀서 고석만·최창욱, 안전장치로 본사 관리이사, 프로덕션 사장, 감사실 요원, 안기부 요원 그리고 코디네이터 이규성. 총 53명에 대한 출입국 관련 수속이 진행되었고, 중계차의 분해작업이 진행됐다. 중계차 한 대를 분해하니 컨테이너 하나 가득이었다. 조심스럽게 김포공항 하역장으로 옮겼다. 코디네이터 이규성은 미리 중국으로 날아갔다.
가수 쪽에서는 주현미가 중국계란 점이 큰 호감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주현미에게 문제가 생겼다. 첫아이를 출산한 지 3개월이 채 안 된 때라 못 가겠다는 거다. 설득했다. 아이를 대동하기로 하니, 남편의 동반도 요구했다. 흔쾌히 합류시켰다. 특이한 사례다. 그런데 주현미는 단 한번의 단체 질서를 어긴 적도 없고, 아기도 있는 듯 없는 듯 보챈 적이 없었다. 그보다 걱정은 이선희의 건강 상태였으나 의욕은 넘쳤다.
1991년 연변 공연 때 ‘화교 가수’ 주현미(오른쪽)는 3개월된 첫 아들과 남편(임동신·왼쪽)까지 동행해야 했다. 동포들이 그의 트로트를 따라 부르자 현지 공무원들이 제지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2년 한-중 수교 1년 앞서 ‘기획’
연변 청소년회관 건립기금 ‘명분’
태진아 최진희 이선희 이상은 등등
‘화교’ 주현미 출산 직후 가족동반
출연·제작진 총 53명 대규모 ‘장관’
서울 중계차 ‘베이징공항 통과’ 불가
현지 단체 스튜디오 해체해 연변으로
중량초과 ‘176개 트렁크’ 군용기로
전날 밤샘 조선족 동포들 ‘만원사례’
‘성금 비공개’ 주최쪽과 육박전 방불
자정 넘어서야 이덕화 사회로 시작
관객들 따라 부르자 요원들 가로막아
‘만능해결사 이규성’ 알고보니 무기상
‘쇼는 즐거운 인생이다. 보름 전에 심은 구근에서 싹이 나왔다. 대여섯 군데에서 경쟁하듯 흙을 뚫고 나온 떡잎, 그 생명력이 신기하다.’
선발대 4명이 먼저 나섰다. 선발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중계용 기자재를 무난히 베이징공항을 거쳐 연변까지 옮기는 일이다. 이규성은 조치가 끝났다고 했지만 전자기재의 반입·반출은 어느 공항이건 규제가 까다롭다. 베이징공항이 가까워지자 궁리를 해냈다. ‘선발대가 들고 가는 이엔지(ENG) 카메라를 공공연하게 노출시키자.’
베이징공항 입국심사를 마치고 첫 검색대는 무사통과. 이에 자신감이 생긴 김영철 카메라맨은 워킹벨트를 걸어오며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멨다. 언뜻 보기에 촬영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최종 검색대 앞에서 걸렸다. 뺏겼다. 일행은 일단 입국문을 통과해 공항 로비로 나왔다. 밖에서는 이규성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우리는 심히 불쾌감을 토로했다. 이규성은 당황했다. 일단 우리를 안심시키며 검색대 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당연히 제지당했다. 그때 이규성은 윗옷 조그만 주머니에서 무슨 신분증을 꺼내 관리에게 숨기듯 보여주었다. 그 공항 관리는 가볍게 위아래로 훑어본 뒤 통과시켰다. 웬 신분증 하나에 무사통과? 우리는 이규성의 정체에 대해 갖가지 추측을 하며 30분쯤 기다렸다. 이규성은 다시 나왔다. 빈손이다.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오늘 중으로 카메라를 빼낼 테니, 일단 호텔에서 쉬라고 했다. 호텔에서 체크인을 한 뒤 진지한 숙의에 들어갔다. 우리로선 대안이 없다. 저녁 무렵 이규성이 돌아왔다. “중국의 조직은 특이하다. 다섯 군데가 동시에 동의해야 해결이 된다. 우리 정부 구조로 치면, 집권당·경찰·안기부·국회 그리고 세관이란다. 그런데 어느 한 군데가 조율이 되지 않았다. 세관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내일 오전엔 해결된다.” 일단 서울에 연락해 일정을 중지시켰다. 특히 김포 컨테이너박스의 중계차를 철수시켜야 한다. 휴대용 카메라 한 대조차 영치되는 마당에 중계차급의 장비 도입은 어림없다. 깊은 고민에 빠졌다.
‘쇼는 즐거운 인생인가? 비가 많이 왔다. 떡잎이 네 개씩 붙어버렸다.’
이튿날 오전 내내 초조하게 기다렸다. 정오 무렵 이규성은 영치됐던 카메라를 들고 호텔에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궤도 수정’을 통보했다. 이규성의 표정은 무너졌다. 본대의 출발은 5일 남았다.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중계차를 대여하는 것, 수준은 떨어지지만 <연변방송>의 중계차를 대여하는 것, 아니면 휴대용 카메라 6대 이상을 카메라맨·녹화기·음향장비까지 포함해 대여하는 것, 셋 중 어느 것도 시간상으로 불가능한 발상이다. 이규성에게 우리가 준비한 큐시트를 보여주었다. 120분짜리 프로그램의 정교한 중계용 큐시트다. 중계차만이 녹화 가능한 큐시트다. 이규성은 크게 놀라는 듯했다. 뒷날 얘기하길 “초 단위의 큐시트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이렇게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을 줄 몰랐다”고 했다. 그날 밤 이규성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호텔 로비에서 이규성을 찾았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첫 발의부터 오늘까지 반추해보았다.
‘구근식물은 까다로워 썩기 쉽다.’
그 순간 호텔문을 밀고 들어서는 이규성을 보자, 오히려 반가웠다. 그는 우리를 미니버스에 태우고 어디론가 달렸다. 한적한 교외로 빠졌다. 모두 침묵이다. 도착한 곳은 2층의 예쁜 신식 양옥. 들어서는 현관에 한자와 일어로 ‘중·일문화교류중심’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우리는 안쪽 복도 끝으로 안내되었다. 문을 열자 좌담용 스튜디오가 단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규성은 ‘이 스튜디오를 분해하면 녹화가 가능한가요?’라고 물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제대로 된 스튜디오용 카메라가 4대, 완전한 콘솔과 스위처 박스까지 잘 갖춰진 스튜디오다. “이 스튜디오를 완전하게 분해해 3일 안에 연변에 도착시키겠다.” 이규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쇼는 즐거운 인생이다. 참나리 언덕에 차광막을 쳤다. 검정 비닐의 푸대자루형 차광막은 햇볕과 바람을 인위적으로 차단, 땅의 온도를 낮춰 개화 시기를 조절하는 것이다. 통풍되는 비닐하우스다. 인큐베이터 같다.’
서울 본사로 연락했다. “예정대로 본대가 출발해도 된다.” 기술감독 한백수와는 수시로 전화를 주고받았다. 기자재 박스 하나하나가 체크되며, 분해 이동되었다. 우리 기자재와의 호환성을 다양하게 체크했다.
‘차광막 속은 내부순환이 일어나 웃자라는 녀석을 막아주고, 바람과 대화하도록 감싸 안아준다. 참나리는 짙은 노란색으로 삐져나오더니 군락을 이루며 초록의 언덕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1991년 연변 대공연 때 김완선은 현란한 춤으로 조선족 젊은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드디어 본대가 베이징공항에 도착했다. 가수를 앞세운 50명. 장관이었다. 무사히 공항을 통과한 뒤 국내선으로 옮겨 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우리 일행만으로 정원을 꽉 채운 연길행 소형비행기가 뜨지를 못하고 있다. 이유인즉, 화물 중량 초과다. 가수들의 행장과 녹화기 등 기자재가 엄청나게 무거운 것이다. 기자재를 뺀 트렁크를 모두 내렸다. 탑승한 일행들에겐 도착해서 알리도록 하고 서둘러 비행기를 이륙시켰다. 이규성은 또 바빠졌다.
두 시간쯤 뒤, 저녁 식사도 잊은 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일행은 이웃 공항으로 안내되었다. 군사공항이다. 국내선에서 트럭으로 옮겨온 트렁크 숫자가 무려 176개. 커다란 수송기의 뒤꽁무니 문이 열리고 트렁크를 실어 올리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조명도 없는 깜깜한 밤에 군인들에 의해 옮겨지는 트렁크 176개. 평생 잊히지 않는 숫자다. 그리고 이 밤에 수송기는 떴다.
‘쇼는 즐거운 인생이다. 차광막 밑을 보았다. 참나리꽃들이 예쁘게 봉오리가 맺혔다. 참나리는 역시 봉오리다.’
1988년 강변가요제 대상의 ‘대학생 스타’ 이상은은 91년 연변 공연 때 자전거로 연길 거리를 돌며 연변 풍속도를 그리는 뮤직비디오 <담다디>를 찍기도 했다.
연변 공연 이틀 전이다. 본대는 즐겁게 백두산을 관광하고, 선발대는 가수 이상은을 설득해 뮤직비디오 촬영에 들어갔다. 이상은이 연변 일대를 자전거로 돌며 연변 풍속도를 그리자는 뮤직비디오 ‘담다디’. 연변에 3년 전 처음 왔을 땐 가라오케가 한 군데밖에 없었다. 그때 회사에 공식 예산을 청구해 가요테이프 2000개를 이민 트렁크에 담아 와 명함처럼 돌리고 다녔다. 3년이 지난 오늘, 노래방이 66개로 늘었다 한다. 한국가요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 꽃씨처럼 날아와 퍼졌다. 특히 연변 조선족의 특징 중 하나는 가정용 녹화기가 멀티플레이어로, 어떤 소재를 구해도 편히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민족 그들의 삶의 방편이다. 이상은과 함께 연변의 구석구석을 찍고 다니다 트럭 한 대를 보게 되었다. 트럭엔 죄수복을 입은 8~10명, 그들은 ‘살인’ ‘강도’ ‘강간’ 등의 팻말이 적힌 조끼를 걸치고 있다. 시내를 몇바퀴 돌리며 경각심을 부추긴 뒤, 그들은 이 길로 끌려가 공개처형된다고 한다. 엠아르(MR: 믹스트 리얼리티)를 기본으로 음향을 정리했다. 이틀 동안 맹렬하게 준비했다.
1991년 한국 연예인의 첫 대규모 공연 때 연변예술극장은 1500석 규모였으나 전날 밤샘까지 한 동포 관객들 수만명이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연길감옥이 있던 자리로 알려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공연날 아침, 극장 주변에 사람들이 에워쌌다고 한다. 밤을 새운 사람도 100명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오늘 공연은 저녁 7시다. 현장을 확인하고 극장의 ‘하우스 오픈’을 5시간 앞당겨 2시에 열어주었다. 문을 열자 1500석 좌석이 눈 깜짝할 사이 만원사례다. 외사과에서 반발했다. 문제는 ‘공연 큐시트’를 나눠주자 초청한 청년회관 관계자가 들고일어났다. 성금 기증 장면의 삭제 요청이다. 비공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쌍방의 관계자가 모두 나서 논쟁을 벌였다. 무대 뒤는 30여명이 얽혀 육박전 직전까지 갔다. 공연 예정 시간을 훌쩍 넘기며 논쟁의 연속이다. 예정된 큐시트대로 하기로 결정된 것은 밤 10시를 넘긴 뒤였다. 관객들은 8시간째 웅크리고 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다. 태진아 노래 중 ‘미안 미안해’를 삭제하란다. 가사가 퇴폐적이고 안무가 선정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논쟁했지만 이번엔 한국 쪽에서 양보했다. 이제, 밤 12시 이덕화의 사회로 쇼는 시작되었다.
‘쇼는 즐거운 인생인가? 차광막을 열어젖혔다. 참나리의 개화가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참나리가 화사하게 피어났다. 향기가 퍼져나갔다.’
1991년 9월 연변 대공연 때 마지막 무대는 이선희의 히트곡 ‘아름다운 강산’을 출연 가수들의 모두 함께 나와 부르는 것이었다.(위) 왼쪽부터 이상은, 이선희, 김완선.(아래 사진)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에 이어 ‘비 내리는 영동교’가 터지자 관객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 어딘가에 있던 외사과 직원들이 객석 전면에 선다. 따라 부르는 사람이 이제는 없다. 이선희는 저녁 무렵에 의사가 와서 수액을 맞고 있다. 태진아, 이상은이 박수를 많이 받고, 예의 바른 최진희의 인기는 절정이다. ‘아름다운 강산’을 부르는 이선희는 혼신을 다 바쳐 열창했다. 끝이 났다. 새벽 2시다. 끝이 나자마자 외사과 직원이 무대 옆 기계실로 들어와 녹화테이프를 수거해 갔다. 우리는 대비를 해뒀다. 연변 조선족 방송사의 동시녹화 테이프를 복사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거기다 한백수 기술감독은 아무도 모르게 라인을 빼돌려 옆 창고 구석에서 1부를 동시녹화 해뒀다. 모두 3벌을 녹화한 것이다.
귀국은 역순으로 이뤄졌다. 공연 다음날 베이징공항에서 연변 방송의 녹화테이프는 압수당했다. 이제 남은 베타테이프는 하나. 후발대로 남은 우리는 크기와 비슷한 데 착안해 청심환 박스로 테이프를 정교하게 감쌌다. 호텔방에 앉아서 그러고 있는 꼴이 가관이었다. 이튿날 무사히 귀국했다.
초고속으로 편집해 방송이 나갔다. 이 방송으로 연변 청소년회관 관계자 한명은 인사조치 되었다고 들었다. 이규성의 신원이 궁금했다. 서울에서 다시 만난 이규성은 ‘무기거래상’이라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나와 초등학교(전주) 동기동창이란다.
‘우리가 연변에 심고 온 참나리꽃은 내년에도 후년에도 피어날 것이다. 쇼는 즐거운 인생이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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