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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냉소의 시대, ‘찐 행세’ 하려는 리얼 예능

등록 2020-12-11 19:38수정 2020-12-12 02:32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자극성 짙어지는 리얼리티 예능

TV조선 프로 ‘우리 이혼했어요’
이혼 연예인 부부 재회 관찰 예능
심한 사적·자극적 내용에 몰입↑
진정성 포장 ‘날것’이 인기 비결

냉소주의가 ‘진짜’에 대한 열망으로
‘속을 수밖에 없지만 쉽게 안 속는다’
그럴수록 날것 추구 자극적 내용
‘속이는 능력’에 환호하는 시청자
윤리적 비평이 훈장 달아주는 역설
선우은숙과 이영하가 출연한 <우리 이혼했어요> 방송 장면. 방송 화면 갈무리
선우은숙과 이영하가 출연한 <우리 이혼했어요> 방송 장면. 방송 화면 갈무리

“내가 남 이혼한 속사정까지 알아야 해?” 티브이조선 〈우리 이혼했어요〉(이하 〈우이해〉)를 모니터링하던 동료가 볼멘소리를 꺼냈다. 이혼을 경험한 연예인 부부를 섭외해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하면서 두 사람 사이의 진심을 들여다본다는 이 기괴한 관찰 예능은 방영 2회 만에 최고시청률 9.28%(11월27일 닐슨코리아, 종합편성 기준)를 기록하며 금요일 밤의 강자가 됐다. 이혼한 연예인 부부가 출연해 해묵은 감정을 끄집어내어 다투는 걸 ‘리얼’로 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동료가 간과한 게 하나 있었으니, 그걸 보고 싶지 않은 사람보다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우이해〉를 기획한 티브이조선 서혜진 제작본부장은 〈티브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기획 의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사회는 아직 이혼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정상과 비정상으로 이분화하는 원시적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 질문을 던지는 의미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만들어갔다.” 이혼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고정관념이 강하다는 진단은 같은데, 아무래도 해법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는 목표가 아무리 좋아도, 그걸 어떤 방식으로 구현하느냐는 다른 문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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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공간’ 깊이 빨려들어가는 시청자

리얼리티 관찰 예능 특유의 포맷은 여전히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두 사람 사이의 공간에 불필요할 만큼 깊이 침투하고, 시청자들은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지극히 사적이고 자극적인 내용들 안으로 빨려들어간다. 〈우이해〉가 방영되는 날이면 온라인을 뒤덮는 기사들이 온통 이혼 사유가 누구에게 있었고 과거 어떤 잘못이 있었는가 하는 내밀한 속사정이나, “두 사람이 스킨십에 성공할까” 같은 지극히 사적인 가십성 기사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우이해〉를 즐겨 보는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은 유명인의 이혼이라는 자극적인 가십을 보다 ‘날것’으로 관람하는 것이다. 제작진이 이야기하는 성공 비결인 ‘진짜 이야기와 진정성’은 결국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고상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lt;이상한 나라의 며느리&gt; 방송 장면. 문화방송 제공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방송 장면. 문화방송 제공

돌이켜보면 수신지 작가의 만화 〈며느라기〉(2017)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문화방송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2018~2019, 이하 〈이나리〉)가 주춤했던 것 또한 ‘지옥 같은 시댁과 며느리’라는 소재의 자극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나리〉를 가장 열심히 봤던 사람들은 그 자극성을 알면서도 봤던 사람들이니까. 프로그램을 둘러싼 열풍이 꺾이기 시작한 것은, 코미디언 김재욱과 박세미 부부가 제작진이 남편과 시댁을 더 나쁜 집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악마의 편집’을 일삼았다고 항의하며 하차를 선언한 순간부터였다. ‘나는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자극을 보고 있다’는 믿음이 깨지는 순간,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나 충성도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진짜’에 대한 열망은 뒤집어 말하면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가짜라는 극단적인 냉소주의의 한 표현이다. 정치평론가 김민하는 그의 저서 〈냉소사회〉(2016, 현암사)에서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냉소주의’라고 말한 바 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해지고 그를 해결해야 하는 정치적 해법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될수록 사람들은 열등감을 극복하고 생존을 도모하는 방어기제로서 ‘냉소주의’를 채택한다는 것이다. 김민하는 무명의 참가자들이 성공을 거두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성공을 분석하는 챕터에서 그 기저에 깔린 심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은 체제가 부당하게 자신을 올바로 평가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체제가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체제에 속지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태도가 바로 냉소주의다. 이것을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입해보면 재미있는 결론이 나온다. 즉, 사람들의 관념 속에서 기성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그 상품성을 정당하게 평가받은 대가로 수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음악성 외의 다른 수단을 활용해 부당하게 수익을 창출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경우 소비자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속는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바로 이 속고 속이는 체제를 전제하면서도 자신들은 그 체제의 외부에서 이 부조리를 극복하고 있는 양 스스로를 드러낸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존재 자체가 대중의 냉소가 전제하는 체제를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140~141쪽)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열풍 뒤에도 이와 같은 냉소주의, 즉 ‘속지 않겠다’는 무의식의 결의가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면, 〈우이해〉와 〈이나리〉 사이를 둘러싼 대중의 반응 차이가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사람들도 ‘리얼리티 관찰 예능’에도 일정 부분 연출이 들어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연예인들이 출연해 고부간의 갈등이나 이혼한 부부 사이의 해묵은 감정 다툼처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을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속지 않겠다’는 경계심을 잠시 유보한다. 연예인들이 구태여 자신의 이미지에 득이 될 일이 없는 부분까지 ‘조작’해서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 그 환상이 깨지지 않은 〈우이해〉에는 사람들이 열광하지만, 한 차례 그 환상이 깨진 〈이나리〉에는 더 이상 열광하길 거부한 셈이다.

만약 〈이나리〉가 김재욱·박세미 부부의 하차 이후 ‘조작 방송’이라는 의혹 앞에서 몸을 사리며 교양 프로그램이라는 본연의 정체성에 맞춰 프로그램을 둥글게 깎아내는 대신, 오히려 더 지옥 같은 시댁의 모습만을 전진 배치해 보여주는 방향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앞서 인용한 김민하의 〈냉소사회〉에 따르면, 사람들의 ‘속지 않겠다’는 마음은 보다 복잡하게 작동한다. ‘속지 않겠다’고 결의한 사람 옆에는 ‘속을 수밖에 없지만 쉽게 속지는 않겠다’는 마음을 지닌 이들, 즉 자신을 속이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환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속는 것을 즐기지 못하는 팬,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애초에 속임수이고 또 속임수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적대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우월감을 느낀다. 또 ‘나’는 언제나 속아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만, 동시에 ‘나’는 쉽게 속아 넘어가는 열등한 사람이 아니므로, 오로지 능력 있는 사람만이 ‘나’를 속일 수 있다.”(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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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진짜’에 도달할 수는 없다

2010년대 온라인 콘텐츠들이 흥하면서 이 방향성은 더욱더 복잡하게 흘러갔다. 온라인상에서 간장을 마시고 머리를 삭발하고 부도덕한 멘트를 던지는 인터넷 방송인들이 부와 명예를 얻은 현상을 살펴보자. 인터넷 방송 시청자 또한 인터넷 방송인들이 실생활에서는 나름대로 멀쩡한 사람이며, 방송에서 보여주는 기행은 관심을 받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라면 꾸며내서라도 얼마든지 자기 존엄을 버리고 인성의 바닥을 보여주는 시늉까지 하는 인터넷 방송인들을 보며, 사람들은 그걸 ‘나를 속이기 위해 진정성을 발휘하는 사람’, 요즘 말로 ‘찐’이라고 열광하는 것이다. 앞서 “〈이나리〉가 더 자극적인 방향으로 갔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건 그 때문이다. 물론 수많은 비판을 받았겠지만, 어쩌면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주작’일지언정 ‘찐’이란 평가를 받았을 테니까.

그러니 이제 리얼리티 예능이나 인터넷 방송을 두고 그것의 자극성을 지적하는 것은 윤리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옳은 지적일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 유효한 타격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연출’이란 요소를 불신하는 이들의 냉소를 허물려면 더 ‘날것’이란 이미지를 줘야 하며, 그것조차 불신하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비평이 오히려 콘텐츠의 ‘찐’ 됨을 증명하는 훈장이 되는 시대인 것이다. 어쩌면 리얼리티 예능을 둘러싼 윤리적인 문제에 효과적으로 답하는 길은, 차라리 리얼리티의 추구라는 방향이 예능에서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무리 ‘찐’과 ‘날것’을 추구한다 한들 사람들이 욕망하는 ‘진짜’에 도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설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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