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달이 뜨는 강>에 출연하다 최근 하차한 지수. 한국방송 제공
방송가와 그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여러모로 눈앞이 아찔한 3월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연예계 학원 폭력 의혹 때문에 엎어지고 취소되는 작품들이 줄을 잇는 탓이다. 최근 학원 폭력 혐의를 인정한 지수가 온달 역할로 출연하던 <한국방송>(KBS) 사극 <달이 뜨는 강>은 나인우로 캐스팅을 교체한 뒤 상당 분량을 재촬영했고, 같은 한국방송에서 방영될 예정이던 박혜수 주연의 드라마 <디어엠> 또한 일단 편성이 취소된 상태다. 여전히 진위 여부를 두고 공방을 지속하고 있는 사안이 많아서 쉽게 단언할 수는 없지만, 방송사부터 제작사, 연예기획사, 방송 관련 글을 쓰는 나 같은 연관 업계 사람들 모두가 시름이 깊다. 누가 언제 어떤 일을 했을지 일일이 확인하고 검증하는 작업이 갈수록 어려워지니 말이다.
어쩌면,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오랫동안 지탱해왔던 스타 시스템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재고찰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스타 시스템은 당대 대중이 욕망하는 가치를 표상하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인물을 향한 대중의 환호를 돈으로 환산해 산업을 굴리는 방식으로 지탱되어왔다. 노래나 연기, 재담 등 콘텐츠 자체를 빼어나게 구현해내는 재능으로 스타가 되는 이들도 존재하지만, 스타 시스템은 언제나 재능보다 개인의 매력에 더 의존하는 방식으로 지탱되어왔다. 메시지를 내러티브에 담아 길게 풀어 설명하는 서사 예술, 감상을 위해서는 장르 양식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공연 예술을 감상하고 그 완성도를 찬탄하는 일보다는, 보는 순간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로 일순에 이미지를 전달하는 스타에게 열광하는 게 훨씬 더 직관적이고 쉽기 때문이다. 물론 콘텐츠 자체의 내실을 다져서 지나친 스타 시스템을 경계하자는 이야기는 심심찮게 나오는 이야기였지만, 당위만 가지고 욕망을 통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중의 환호는 스타의 매력에 쏠렸고, 자본 또한 그리로 몰렸다.
21세기 들어 극도로 고도화된 스타 시스템은, 이제 ‘스타가 보여주는 콘텐츠’를 파는 게 아니라 ‘스타라는 콘텐츠’를 파는 수준으로 올라왔다. 사람들은 연예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볼 수 있는 관찰 예능과 리얼리티 티브이에 열광하고, 그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사진과 영상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즐긴다. 일찌감치 앞으로의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가 콘텐츠 비즈니스가 아니라, 스타 개인의 캐릭터성을 살린 캐릭터 아이피(IP·지식재산권) 비즈니스로 성장할 것이라 전망한 바 있는 거대 기획사들은, 이제 월정액을 지불하면 스타와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선보인 상황이다. 이처럼 스타의 재능이 아니라 스타 자체가 콘텐츠가 되자, 스타들은 관찰 예능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하는 일상까지도 고도로 연출하게 되었다. 관찰 예능과 소셜미디어는 ‘스타 이미지가 자연스레 이어지는 그럴싸하고 근사한 일상’을 전시하는 쇼케이스가 되었고, 자연스레 간접광고와 같은 자본의 개입이 시작됐다.
문제는 지금처럼 스타가 과거에 부당한 폭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될 경우, 스타 개인을 믿고 몰린 그 모든 지지와 자본이 고스란히 리스크가 되어 돌아온다는 점이다. 항간에는 애초에 계약하는 과정에서 과거 행적을 더 철저하게 검증하는 시스템을 갖추자는 주장도 있고, 과거의 비행 사실로 인해 작품에 손해를 끼칠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하도록 하는 조항을 추가해 개개인이 알아서 행실을 바로 갖추고 살 것을 유도하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개개인이 살아온 모든 순간을 검증하고 소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며, 지금의 학원 폭력 논란처럼 진위 여부가 다 가려지기 전에 일단 손해가 먼저 발생할 경우 그 책임을 묻는 일이 지극히 모호해질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지수의 사례처럼 당사자가 혐의를 인정한 경우라면 모를까, 대다수의 연예인들처럼 진실 공방이 계속해서 이어질 경우 그 책임을 어떻게, 어느 시점에 물을 것인가? 결국 스타 개인에게 집중된 자원과 기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방식의 비즈니스 모델에서 탈피해 보다 균형 잡힌 콘텐츠를 만드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작품 전체가 취소되거나 엎어지는 리스크는 언제라도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울러 스타가 대중의 지지를 받는 방식, 다시 말해 ‘주류 대중이 욕망하는 가치를 잘 체현해내기’ 자체가 위계와 폭력에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 또한 생각해 볼 지점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보여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연출된 이미지들은, 대체로 당대 대중이 욕망하는 외모의 기준이나 물질적 성취와 같은 가치들을 증폭시킨 결과물이다. 그리고 주류 대중이 욕망하는 바를 더욱 충실하게 맞추면 맞출수록 자연스레 주류에서 벗어난 이들의 욕망이나 현실은 감춰지게 된다. 중산층 이상의 욕망과 관점을 중점적으로 반영하고 이주자, 장애인, 성소수자 등의 마이너리티들을 감추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 산업의 최첨단에, 주류 대중의 욕망을 충실하게 반영한 이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몰아줘 스타로 육성하는 스타 시스템이 있다. 학생 사회에서 주류 집단에 군림하며 비주류 학생들을 괴롭혔다는 의혹을 받는 이들이 연예계에 유독 몰려 있는 것은, 스타 시스템 자체가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을 갖춘 이들에게 더 기회를 준다는 특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수년 전 성폭력 피해자들이 고발에 앞장섰던 미투(#Metoo) 운동 당시, 일각에서는 “가해자 발생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남자들을 기용했다가 리스크를 지지 말고, 여자들을 더 중점적으로 기용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남자들의 비행에 필요 이상으로 관대했던 엔터테인먼트 산업 현장에서 젠더 위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변화를 주자는 유의미한 지적이었다. 물론 지금 여기의 젠더 폭력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벌어진 학원 폭력에 대응하는 건 셈법이 다소 다를 수 있다. 학원 폭력의 피해자는 다양한 이유로 먹잇감이 되니까.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외모가 수려하지 않아서, 장애가 있어서,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이 소수자라서, 혼혈인이어서…. 학원 폭력은 계급 혐오, 외모주의, 장애 혐오, 성소수자 혐오, 인종 혐오 등의 다양한 혐오가 중첩되어 있는 범죄이고, 누가 과거에 무슨 혐오를 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단순히 누구를 덜 기용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을 갖춘 이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스포트라이트를 보다 넓게 펼쳐서, 더 다양한 가치를 표방하는 이들을 고르게 포용하는 방식으로 앞으로의 리스크를 줄이는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물론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공연예술 시절부터 수백년간 이어져온 스타 시스템을 하루아침에 다 포기할 리는 없을 것이다. 스타 개인의 아우라로 각종 의혹이나 비행의 전력을 딛고 여전히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연예인들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부당한 폭력과 혐오에 대한 지적과 고발은 갈수록 더 강해질 것이다. 언제까지 스타 개인의 아우라로 뭉개고 갈 수는 없다. 누군가를 괴롭힌 일이 없었을 것 같은 선량하고 양순한 이미지의 연예인들에게만 기회를 주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건 다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도덕적 보수화로 이어질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근본적인 대책도 될 수 없다. 지극히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가치인 ‘인성’을 정량화해서 검증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은 없으니 말이다. 결국 더욱더 다양한 개성과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두루 기용해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스타 한 사람의 아우라에 모든 자원을 집중시키는 방식의 비즈니스 모델에서 콘텐츠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향유하는 소비자도, 제공하는 제작자도, 모두 폭력과 혐오를 재생산하는 위험에서 자유로울 권리가 있으니까.
▶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 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명 한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