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한옥마을 부근 복원된 전라감영에서 펼쳐진 ‘풍류뜨락’은 유럽 바로크 시대를 주름잡던 하프시코드와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음악이 음을 맞췃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제공
#1 지난 16일 아침, 전북 전주 한옥마을 부근에 복원한 옛 전라감영 대청마루 ‘선화당’. 유럽 바로크 시대를 주름잡던 악기 하프시코드와 조선 선비들의 풍류음악이 어우러졌다. 하프시코드가 헨델의 미뉴에트(사단조)를 사뿐히 연주하자, 담박한 거문고 가락이 느릿하게 흐르는 정가 가곡 ‘우조 이수대엽’의 기품을 더했다.
하프시코드는 가곡을 반주하더니, 단소, 거문고와 합주도 했다. 16~18세기 유럽 귀족들이 사랑했던 악기와 조선시대 양반과 중인계급이 풍류방에서 즐기던 성악곡이 ‘따로 또 같이’ 음률을 맞춘 것.
가곡은 시조를 거문고와 대금, 세피리, 장구, 해금 등의 소규모 관현악 반주에 얹어 노래한다.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중에서도 이날 연주한 ‘우조 이수대엽’은 한 음절이 10초가 넘는 긴 호흡으로 ‘세상에서 가장 느린 음악’으로 불린다.
#2 앞선 15일 저녁, 전주시 덕진구 한국소리문화전당 2천석 규모의 공연장 ‘모악당’.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은 예년과 달리 국악관현악단이 아니라 성기선이 지휘하는 전주시립교향악단이 주도했다. 연주한 곡들 가운데 서양음악은 없었고, 모두 한국음악이었다. 첫 곡은 로린 마젤과 뉴욕 필하모닉이 평양에서 초연한 ‘아리랑 환상곡’. 오케스트라용으로 개작해 이날 초연한 김성국의 25현 가야금 협주곡 ‘바람과 바다’에선 장구가 티파니와 대거리했고, 가야금과 하프가 합을 맞췄다.
국내 최정상급 소프라노 서선영과 바리톤 김기훈이 현제명의 오페라 ‘춘향전’ 가운데 ‘사랑가’를 부르자, 소리꾼 고영렬이 직접 편곡한 판소리 ‘춘향가’의 ‘사랑가’를 김율희와 함께 불러 화답했다. 작곡가 최우정이 여러 나라 ‘뱃노래’를 뽑아 만든 ‘꿈’도 이번 축제를 위한 위촉 초연 곡이다.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가운데 ‘뱃노래’에 거문고 뱃노래, 경상도 자진 뱃노래, 과테말라 뱃노래, 타히티 뱃노래를 뒤섞었다. 성악과 서선영과 김기훈, 소리꾼 고영렬과 김율희가 선보인 ‘동서양 4중창’은 귀에 착착 감겼다. 작곡가 최우정은 “서양 클래식 음악도 다양한 음악과 선율이 뒤섞이면서 발전했다”고 말했다.
국내 최정상급 성악가인 소프라노 서선영(왼쪽)과 바리톤 김기훈이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에서 2중창을 부르고 있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제공.
22회를 맞은 이번 전주세계소리축제는 올해부터 새롭게 변모했다. ‘존재감 미약한 고만고만한 지역축제로 굳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월드뮤직 축제’로 비치며 정체성마저 모호해졌다는 지적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올해부터 클래식 음악과 국악에 밝은 이왕준(59) 명지의료재단 이사장이 조직위원장을 새로 맡았다. 집행위원장도 국립국악원 연구실장을 거친 김희선(54) 국민대 교수를 위촉했다. 이왕준 위원장은 “전통음악은 더 깊은 원류를 중심으로, 동시대 음악은 장르 간 융합과 조화로 세련되고 현대적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번 축제의 음악적 열쇳말은 ‘서양음악의 토착화’다. 국악기로 서양음악을 연주하거나 국악관현악에 일부 서양 악기를 얹는 방식을 탈피해 서양음악 틀 안에서 전통음악을 풀어내려는 방향이 엿보인다. 전통의 울타리에 안주하지 않고 보편성을 얻은 서양음악을 과감하게 수용하고 녹여내려는 움직임이다. 개막 공연과 풍류뜨락을 연출한 이소영 음악평론가는 “우리 소리의 세계화를 위한 진정한 첫걸음은 서양음악의 토착화에 있다고 본다”며 “판소리와 민요, 창작오페라, 위촉 창작곡 등 한국음악으로만 개막공연을 꾸렸다”고 했다.
소리꾼 고영렬(왼쪽)과 김율희가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공연에서 함께 노래하는 모습. 전주세계소리축제 제공.
축제는 오는 24일까지 한국소리문화의전당과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등 전북 14개 시·군에서 진행된다. 김일구(‘적벽가’)·김수연(‘수궁가’)·정순임(‘흥부가’)·신영희(‘춘향가’)·조상현(‘심청가’) 명창이 제자들과 릴레이로 판소리를 완창하는 ‘국창열전 완창판소리’를 포함해 ‘108번의 공연’이다.
‘전주만의 축제’를 탈피하기 위해 이번 축제에선 ‘소리축제열차’도 띄웠다. 15일 오후 서울 용산역에서 출발한 4량의 축제열차엔 각국의 주한 외교사절과 음악계 인사, 일반 관객들이 탑승했다. 음악가 바그너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개막 때 처음 시작한 축제열차는 요즘도 영국 글라인드본 페스티벌 등 여러 축제에서 운영하고 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