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백조로 길가에 억새들이 일렁이고 있다. 제주도 제공
제주에도 가을이 다시 돌아왔다. 이를 알려주는 풍경이 몇 가지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단연 억새의 향연이다. 가을이 되면 제주 전역 곳곳에서 억새가 서걱이며 제주의 표정을 바꾼다. 제주에서 황금빛 억새의 아름다운 참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중산간이다.
중산간은 아직도 개간되지 않은 들판과 숲, 그리고 오름이 많아 제주의 민낯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오름은 여름에는 우아한 왕릉처럼 초록의 옷을 입고 있다가 가을이 되면 황금빛 억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바람이 불면 오름의 억새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털처럼 일렁이며 바람에 나부낀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후기 인상파 화가 고흐의 작품 <까마귀가 있는 밀밭>이 떠오른다. 거친 붓 터치와 불타는 듯한 색채로 그려낸, 바람에 흔들리는 노란 그림 속 밀밭이 제주 중산간의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풍경과 사뭇 닮았다. 오름뿐 아니라 오름 주변의 거친 들판도 억새로 뒤덮여 장관을 연출한다. 해가 하늘의 정수리를 지나 지평선으로 내려오는 시간, 지는 해에 붉게 물든 억새 들판은 황금빛을 발산하며 황홀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관광객들이 대록산 억새 들판을 걷고 있다. 제주도 제공
한라산을 기준으로 서쪽과 동쪽의 중산간 풍경은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서쪽은 용암이 흘러내리거나 화산재가 쌓이지 않아 평지가 많고, 동쪽은 크고 작은 화산 폭발이 많았던 탓에 오름과 숲이 많다. 그래서 서부에는 곧게 뻗은 도로가 많지만 동부는 꼬불꼬불한 도로가 많다. 덕분에 서부 중산간에서는 넓은 들판에서 흔들리는 억새를 볼 수 있고, 동부 중산간에서는 오름을 중심으로 만발한 아름다운 억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황홀한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은 제주 동부의 따라비오름, 대록산(큰사슴이오름), 서부의 새별오름, 그리고 동부의 유명한 중산간 도로인 금백조로와 남부의 산록남로 등이 있다.
여행객들은 가을 억새를 보기 위해 주로 산굼부리를 찾아가는데, 제주 사람들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 위치한 따라비오름을 찾는다. 따라비오름(표고 342m, 비고 107m)은 제주 동부 가시리에서 북서쪽으로 3km 지점에 있다. 따라비오름에는 세 개의 분화구가 있어 그 모습이 독특하다. 세 개의 분화구는 바라보는 장소에 따라 서로 연결되어 하나로 보이기도 하고, 따로따로 세 개로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바라보든 그 모습이 아름다워 다랑쉬오름과 더불어 오름의 여왕이라 불린다. 가을이 되면 굼부리(분화구) 안과 주변에 가득한 억새들이 파도처럼 일렁인다. 그 모습이 마치 오름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비오름과 이웃한 대록산도 억새로 유명한 오름이다. 따라비오름이 억새를 품은 오름이라면, 대록산은 산 주변 들판에 억새가 많은 곳이다. 대록산으로 가는 길 주변 또한 아직 개간되지 않은 넓은 억새 들판이다. 억새의 키가 얼마나 큰지 성인의 키를 훌쩍 넘어서며, 억새와 하늘 외에 보이는 것이 없는 억새의 세상을 보여준다. 대록산의 원래 이름은 큰사슴이오름이다. 사슴이 많이 살고 있어, 혹은 오름 모양새가 사슴 같다 하여 큰사슴오름이라 불린다. 실제로 오름을 오르다 어렵지 않게 노루를 만날 수도 있다. 산 정상에 오르면 남쪽으로 광활한 억새 들판과 가시목장 방목지가 보이는데, 조선시대에 목장 최적지로 선정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새별오름의 억새들은 햇살이 비치면 황금빛 별처럼 반짝인다. 제주도청 제공
제주 동부에 따라비오름와 대록산이 있다면 서쪽에는 새별오름이 있다. 새별오름은 몽골 초원처럼 광활한 들판에 우뚝 서 있다. 그래서 공룡이 웅크린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거대한 성곽처럼 보이기도 한다. 넓고 높은 평원의 기를 모아 갑자기 솟아오른 새별오름을 보고 있으면, 옛사람들이 북극성을 보고 길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새별오름은 높이 519m에 이르는 중형 오름이며, 정상에는 말굽형 분화구와 5개의 봉우리가 있다. 밤하늘의 샛별과 같이 드넓은 들판에 서서 외롭게 빛난다 하여, 또 봉우리 5개가 별 모양을 이룬다 하여 새별오름이라 부른다. 멀리서 보면 초원에 세운 피라미드 같다. 새별오름은 실제로 가을이 되면 더욱 빛난다. 오름과 오름 주변에서 자라나는 억새 때문이다. 가을 햇살에 비친 황금빛 억새를 보고 있으면 빛나는 별처럼 반짝거린다.
산록남로는 드라이브 하면서 억새를 즐기기 좋은 곳이다.
꼭 오름이나 산을 오르지 않더라도 제주 곳곳에서 억새를 즐길 수 있다. 가을 중산간 도로 주변에는 억새가 많아 드라이브하면서 억새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제주 최고의 내륙 드라이브 코스는 동부 지역에 있는 ‘금백조로’가 대표적이다. 금백조로는 아부오름, 높은오름, 좌보미오름, 동거문오름, 백약이오름 등 제주 동부의 많은 오름과 이웃해 있다. 금백조로를 달리다 보면 억새가 휘날리는 드넓은 들판을 만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는 도로와 차밖에 없는 아름다운 길이다. 속도를 줄이고 조용히 달리고 있으면 억새가 만든 황금 카펫 위를 달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제주 남부의 산록남로 또한 드라이브하면서 억새를 즐기기 좋은 곳이다. 서귀포시 동홍동 중산간에서 시작해 안덕면 광평리를 지나 평화로와 만나는 산록남로는 큰 커브 없이 거의 일직선이어서 억새를 감상하기 더욱 좋다. 길 주변에서 연신 손을 흔드는 억새뿐 아니라 서귀포시 앞바다부터 산방산에 이르는 광활한 풍경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도로이다.
■따라비오름
따라비오름은 3개의 굼부리와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봉우리가 연결되어 이루어진 오름이다. ‘따라비’라는 이름은 육지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고 낯선 편이다. 따라비오름 주변에 모지오름, 장자오름, 새끼오름 등이 있는데, 이 오름들을 거느린 가장이라 하여 ‘따애비’ 혹은 ‘땅하래비’라 불리다가 ‘따라비’가 되었다. 오름 정상까지 가는 데 25분 정도 소요된다. 오르는 길에도 억새가 많지 않지만, 3개의 굼부리가 있는 정상에 다다르면 산 자체가 억새로 보인다.
주소: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산62
■대록산(큰사슴이오름)
대록산은 오름 주변이 넓은 들판이다. 2000년에 개관한 정석항공관과 가시목장 방목지와 이웃하고 있으며, 서쪽에는 소록산(족은사슴이오름, ‘족은’은 ‘작은’의 제주도 방언)이 있다. 해발 474.5m, 높이 125m인 중형 오름이다. 2개의 분화구가 있는데, 분화구는 모두 가파르고 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남쪽 면으로는 억새가 가득하다.
주소_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산68
■새별오름
다랑쉬와 용눈이가 제주 동부를 대표하는 오름이라면 새별오름은 서부를 대표하는 오름이다. 정상에 말굽형 분화구가 있고 봉우리는 5개이다. 이곳에서 매년 봄 제주도의 대표 축제 중 하나인 들불문화제가 열린다. 입구에서 약 20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으며, 정상에 서면 바다 같은 서부 초원 위에 오름들이 배처럼 둥둥 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 한라산이, 서쪽으로는 이달봉이 그림처럼 앉아 있다. 저 멀리 서쪽 바다엔 비양도가 장난감 배처럼 귀엽게 떠 있다.
주소_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산 59-8
■금백조로
금백조로는 제주에서 손꼽는 길과도 연결되어 있다. 송당 6길, 중산간 도로(1136번), 수송로는 금백조로와 어우러진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금백조로의 원래 이름은 ‘오름사이로’이다. 수많은 오름 사이에 있는 길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이 도로 부근에 있는 송당마을의 신화 속 인물 이름을 따서 금백조로라 부른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산록남로(제2산록도로)
산록남로는 29㎞ 길이의 도로다. 큰 커브 없이 일직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제주의 아우토반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북쪽으로는 한라산이 남쪽으로는 태평양이 펼쳐져 있으며, 특히 남쪽으로 큰 오름이 없어 광활하게 펼쳐진 제주 남부의 풍광을 감상하기 좋다.
주소_ 서귀포시 동홍동
글·사진 문신기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