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제주 사람들에게 전설로 통하는 빙수가 있었다.
‘빙수’ 하면 자그마한 그릇에 얼음을 수북이 담고 걸쭉한 팥 시럽 한 숟갈에 통조림 과일 몇 조각, 작은 떡 몇 개 올려주는 제과점 빙수가 고작이던 시절이었다. 제주의 ㅎ커피숍 빙수는 화채 그릇 같은 큰 유리 볼에 얼음과 함께 담아준 빙수 고명이 충격적일 만큼 많았고 종류도 다양했다. 일단 기본적인 떡과 젤리가 두 배 이상이었다. 여기에 그 당시 빙수 고명으로는 생소한 시리얼과 웨하스, 스위트콘이 올라가고, 수박과 참외, 복숭아 등 생과일이 한자리를 차지했다. 초콜릿 시럽은 기본에 우유 또는 커피시럽을 곁들여 주기도 했다. 이런 빙수가 커피 두 잔 값이었다.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름 휴가철, 제주에 온 지인들에게 이 빙수를 맛보이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다. 전국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빙수에 놀라는 지인들의 표정을 보며 토박이들은 ‘빙부심’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제주의 빙수는 ‘세숫대야빙수’라는 새 장르를 열었던 화려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제주의 빙수는 지금껏 전국 어디에도 뒤처지지 않는 내공을 보여준다.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제주다운 빙수들을 모아본다.
■카페동네의 ‘당근빙수’
여자와 남자는 올레길에서 처음 만났다. 서울에서도 알콩달콩 이어진 인연은 결혼으로 이뤄졌다. 그들은 짧은 준비 기간을 거쳐 5년 전 그들이 처음 만난 올레길 1코스인 종달리에 정착했고, 두 아이의 부모로 살고 있다. 마을 골목길에 있는 조그마한 이 카페는 부부의 인연만큼이나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남편이 처음 만났을 때 사준 당근 주스의 맛을 잊을 수 없던 여자는 당근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었다. 지역 특산물로 유명한 이곳 구좌 당근으로 만든 빙수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기분 좋을 만큼의 당도와 약간의 우유 향, 그리고 당근이 주인공임을 알 수 있을 만큼 진한 당근 향이 느껴진다. 여러 토핑 재료를 고민해봤지만, 호두 외에는 어울리는 재료가 없어 고소하게 볶은 호두만 약간 첨가했다고 한다. 그것이 신의 한 수다. 깔끔함이 돋보인다. 매니아층이 있어 사철 판매하는 메뉴로 자리잡았다.
주소 : 제주시 구좌읍 종달로5길 23 / 070-8900-6621 / 매주 화요일 휴무
■카페 쉼표의 ‘오메기감저빙수’
전주 출신의 젊은 청년은 7년 전 제주에 정착했다. 카페가 자리한 곳은 어린 왕자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처럼 보이는 비양도가 마주 보이는 작은 공터다. 지치고 힘들 때 이 공터에 들러 잠시 쉬어가곤 했던 청년은 이곳에 다른 사람들도 쉬어 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2년 동안 땅 주인을 찾아가 조르고 졸라 4년 전 힘겹게 작은 카페를 열었다.
커피와 함께 제주에 어울리는 메뉴를 만들고 싶었다. 오메기떡을 올린 빙수를 만들었지만, 제주를 표현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 ‘감저’는 ‘고구마’의 제주 사투리로, 제주는 예로부터 달달한 물고구마로 유명했다. 설탕의 억지스러운 단맛보다 고구마의 자연스러운 단맛이 맘에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팥 시럽과 함께 제주산 고구마 시럽을 곁들이고, 제주산 자색고구마 시럽을 혼합한 매력적인 보라색 얼음을 갈아 담아서 2년 전쯤 이 빙수를 완성했다. 전체적으로 고구마 맛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오메기떡 빙수는 다른 곳에도 더러 있지만, ‘오메기떡감저빙수’는 오직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
주소 : 제주시 한림 한림로 359 / 064-796-7790 / 휴무 없음
■닐모리동동의 ‘한라산빙수’
사회적기업인 ‘(유)섬이다’의 직영 카페 겸 레스토랑이다. 2011년 개업할 때부터 지역사회에 기여할 목적으로 운영하는 착한 식당으로 수익금을 올레길과 지역 청소년 지원 사업 등 다양한 기부 활동에 사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천주교 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성이시돌목장의 제주산 유기농 우유로 만든 수제 아이스크림 전문점 ‘우유부단’을 함께 운영 중이다. 이곳의 다양한 메뉴를 살펴보면 제주다운 요소를 담아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제주산 식재료를 살리기 위해 고민한 흔적은 빙수에도 나타난다. 유기농 우유로 얼린 얼음을 갈아 국내산 단팥 위에 덮어 한라산 모양을 만들고, 제주산 녹차 시럽과 수제 연유에 타피오카 펄을 곁들여 준다. 녹차 시럽을 산 정상에 뿌리니 영락없는 한라산 백록담이다. 한라산을 먹는 듯한 재미와 유기농 우유의 고소함, 억지스럽지 않은 적당한 단맛은 여행에 지친 심신을 위로하고도 남는다.
주소 : 제주시 서해안로 452 / 064-745-5008 / 휴무 없음
글·사진 양용진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