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제주엔

그리스·로마만큼 풍부한 신화 간직한 섬 제주…핵심은 열두본풀이

등록 2018-09-12 10:00수정 2018-09-12 21:38

[제주&] 열두본풀이로 풀어낸 제주 신화
신의 내력담이자 구비서사시 본풀이
천지개벽 신화 천지왕본풀이
옛이야기 원류이자 소중한 문화유산
제주도의 무속 의례인 초감제에서 천지왕본풀이를 구연하고 있다. 제주전통문화연구소 제공
제주도의 무속 의례인 초감제에서 천지왕본풀이를 구연하고 있다. 제주전통문화연구소 제공
제주도는 그리스·로마 못지않게 풍부한 신화를 간직한 섬이다. 고려시대 이전까지 탐라국이라는 독립국이었고, 조선시대에는 200여 년 동안 출륙금지령으로 묶였던 까닭에 제주는 외부와 교류가 없는 고립된 섬이었다. 한편 제주의 전통 신앙과 신화가 다른 지역보다 더 풍부하게 전승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제주 신화는 전통 신앙인 무속과 관련 깊다. ‘절 오백 당 오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속 신앙이 강하게 남아 있는 제주에는 무속 신화가 많다. 입으로 전해지는 무속 신화를 ‘본풀이’라고 한다. 이는 심방(무당)들이 굿을 할 때 제상 앞에 앉아서 노래하는 신의 내력담이자 구비서사시다.

본풀이는 ‘신의 본(本)을 풀어낸다’ 뜻이다. ‘신의 본을 풀면 신나락 만나락 하고, 생인의 본을 풀면 백 년 원수가 된다’는 말이 있다. 신의 내력담을 풀면 신의 영험함이 드러나면서 신명이 절로 나고, 산 사람을 따지고 들면 험담으로 흘러가 원수지간이 된다는 것이다. 굿을 진행하면서 본풀이를 읊는 이유는 신을 칭송해 기쁘게 함으로써 인간들을 잘 지켜주고 하는 일이 잘되도록 도와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두이레 열나흘 동안 이어지는 제주 큰굿에서는 제주 신화 ‘열두본풀이’를 가창한다. 제주 신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열두본풀이는 신들의 이야기면서 태어나고 성장하며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삶을 담은 것이 특징이다.

열두본풀이 중 가장 먼저 가창하는 ‘천지왕본풀이’는 천지개벽 신화다. 우주가 탄생하고 인간 세상이 열리는 과정을 풀어내면서 굿청을 신이 좌정하는 신성한 공간으로 이동시킨다. 천지개벽 신화는 다른 지방에도 단순한 형태로 전해지지만, 제주의 신화는 서사가 뚜렷하고 내용이 풍부하며 철학적 깊이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3월 제주시 사라봉 칠머리당에서 진행한 칠머리당영등굿 중 영감본풀이를 극으로 시연하고 있다. 칠머리당영등굿은 유네스코 무형 문화재로 지정됐다.
지난 3월 제주시 사라봉 칠머리당에서 진행한 칠머리당영등굿 중 영감본풀이를 극으로 시연하고 있다. 칠머리당영등굿은 유네스코 무형 문화재로 지정됐다.
‘초공(初公)본풀이’는 심방의 조상인 삼시왕 이야기다. 심방은 ‘신의 일을 보는 형방’이라는 의미로 무속인을 예우하는 명칭이다. 젯부기 삼형제가 심방의 조상인 삼시왕이 되는 과정에서, 악기의 신 너사무너도령과 의형제를 맺어 춤을 추고 악기를 두드리며 하늘을 감동하게 한다. 소리와 춤에 악기가 더해졌을 때 신명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공(二公)본풀이’는 꽃으로 사람의 생사를 가르는 서천 꽃밭 이야기다. 서천 꽃밭은 제주 신화에서 전하는 신비로운 공간이다. 이곳에는 사람을 살리는 ‘살살이꽃, 피살이꽃’을 비롯해 사람을 죽이는 ‘수레멸망악심꽃’뿐만 아니라 ‘웃음 웃을 꽃, 싸움 싸울 꽃’ 등 신비로운 꽃들이 자라고 있다

그 외에도 사람의 운명과 직업에 대한 신화 ‘삼공본풀이’, 아기를 낳고 기르게 해주는 산육신 신화 ‘삼승할방본풀이’, 뱀신 칠성아기가 제주에 들어와 곡물 창고를 지켜준다는 ‘칠성본풀이’, 조상신을 잘 모셔 수명이 3천 년이 된 ‘명감본풀이’, 살아서 저승에 다녀온 강림이가 차사가 돼 저승길을 인도한다는 ‘차사본풀이’, 잘 대접하면 고기를 많이 잡게 해 부자가 되게 해주는 도깨비 이야기 ‘영감본풀이’ 등이 있다.

제주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 중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신을 꼽으라면 대부분 ‘자청비(自請妃)’를 내세운다. ‘스스로 여자 되기를 청하였다’는 의미의 자청비는 가부장사회의 규제를 벗어나 남장을 하면서까지 공부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늘로 올라가 사랑을 쟁취하는 여신이다. 자신의 힘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은 자청비는 농경신이 되었다. 입춘이면 제사장인 탐라왕이 하늘에서 씨앗을 들고 내려오는 농경신 자청비를 맞이하는 입춘굿을 집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할머니가 옛이야기를 들려주던 풍경이 사라진 요즘이지만, 제주 신화는 옛이야기의 원류(源流)이자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영화 <신과 함께>를 보면 차사본풀이의 저승 풍경이 떠오른다. 인기 드라마였던 <도깨비> 역시 제주 신화 속 도깨비의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제주 신화는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넘친다. 최근 제주 신화를 바탕으로 한 여러 예술 활동이 늘어나고 있어 앞으로 보다 많은 사람이 ‘백주또, 방울아기씨, 강림이, 자청비, 가믄장아기’ 등 매력적인 제주의 신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제주/여연 작가·<제주당올레> 저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단독] ‘문학사상’ 다시 존폐 기로…부영, 재창간호 인쇄 직전 접었다 1.

[단독] ‘문학사상’ 다시 존폐 기로…부영, 재창간호 인쇄 직전 접었다

한강을 ‘2순위 후보’로 꼽은 이유 [The 5] 2.

한강을 ‘2순위 후보’로 꼽은 이유 [The 5]

‘비밀의 은행나무숲’ 50년 만에 첫 일반 공개 3.

‘비밀의 은행나무숲’ 50년 만에 첫 일반 공개

1600년 전 백제인도 토목공사에 ‘H빔’ 사용했다 4.

1600년 전 백제인도 토목공사에 ‘H빔’ 사용했다

“민족과 별개로 과학적 기반에서 현대 국어학 개척한 선구자” 5.

“민족과 별개로 과학적 기반에서 현대 국어학 개척한 선구자”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