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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제주엔

“스스로 삶의 틀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

등록 2018-10-22 10:00수정 2018-10-22 10:14

[제주&] ‘서울촌놈, 제주에서 자리 잡기’ 저자 이강군씨
대기업, 대학교수 버리고 제주로
텃밭농사에 유튜브 방송도
“다음 20년은 남 위한 삶 살 터”
이강군씨가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에 위치한 자신의 집 ’물메소랑’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이강군씨가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에 위치한 자신의 집 ’물메소랑’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18년 동안 일했다. 대학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는 일은 즐거웠고, 보람도 있었다. 두 아들 모두 건강한 사회인으로 장성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성공한 인생’이라 했다. 그러나 앞만 보고 달려갈 수밖에 없는 ‘도시의 삶’은 서서히 그의 몸과 마음을 짓눌렀다. 문득, 모든 것을 버려보기로 했다. 서울을 떠나겠다는 결심과 함께 운명처럼 제주시 애월읍의 땅을 구입할 기회가 생겼다.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제주 이주 4년 차를 맞는 이강군씨(59)의 얘기다. 10월1일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번대동에 위치한 이씨의 집에서 그를 만났다. 널찍한 대지에 잘 관리된 잔디밭이 싱그러웠다. 아담한 이층집 앞으로는 노꼬메 오름의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건물 뒤로는 푸르른 애월 앞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기초 토목공사와 콘크리트 타설 등의 전문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구석구석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집이라고 했다. “집을 지으며 컨테이너에서 먹고 잤답니다, 하하하!”

직접 집을 짓는 과정은 힘겨웠지만, 새로운 인생을 실현하고 있다는 즐거움이 더욱 컸다. 사시사철 한라산이 넉넉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집에 그는 ‘물메소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식 주소는 하귀리지만, 수산리와 구엄리의 경계에 걸쳐 있다. ‘물메’는 애월읍 수산리의 옛 지명이고, ‘소랑’은 ‘사랑’이다. 찾아오는 지인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게스트 하우스로 운영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제주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두 아들이 손님방을 차지하면서 운영을 그만둔 상태다. 조금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도 한몫했다고 했다.

이씨는 자신의 경험담을 책으로 엮어냈다.
이씨는 자신의 경험담을 책으로 엮어냈다.
무엇이 ‘안정된 성공’을 버리고 제주에 터를 잡게 했는지 궁금했다. “새벽 5시에 나가면 12시에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어요. 365일 중 360일 정도는 일했던 것 같아요. 이게 도대체 뭐 하는 건가, 공허감이 밀려왔어요.” 회사를 떠나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학위를 마치고 교수가 됐다. 교수라는 직업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자기 시간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는 그에게 다른 것을 요구했다. 연구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직장에서 쌓은 경험과 능력을 일종의 ‘세일즈’로 활용하는 일을 도맡아야 했다. 새벽별을 보며 ‘월화수목금금금’ 일하고, 회의와 회식이 끊이지 않는 일상이 다시 시작됐다. “지금은 70kg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서울에선 96kg까지 체중이 불었어요. 건강도 좋지 않았고요.”

물론 제주에 와서도 이씨는 바쁘다. 잔디도 깎아야 하고, 텃밭에서 농사도 짓는다. 호박, 고추, 상추, 깻잎 등 채소류는 사다 먹을 일이 없게 됐다. 지척에 있는 바닷가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무료할 때면 기타와 클라리넷, 색소폰 등 악기도 잡는다. 자전거를 타며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을 가르고, 사진도 찍는다. 보다 전문적으로 사진과 동영상 작업을 하고 싶어 집 뒤에 스튜디오 공간을 만들고 있다. 증축 공사도 물론 직접 한다. ‘자연 치유’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보건대체의학 학위와 보건교육사 국가 자격도 땄다. 최근에는 ‘유튜브 1인 방송’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도시의 삶을 버리고 제주에 정착한 자신의 이야기를 <서울촌놈, 제주에서 자리 잡기>(아라크네 출판사)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었다. 하루가 짧긴 서울이나 제주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전에는 남이 만들어놓은 틀에 나를 끼워 맞추며 살았잖아요. 지금은 스스로 그 틀을 만들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차이예요. 놀고 싶으면 놀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죠.” 아직 서울에서 복지 관련 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아내는 강의가 없는 날 가족이 있는 물메소랑으로 돌아온다. 아내의 은퇴 뒤에는 온 가족이 제주에 정착할 참이다.

“태어나서 20년은 부모를 위해 살았고, 20년은 조직을 위해 살았습니다. 앞으로 20년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씨가 그의 퇴사를 만류하는 회사를 설득한 논리라고 한다. ‘행복’을 찾아 제주에 자리 잡은 이씨에게는 한 가지 꿈이 더 있다. “그 뒤에 20년의 인생이 더 허락된다면, 이제는 남을 위해서 살아보고 싶어요.” 이씨가 지역 커뮤니티에서 대체의학과 관련한 강의에 나서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기 위한 유튜브 방송에도 도전하는 이유다. 그는 내년이면 환갑이 된다. “이제는 남을 돕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이씨의 ‘다음 20년’이, 이곳 제주에서 시작되고 있다.

송호균/제주도민이 된 육아 아빠·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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