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의 과달라하라에서 열릴 국제출판협회 총회의 프로그램을 여러 나라 친구들과 함께 준비하고 있다. 강연의 주제도 잡고 연사도 추천한다. 종이에 인쇄를 해서 책을 만드는 일이 출판이라는 것이 지난 수백년간의 정의이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라서 그 정의가 흔들리고 있다. 이젠 글을 화면 위에서 소비하는 일이 잦으니 내용을 담는 그릇으로 종이만을 고집하기는 어려운 세상. 미디어, 네트워크, 그리고 인공지능 등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세상에서 출판이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따져보는 자리가 될 것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지식을 보존하고 나누는 통로로써 출판은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은 분명하다. 지식의 생산부터 수확하고 나누는 과정이야 바뀌겠지만, 지식과 의견의 통로이며 다양한 감정과 즐거움의 그릇인 출판의 역할을 오롯이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 역할이 무너지면 우리가 누리는 자유도, 즐거움도, 그리고 생명도 위험에 처하기 십상이다. 특히, 기술의 발전이 정보의 통로도 되지만 정교한 검열과 왜곡의 방편이 되기도 한다. 안면 인식까지 하는 감시 사회에서 자유로운 의견을 나누는 것은 점점 제약을 받는다. 우리에게 보편적인 가치들이 있었는데,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그것들을 파괴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일상의 자기 검열로 이어지고 표현의 자유는 크게 위협을 받는다.
내가 총회 프로그램으로 제안한 것은 ‘기술과 검열’이고, 머릿속에 떠오른 연사는 202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마리아 레사였다. 그는 디지털 시대 탐사보도의 선구적인 모델로 이야기되는 ‘래플러’를 이끌면서 언론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그가 책 ‘권력은 현실을 어떻게 조작하는가’에서 기술에 대해서 한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나는 기술이 신과 같은 권능을 갖게 되는 과정을 목격하고 기록해왔다. 이제 기술은 우리를 거짓말 바이러스에 감염시키고 서로 싸우게 만들며, 두려움과 분노와 혐오를 자극하거나 심지어 불러일으키고 전세계 권위주의자와 독재자의 부상을 가속화한다. 나는 이를 두고 ‘민주주의가 천 갈래로 찢어지는 상처를 입고 죽어가고 있다’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전쟁과 같은 거대한 폭력부터 ‘무차별 폭행’까지 물리적 폭력도 끊이지 않지만, 온라인에선 ‘좌표’를 찍는 ‘꼭두각시’ 계정을 통한 공격까지 횡행한다. 가짜 게시물과 거짓말이 사실을 덮고 역사를 다시 쓴다. 어디도 안전한 곳이 없고 모두가 폭력의 위협에 노출된 상황에서 느끼는 처참한 공포를 그린 만화가 있다. ‘키문카무이’, 아이누어로 ‘산의 신’이라는 뜻이다. 낚시를 하러 온 아이들과 다큐멘터리를 찍는 어른들이 고립된 공간에서 곰의 습격을 받는다. 사람들이 죽고, 서로 살려고 바둥거리는 과정에서 의심과 분열이 생긴다.
“저항 따위는 하는 게 아니었어. 얌전히 몸을 숨기고 그냥 지나가게 했어야 했어.” 어른들은 이런 푸념과 원망의 마음으로 상황을 악화시킨다. 버림받은 아이들은 흑요석(화산유리)으로 창을 벼리며 생존의 돌파구를 뚫는다. 지구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간이 지구상에서 야만에 버려진 공포를 느껴야 하는 역설적 상황. 지구가 끓기 전에 우리는 다른 이유로 더 비참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만화 애호가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