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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 연필로 공책에 쓰려면 꼭 필요한 게 있었습니다. 책받침이죠. 저학년들의 책받침에는 만화 주인공들이 있었지만, 고학년들의 책받침에는 ‘그녀’들이 있었습니다. 책받침의 3대 여왕 브룩 실즈, 피비 케이츠, 그리고 소피 마르소.
저는 소피 마르소가 제일 좋았습니다. 청순한 소녀 같으면서도 성숙한 여인 같은, 지상낙원일 것만 같은 프랑스를 고향으로 둔, (누구는 ‘소피 마렵소’ 따위로 희화화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 이름부터 어딘지 우아해 보이는 그녀가 활짝 웃고 있는 책받침을 공책 따위에 묻어둘 순 없었죠. 책받침이라기보다는 휴대용 액자라고나 할까요.
13살 소녀 때 출연한 영화 <라붐>(1980)의 그 장면. 시끌벅적한 파티장에서 남자 주인공이 씌워준 헤드폰으로 리처드 샌더슨의 ‘리얼리티’를 듣는 그녀의 표정은, 정말이지…. 한국영화 <써니>에서 심은경이 패러디한 장면을 보면서도 저는 그 13살 소녀가 그리웠습니다.
13살 소녀가 어느덧 48살 여인이 됐습니다. 이제는 풋풋한 첫사랑에 빠진 소녀 대신 금기된 사랑을 갈구하는 싱글맘이 더 자연스러운 배우가 된 거죠. 31일 개봉하는 <어떤 만남>의 소피 마르소는 13살 소녀 시절의 그녀보다 더 아름다웠습니다. 저도 나이를 먹어서일까요? 이제는 삶의 연륜이 고스란히 녹아든 여배우의 얼굴이 이제 갓 데뷔한 스무살 여배우의 얼굴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곤 합니다.
왕년의 책받침 스타 얘기를 여기에 쓰겠다고 하니, 함께 영화를 담당하고 있는 유선희 기자는 “최근 개봉작 <파이어스톰>의 유덕화(류더화)도 꼭 언급해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유덕화 책받침을 본 적이 전혀 없다”며 거부했지만, 유 기자는 “내가 초등학생 때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유덕화도 책받침 스타로 인정하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책받침의 여왕은 단 하나, 그녀밖에 없습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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