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7일 영화인 1052인은 가칭 ‘블랙리스트 대응 영화인 행동’을 꾸리고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부역자들의 사퇴를 촉구하는 활동에 돌입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대부분의 사건은 ‘꼬리 자르기’만 하고 무마되는데, 이번엔 대통령 등 명령권자만 구속되고 진상규명은 지지부진한 ‘머리 자르기’가 자행되고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수사 과정을 지켜본 한 영화계 인사의 말이다. 사태를 주도한 ‘윗선’은 구속수사 등 대가를 치르고 있지만, 이를 집행하며 ‘손과 발’ 노릇을 한 영화진흥위원회 등의 주요 인사들은 여전히 버티며 진상규명을 가로막고 있다는 비판이다. 그뿐만 아니라 2014년 말부터 시작된, 모태펀드를 통한 영화계 돈줄 죄기, 부산국제영화제 흔들기, 독립·예술영화 전용관 지원 통제 등으로 인해 영화계는 말 그대로 ‘초토화’ 상태다.
이런 문제는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한시바삐 해결해야 할 것들이다. <한겨레>는 이와 관련한 영화 분야 정책·공약 질의서를 각 대선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 보내 문재인·안철수·심상정 후보 쪽의 답변을 받았다. 세 후보 모두 현재보다 영화계 지원은 확대하되 간섭은 줄인다는 원칙을 강조한 가운데, 심 후보 쪽이 가장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홍준표 후보와 유승민 후보 쪽은 응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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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펀드 운영방식 어떻게 바꿀까? ‘펀드의 펀드’를 일컫는 모태펀드의 문화·영화 분야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영진위가 문화예술진흥기금·영화발전기금의 투자조합출자사업 예산을 출자해 만든 것이다. 모태펀드를 관리하는 중소기업청 산하 한국벤처투자는 이 돈을 각종 영화제작 투자조합 등에 재투자하는데, 한해 제작되는 한국영화의 약 40%가 이 투자를 받는다. 영화에 돈을 대는 개별 투자자의 ‘위험도’를 줄이고, 공공자금을 투입해 영화제작에 필요한 돈이 지속적으로 돌게 하는 게 모태펀드의 역할이다. 이 때문에 모태펀드는 한국영화 제작의 ‘종잣돈’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변호인>, <판도라>, <택시운전사> 등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영화들이 줄줄이 투자를 거부당하고 반공이나 애국심을 강조하는 영화들에 투자가 집중되면서 모태펀드를 운영하는 한국벤처투자가 실질적인 검열기구 노릇을 해왔다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후보들은 모태펀드의 운영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했다. 문 후보 쪽은 펀드의 목적이 ‘이윤 추구’인 만큼 1조원이 넘는 현 모태펀드 규모를 줄이되, 이를 예술·독립영화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완성 전인 콘텐츠를 담보로 제작비 일부에 대한 대출보증을 받을 수 있는 ‘완성보증제도’, 영세업체에 대한 저리 자금대출·채무보증 등을 지원할 수 있는 ‘공제조합’ 등에 이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안 후보 쪽은 “모태펀드 중 문화계정을 따로 분리해 문화콘텐츠 펀드를 만들거나, 한국벤처투자 안에 문화계정을 두되 운용체제를 투명하게 바꿔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심 후보 쪽은 “투명한 절차를 거쳐 선임된 전문위원이나 심사위원들이 자율적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투자 결정 과정과 결과를 모두 공개하는 방식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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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위 인적청산과 정상화 방안은 문·안·심 후보 쪽은 모두 블랙리스트 사태에 책임이 있는 김세훈 영진위원장이 사퇴해야 한다고 밝혔다. 문 후보와 심 후보 쪽은 “진상조사가 우선이며, 이에 따라 책임질 사람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안 후보 쪽은 “위원장이 자진사퇴를 하지 않을 경우 감사원 감사, 공공기관 경영평가 등을 통해 불명예스럽게 해임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답했다.
현재 영진위원장은 문체부가 임명한다. 그리고 위원장과 부위원장 등으로 꾸려지는 9인위원회가 영화진흥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의결하는 역할을 맡는다. 세 후보는 모두, 이 영진위 구성 단계부터 영화계의 의견을 대폭 반영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안에서는 의견이 조금씩 달랐다. 문 후보 쪽은 업계에 추천권을 보장한다는 대원칙이 중요하고 구체적 방안은 향후 협의해가겠다는 태도다. 안 후보 쪽은 업계 의견을 반영해 위원들을 먼저 위촉한 뒤, 이들이 위원장을 뽑는 ‘호선제’를 재도입하겠다고 했다. 심 후보 쪽은 한 발 더 나아가 위원회와 위원장 선임에 있어 감독조합, 프로듀서조합, 제작자협회 등의 영화단체에 추천권뿐 아니라 선출권까지 줘 영진위의 전문성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21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시국선언에서 독립영화인들이 문화체육관광부·영화진흥위원회의 개혁 등을 촉구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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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부산국제영화제 독립적 운영 방안은 <다이빙벨> 상영을 기점으로 박근혜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을 받으며 파행을 겪어온 부산국제영화제의 정상화 방안을 두고, 문 후보와 심 후보 쪽은 공통적으로 “지자체장이 영화제 위원장을 겸직하는 관례를 바꿔야 한다”고 답했다. 문 후보 쪽은 이에 더해 지원규모 심사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등 영화제의 독립적 운영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심 후보 쪽은 영화제를 간섭·통제했던 지난 정권의 적폐와 ‘부역자’를 청산한 뒤, 위원장직을 민간이 맡아야 한다고 답했다. 안 후보 쪽은 “지자체장이 영화제 위원장을 겸하는 문제는 정부가 나서지 말고 영화계와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협의해 결정하도록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며 정부 개입 최소화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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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전용관 지원책은 세 후보 모두 상업영화와 달리 독립영화와 예술영화에 대한 정부의 지원 책임을 강조했다. 문 후보 쪽은 “독립·예술영화 진흥에 대한 국가 책임제는 원칙적으로 보장하되, 현재 독립영화 상영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만큼 공공 독립영화 상영관을 추가로 확보하겠다”는 계획이다. 심 후보 쪽은 예술·독립영화관 확충은 물론 멀티플렉스에도 독립영화 상영 책임을 지워야 한다고 강조하며 “영화 상영회차 쿼터제(특정 영화 독과점 금지) 같은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안 후보 쪽은 “독립·예술영화 지원에 대한 목표예산을 정하거나 영화계 지원 예산 가운데 (독립·예술영화 지원에) 필요예산 비율을 정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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