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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빛’보다 ‘어둠’ 어울렸던 그의 기분 좋은 배신

등록 2018-08-25 23:12수정 2018-08-26 09:20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오브더티브이
영화 <어른도감> 엄태구

‘밀정’ 하시모토, ‘차이나타운’ 우곤
인상깊은 악역 단골이었던 엄태구
허술하고 경박한 사기꾼으로 변신
괘씸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

감독도 배우도 모험적인 캐스팅
자신도 몰랐던 새로운 얼굴 나와
서사 중심인 여성들 방해하지 않고
딱 필요한 만큼의 제 몫 연기
<어른도감> 속 재민은 모두에게 새로운 유형의 인물이다. 능글맞은 듯 무능하고, 사기꾼인 주제에 허술하며, 나쁜 일을 하는데 좋은 구석도 없지는 않은 것 같은 희한한 사람, 엄태구의 얼굴로는 처음 만나보는 사람. 영화사 진진 제공
<어른도감> 속 재민은 모두에게 새로운 유형의 인물이다. 능글맞은 듯 무능하고, 사기꾼인 주제에 허술하며, 나쁜 일을 하는데 좋은 구석도 없지는 않은 것 같은 희한한 사람, 엄태구의 얼굴로는 처음 만나보는 사람. 영화사 진진 제공

무슨 사기꾼이 저래. 영화 <어른도감>(2017) 속 재민(엄태구)은 보면 볼수록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객사 안 하고 살아남았는지 궁금해지는 인물이다. 조카 경언(이재인)을 설득해 형의 사망보험금을 타내려는 수작은 너무 잘 보여서 어이가 없고, 지갑과 스마트폰을 무방비하게 두고 곤히 잠이 든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 갑자기 ‘삼촌’이라며 엉겨 붙는 꼴이 수상했던 경언은 자고 있는 재민의 스마트폰을 챙겨 데이터를 백업하고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어 사진을 남긴다. 경찰은 고사하고 중1 조카에게도 너무 쉽게 꼬리가 잡히는 이 허술한 사기꾼은, 생업인 제비 일을 잘해낼 만큼 모질지도 마음이 단단하지도 못하다. 능글맞게 분위기를 잡고 진심을 위장하는 일은 얼추 하는데, 늘 어딘가 한 군데 허술한 부분이 있어서 자세히 보면 금방 티가 나는 허술한 사기꾼. 덕분에 재민은 잊을 만하면 급소를 차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기고 두들겨 맞을 위기에 처하는데, 그러면서도 툭하면 뭐가 좋다고 헤실헤실 웃고 앉았다. 귀여워해 주자니 하는 짓이 괘씸하고 미워하자니 조금은 마음이 쓰여서 영 짜증나는 신기한 캐릭터가 재민이다. 그러나 그중 가장 신기한 건, 이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엄태구라는 점이다.

감독 제안에 “폐 끼치지 않을까 걱정”

그도 그럴 것이, 상당수의 관객들이 그의 얼굴을 영화 <밀정>(2016)의 하시모토나 <차이나타운>(2015)의 우곤으로 익히지 않았나. 포마드로 빗어 넘긴 머리에 늘 부릅뜬 두 눈으로 화면 너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하시모토 경부나, 엄마(김혜수)의 명령이라면 그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해치우던 우곤으로 엄태구를 기억하던 이들에게, 허술하고 경박하기 짝이 없는 재민은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다. 다른 영화로 엄태구를 만났던 이들이라고 해도 사정이 딱히 다르지는 않다. 형 엄태화 감독의 작품 <잉투기>(2013)의 태식도 한심하고 잉여로운 청춘이었지만 재민처럼 능글맞거나 수다스럽지는 않았고, 형제가 같이 한 다음 작품 <가려진 시간>(2016) 속 태식 또한 선량하고 나른하다고는 해도 재민처럼 밝고 유쾌한 인물은 아니었다. 엄태구를 어떤 영화로 기억하고 있든, <어른도감> 속 재민은 모두에게 새로운 유형의 인물이다. 능글맞은 듯 무능하고, 사기꾼인 주제에 허술하며, 나쁜 일을 하는데 좋은 구석도 없지는 않은 것 같은 희한한 사람, 엄태구의 얼굴로는 처음 만나보는 사람.

그의 이런 변신이 관객에게만 낯선 건 아니다. 김인선 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엄태구를 캐스팅하게 된 사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엄태구 배우의 경우는 나도 삼촌 역을 안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요즘 놀고 있다’고 하더라. 사실 <밀정>(2016)에서의 강렬함 때문인지 세고 강한 악역이 많이 들어와서 힘을 빼고 할 수 있는 이 역할을 좋게 봐준 것 같다.” 감독도 감독 나름대로 선뜻 역할을 수락한 배우에게 놀랐겠지만, 정작 수락한 배우도 놀랐을 줄은 몰랐을 거다. <무비스트>와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엄태구는 제안이 들어왔다는 자체에 놀란 모양이다. “김인선 감독님이 이런 캐릭터를 나에게 제안해줬다는 게 놀랍고 또 감사했다. 아마 감독님 입장에서도 모험적인 캐스팅이었을 것이다. 그간 내가 연기해온 역할과 큰 연관성이 없는 인물인지라, 내 입장에서도 자칫 잘못하면 폐를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인터뷰 때엔 앞으로도 대중에게 보여줄 얼굴이 많을 것 같다고 하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엄태구는 웃으며 “재민 같은 역할까지 예상하고 한 말은 아니”라고 했다. 배우조차 알지 못하던 모습을, 그의 새로운 얼굴을 상상한 김인선 감독이 끄집어내 준 셈이다.

13년차 배우, 앞으로 13년 기대돼

몰려드는 대본 속에서 입맛에 맞게 차기작을 선택할 수 있는 배우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배우는 감독과 제작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직업이다. 배우가 아무리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예전과는 다른 톤의 인물을 연기해 연기 변신을 시도하고 싶다고 해도, 감독과 제작자가 기용해주지 않으면 결국 하던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엄태구도 그랬다. <차이나타운>과 <밀정>을 지나,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결정적 역할이었던 <택시운전사>(2017)의 박중사 역까지, 엄태구는 주로 어둡거나 무게감에 짓눌려 있는 배역을 맡아왔다. 감독들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형형한 눈빛과 짙은 눈썹, 움푹 들어간 볼과 암반처럼 강인하게 튀어나온 광대뼈, 늘 기본값으로 쉬어 있는 중저음의 목소리까지. 배우로서 엄태구가 지닌 하드웨어는 빛보다는 어둠을 채색하는 데 더 매력적인 조합이었을 테니까. 게다가 산업이 고도화되면서, 감독들은 더는 남들이 잘 안 하는 독특한 실험을 미친 척 저질러 볼 수 있는 재량을 잃어가는 중이다. 익숙한 배우에게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해 낯설어 보이게 만드는 시도보다는, 관객들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을 만한 안전한 캐스팅을 하는 쪽으로 기울기 쉬운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엄태구에게서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더 각별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새로운 시도를 제안한 감독과, 그 제안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기꺼이 변신한 배우의 합을 지켜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리를 내준다는 점 또한 재민이란 캐릭터의 큰 매력 중 하나다. 적지 않은 창작자들과 제작자들이 무의식중에 남자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에 필요보다 더 많은 공간을 내주곤 한다. 남성이 서사의 중심인물이 되는 오랜 관행에 익숙해진 나머지, 심지어는 여성이 서사의 중심에 선 이야기를 전개할 때조차 남성 인물에게 넉넉하게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어딘가 어색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른도감>은 조금 다르다. 이 영화는 못 미더웠던 삼촌 재민이 철이 들어 경언의 든든한 보호자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경언이 무책임하게 살던 재민의 정신머리를 뜯어고쳐 조금은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과정에서 재민과 유대감을 쌓고 자신도 성장하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방점도 관계의 주도권도 모두 경언에게 가 있는 작품이고, 심지어는 감정적 유대관계가 쌓이는 양상도 재민과 경언 사이보다 경언과 점희(서정연) 사이가 더 따뜻하고 끈끈하다. 경언과 점희가 이야기의 주인공 자리에 앉아 애틋하게 마음을 주고받는 동안, 재민은 딱 관객이 안심하고 지켜볼 만한 거리를 두고 배경으로 물러나 있다. 배우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덕분에 딱 필요한 앙상블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한국 연예계만큼 배우의 기근을 매 순간 고심하는 곳도 드물다. 잊을 만하면 “젊은 여자배우 기근…충무로 발 동동”이라거나, “젊은 남자배우 대거 입대, 남자배우 기근 시대 오나” 같은 헤드라인을 단 기사가 ‘많이 본 연예기사’란에 뜬다. <어른도감>은 그런 걱정을 잠시 잊게 해주는 작품이다. 촬영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는 이재인이 든든하게 서사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며 극을 경쾌하게 이끌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고, 한국의 주류 영화와 드라마가 그동안 서정연이라는 훌륭한 배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구나 하는 깨달음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엄태구가 있다. 어둡고 무거운 배역을 연기할 때에는 믿고 볼 수 있다는 신뢰감을, 밝고 촐랑거리는 역을 연기할 때에는 예상하지 못한 기분 좋은 배신감을 안겨주는 배우. 주연부터 단역에 가까운 우정출연까지 어떤 분량을 받아도 딱 제 몫만큼 정확히 연기해내는 배우. <친절한 금자씨>(2005)의 단역으로 데뷔한 이 13년차 배우는 여전히 쑥스럽다며 그 흔한 소셜 미디어 계정 하나도 운영하지 않고 연기 칭찬을 받는 것도 어색해하지만, 나는 엄태구가 보여줄 다음 13년이 진지하게 기대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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