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집의 시간들> 장면. 케이티앤지상상마당 제공
집은 몸과 마음을 누이는 보금자리이자 금전적 가치를 지닌 재산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집이 아파트라면 앞쪽보다 뒤쪽으로 무게추가 기우는 듯하다. 특히 재건축 문제라도 얽히면 더하다.
좀 유별난 아파트가 있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 둔촌주공아파트다. 당시 대한주택공사가 만든 이곳은 1980년 첫 입주자를 받았다. 1단지부터 4단지까지 143개동 5930가구가 한 울타리 안에 모인 대단지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던 1981년 우리집은 이곳으로 이사했다. 옛날 아파트가 대체로 그렇지만, 이곳은 아파트 동간 간격이 특히나 넓었다. 주차한 차도 많지 않아 그곳을 운동장 삼아 주먹야구, 오징어, 다방구 같은 놀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 <집의 시간들> 장면. 케이티앤지상상마당 제공
둔춘주공아파트가 사라진다. 올해초 주민들이 완전히 이주하고 재건축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여느 재건축 아파트와는 좀 다른 분위기가 일었다. 이곳을 고향처럼 여기며 아쉬워하는 주민들이 유독 많았고,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두자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곳곳에 쌓인 추억을 담은 글과 사진을 모아 책을 냈고, 페이스북 페이지도 만들어 글·사진·영상을 꾸준히 올렸다.
25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집의 시간들>도 이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평소 누군가의 집을 찍는 ‘가정방문’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라야 감독이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프로젝트의 이인규 편집장과 협업한 것이다. 재건축이 확정되기 전인 2016년 5월 주민 10여명의 집을 방문해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하고 인터뷰를 했다. 카메라는 주민들 얼굴 대신 세월의 더께가 쌓인 집안 구석구석을 비춘다. 오래된 가족사진 액자, 벽에다 어릴 적 키를 표시한 흔적, 전등 스위치에 붙은 스티커 사진…. 그 위로 주민들 목소리가 깔린다.
영화 <집의 시간들> 장면. 케이티앤지상상마당 제공
이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재건축을 하면 녹물 나오고 툭하면 단수되고 겨울에 춥고 하는 불편함이 사라지고 집값도 오를 걸 알면서도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네살 때부터 이곳에서 자란 어떤 이는 결혼하고 시집에서 살다 친정 부모가 귀향하면서 여기로 돌아왔다. 추억 서린 물건, 가구 등을 보관하며 자기가 이 집에 살기 시작했을 무렵 또래의 딸을 키운다. 결혼해서 나간 옆집 언니도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온다. “어릴 때 우리가 뛰어놀던 곳에서 이제 애들이 함께 노는 걸 보면 기분이 묘해요.”
주민들이 하나같이 아쉬워하는 건 넓은 녹지와 커다란 나무들다. 주민들은 창밖으로 보이는 빽빽한 나무들 덕에 “콘도에 온 기분”이라고 말한다. 단지 안에 있는 2개의 야트막한 동산, 곳곳에 난 오솔길을 걸으면 산이나 공원 갈 필요를 못 느낀다. “이제 이사가면 다시는 이런 곳에서 못 살 거예요. 그게 너무 서운해요.” 아이들도 학교 친구이자 동네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지는 게 싫다. 저마다 풀어내는 추억과 재건축을 앞둔 심경은 ‘집이란 무엇인가’를 새삼 곱씹게 한다.
영화 <집의 시간들> 장면. 케이티앤지상상마당 제공
영화에는 길, 나무, 잔디밭, 놀이터 같은 단지 안 다양한 공간들도 담겼다. 내가 기억하는 거의 그대로다. 나는 군 입대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고, 제대 뒤엔 이사한 집으로 갔다. 지금 동네에서 산 지 15년이나 됐지만, 내 마음의 고향은 여전히 둔촌주공아파트다. 그곳이 사라지기 전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공식 이주기간이 끝나는 지난 1월 초등학교 3학년 딸을 데리고 둔촌주공아파트에 갔다. 거의 빈 동네는 적막했지만, 추억은 어디 가지 않았다. 내가 중학생 때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내리막길에서 딸은 바퀴 달린 신발을 탔다. 죽마고우가 유학길에 오르기 전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와 과자를 놓고 송별회를 했던 동산에도 함께 올랐다.
지난 1월 어릴 적 살던 둔촌주공아파트를 찾아간 기자가 예전에 살던 418동 앞에서 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살던 집을 찾아갔다. 낡아도 당당한 418동 아파트를 마주하는 순간 눈물 한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내 방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는 까까머리 소년의 환영을 봤다. 창문 앞 나무는 10층 아파트만큼 높아졌고, 소년은 아버지가 되어 딸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딸이 내 나이가 됐을 때도 고향처럼 여기는 집과 동네가 있을까? 영화를 보고는 딸에게 ‘집의 시간들’을 물려주고 싶어졌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