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캡틴 마블>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이름(바이라인) 보니 여자네, 기자가 페미×이구먼.”
얼마 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엠시유·MCU)의 최초 여성 히어로 솔로 영화인 <캡틴 마블> 리뷰를 쓰고 나서 졸지에 ‘페미니스트 인증’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 ‘강력한 페미니즘 서사’가 두드러진다고 평가한 것 때문인데요. 부지런한 누리꾼들은 기사에 댓글을 다는 것도 모자라 저에게 항의 메일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댓글과 메일을 보고 기분이 상했느냐고요? 아뇨, 사실은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페미니스트 인증’을 받을 만큼 여성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나를 반추하며, 앞으로 ‘무늬만 페미니스트’가 되어선 안 되겠다는 다짐도 했답니다.
안녕하세요? 문화부에서 영화를 담당하는 유선희입니다. <캡틴 마블>이 지난 6일 개봉한 지 9일 만에 350만 관객을 돌파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네요.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북미를 시작으로 한국에서도 ‘페미니즘 영화’라는 이유로 ‘평점 테러’를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습니다. 더불어 “이 영화는 강력한 페미니즘 영화”라고 말한 주연배우 브리 라슨 역시 ‘외모 비하’를 비롯해 온갖 수모를 당했다고 하네요. 일부 남성은 “페미 영화를 보지 말자”며 일종의 ‘관람 거부 운동’을 할 것처럼 겁박을 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페미니즘 논란’을 둘러싼 일부 남성의 ‘비토’가 이 영화의 흥행에 영향을 끼쳤을까요?
멀티플렉스 1위 사업자인 씨제이 씨지브이(CJ CGV) 리서치센터에 의뢰해 6~13일 <캡틴 마블>의 관객 분석을 해본 결과, <캡틴 마블>을 본 사람 중 남성의 비율은 47.4%였습니다. 이는 같은 기간 다른 영화의 남성 관객 비율(42.3%)은 물론 앞서 개봉한 마블의 또 다른 솔로 무비 <블랙 팬서>(45.7%), 심지어 마블 영화의 ‘정수’로 불리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46.5%)보다도 높은 수치입니다. 또 씨지브이 실관람객 평점지수인 ‘씨지브이 골든에그지수’를 봐도, <캡틴 마블>은 90% 정도로 <블랙 팬서>와 비슷한 수준의 호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페미니즘 영화”라며 비난을 퍼부은 남성이 실제론 ‘한줌’밖에 되지 않았거나, 앞에선 비난을 하면서도 뒤로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영화를 보러 간 남성 관객이 많았다는 뜻이 됩니다. 씨지브이 관계자는 “개봉 이후 박스오피스 1위를 굳건히 지키며 질주를 하는 것을 보면, 페미니즘 논란은 <캡틴 마블>의 흥행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며 “지금의 흥행 속도로 보자면, <블랙 팬서>(540만명)보다 조금 더 많은 550만~560만 정도의 성적을 거둘 것으로 예상한다”고 설명하더군요.
그렇다면 <캡틴 마블>의 ‘페미니즘 논란’이 끼친 사회적 영향도 전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은 이 영화가 ‘흥행’과 ‘정치적 올바름’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이자,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세계적으로 더 광범위한 관객들의 눈높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소수자’에게까지 눈을 돌리는 변화의 바람을 타고 있다는 증거라고 분석합니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 서사를 앞세운 ‘정치적 올바름’이 문화 상품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런 흐름은 미투운동 이후 두드러지기 시작했다”며 “디시(DC)의 <원더우먼>에 이어 마블 역시 흑인·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글로벌 시대에 다양한 관객층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며, 향후 세계 영화시장의 주된 흐름이 될 현상”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이런 흐름은 자라나는 세대들의 가치관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마블의 주요 관객층에는 20~30대는 물론 10대 청소년까지 폭넓게 자리하고 있으니까요. 10대인 두 딸을 데리고 <캡틴 마블>을 관람했다는 허기욱(44)씨는 “아이들이 교과서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영화를 통해 당당하고 주체적인 여성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더군요.
유명 연예인들이 여성의 몸을 불법 촬영한 동영상을 죄의식 없이 돌려보고, 피해 여성의 실명을 담은 지라시가 공공연히 유통되는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캡틴 마블>은 그저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한숨도 나옵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은 역설적이게도 왜 지금, 성차별적 현실에 맞설 페미니즘 히어로 영화가 필요한지를 방증하는 게 아닐까요?
유선희 대중문화팀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