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종려상을 그대 품안에…’ AFP 연합뉴스 제공
“그게 어떻게 시작된 거냐 하면 말이죠? 음….”
마치 오래 전 마음을 뒤흔들었던 첫사랑의 기억을 끄집어 내듯 설레는 표정이었다.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를 휘어잡은 ‘호호 콤비’의 시작은 과연 어디서부터였을까? 그 호기심을 풀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다.
29일 종로구 삼청동에서 만난 봉 감독은 “기존 언론 보도에서 틀린 부분도 있고 맞는 부분도 있다”고 전제한 뒤 아련한 표정으로 회상에 잠겼다.
‘봉준호-송강호, 호호콤비’는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 <기생충> 등 흥행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봉테일의 세계’를 함께 구축해왔다. 봉 감독은 배우 송강호에 대해 “나의 메시, 나의 호날두”라는 표현으로 깊은 애정과 감사를 표한 바 있다.
둘의 인연은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봉준호 감독은 장준환 감독과 함께 박기용 감독의 영화 <모텔 선인장>의 연출부로 일하고 있었다. “강호 선배가 그때 <초록물고기>에서 조폭 말단 조직원 ‘판수’ 역할로 장안의 화제를 뿌렸어요. 업계에서는 ‘실제 어디서 건달을 데려와 찍었다’는 낭설이 퍼질 정도였으니까요. 장준환 감독과 저는 둘 다 강호 선배의 연기에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정말 압권 아니냐’며 흥분했죠.”
봉 감독은 당시 상황을 자조적으로 회상했다. “내가 감독이었으면 저는 물론 장준환까지 둘 다 잘라 버렸을 것”이라며 “어리바리 하고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고 ‘내 영화 뭐 찍지?’에 골몰하던 때”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젊은 두 조감독의 눈에 송강호는 ‘보물 중의 보물’로 보였을 터다. 그래서 꾀를 냈다. 장준환 감독과 짜고 ‘사심’으로 오디션을 핑계 삼아 송강호를 만나자는 계획이었다.
“연극 하던 배우라는 단순한 정보만 있었어요. 강호 선배가 문을 열고 딱 들어오는 순간, 저는 커피 타고 장 감독은 의자 내 주고…. 하하하. 바로 접대에 들어갔죠. 멋진 분이었어요. 영화에 대해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눴어요. 당시 짙은 회색 양복을 입고 왔는데,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어요.” 봉 감독의 회상은 마치 연애담과 같이 흘렀다. ‘내가 어떻게 송강호를 만났느냐 하면 말이야~’가 ‘내가 첫사랑을 어떻게 만났느냐 하면’으로 자동전환 돼 들리는 순간이었다. 누가 봉테일 아니랄까 봐, 봉 감독은 그 때 송강호가 입고 있던 옷과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해내고 디테일하게 그려냈다.
‘호호콤비’가 이뤄낸 쾌거, 칸 황금종려상. AFP 연합뉴스 제공
하지만 캐스팅은 조감독이 아닌 감독의 ‘권한’인 법. 송강호는 박기용 감독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그때 봉 감독은 친하게 지냈던 배우 김뢰하가 줄기차게 했던 ‘충고’를 떠올렸다. “연극을 하는 배우들은 영화 오디션에 떨어지든 붙든 최종 결과를 알고 싶어한다는 거죠. 다른 연극 스케줄이 줄줄이 있는데, 영화 오디션은 붙으면 몰라도 떨어지면 연락을 안 해주니 답답하다고요. 그래서 예의를 갖춰 강호 선배에게 길고 긴 메시지를 남겼어요. 당시엔 삐삐라서 음성녹음으로 ‘블라블라~아쉽지만, 다음에 당신과 꼭 작업하고 싶다’는 내용을 담아서.”
봉 감독도 1999년 자신의 입봉작인 <플란다스의 개> 촬영에 돌입했다. 송강호는 비슷한 시기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을 촬영했고, 두 영화는 2000년 2월 2주 간격으로 개봉했다. 결과는 극과 극. <반칙왕>이 흥행 가도를 달린 것과 달리 <플란다스의 개>는 평단에서는 호평을 받았지만 흥행에선 쓴맛을 봤다. 그렇게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의 운명은 방향을 달리하는 듯했다. “당시 <넘버3>로 최고의 스타덤에 오른 강호 선배는 <반칙왕>마저 흥행에 성공해서 저로부터 멀~리 떠나가는 듯 보였어요.”
둘이 재회한 것은 2000년 연말 ‘디렉터스컷’ 행사장 입구에서였다. “입구에서 강호 선배님과 인사를 했어요. 그런데 <플란다스의 개>를 너무 재밌게 봤다고 하면서 어떤 대목에서 폭소를 터뜨렸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시는 거예요. 제가 당시 <살인의 추억>을 준비하던 중이라 시나리오를 강호 선배한테 드리고 싶다고 했죠. 나중에 <살인의 추억> 출연을 결정한 뒤에 강호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97년에 긴 음성 메시지를 받은 걸 좋은 기억으로 가지고 있었다’고요.”
첫사랑을 회상하듯 이야기를 마무리한 봉준호 감독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가 칸에서 받은 ‘황금종려상’을 마치 프러포즈하듯 무릎 꿇고 배우 송강호에게 바친 이유가 여기 있었다. 둘의 만남은 어떤 러브스토리보다 운명적이었으며, 극적이었고, 완벽했다.
유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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