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쇼팽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한 베트남 태생 피아니스트 당 타이 손은 시를 읊듯 감각적인 쇼팽을 연주한다. 2005년부터 쇼팽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이제 아시아 음악인이 서양권에 나가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1980년 쇼팽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한 피아니스트 당 타이 손(64·당타이선)은 최근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동서양 음악 장벽 붕괴론’을 폈다. “클릭 한번으로 넘쳐나는 음악과 자료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이다. 아시아 음악인들에겐 큰 기회다.”
그는 임윤찬과 조성진을 그 사례로 꼽았다. “올해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임윤찬은 완전히 한국에서만 공부한 경우 아닌가. 아시아인이 서양음악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사실 어려우며, 이제 서양권에 나가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지나갔다.” 2015년 한국인 최초로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에 대해선 “15살 때 부산의 마스터클래스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이미 훌륭한 음악가였다”고 떠올렸다. 지난해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중국계 캐나다 피아니스트 브루스 류(25)도 그의 제자다. 당 타이 손은 2005년부터 쇼팽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당 타이 손의 쇼팽 콩쿠르 우승은 당시 세계 음악계를 뒤흔들었다. 오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북베트남 태생의 청년이 우승하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겐 단 한번의 독주회나 협연 경험도 없었다.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그 자신이었다. 1위란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시상식장으로 향하지도 못한 채 호텔 방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결국 쇼팽콩쿠르협회 직원들이 “당신 없이는 행사를 진행할 수 없다”고 통사정한 끝에 이끌려 가다시피 시상식에 참여했다. 어찌나 허둥지둥했는지 상금 2000달러와 상장도 시상식장에 그대로 두고 나왔다가 다음날에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우승했다는 소식에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3년 만에 내한한 피아니스트 당 타이 손은 리사이틀 공연에서 쇼팽과 라벨, 드뷔시의 음악을 연주한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하노이에서 살던 그는 공습이 심해지자 70㎞ 떨어진 북쪽 시골로 피난을 갔다. 거기에 피아노가 있을 리 만무했다. 폭격을 피해 들어간 동굴 속에서도, 이부자리에서도 종이에 그린 건반으로 손가락 연습을 하곤 했다. 피아노를 치려면 하노이에서 악기를 싣고 와야 했는데, 모든 다리가 폭격으로 끊긴 상태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헤엄을 잘 치는 물소가 끄는 수레에 피아노를 싣고 강을 건너는 거였다. 물에 잠긴 피아노는 너덜너덜해졌지만, 수리해서 겨우 칠 정도는 되었다. 7살 때 시작된 고달픈 피난살이는 1972년 14살 때까지 이어졌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고난과 역경은 예술가에게 꼭 필요한 요소”라며 “눈물이 감각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예술성을 더욱 깊게 해줄 것”이라고 했다.
전쟁이 끝나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에게 발탁돼 모스크바 음악원에 유학할 수 있었다. 그는 늘 쇼팽을 연주했다. ‘숀팽’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는 “쇼팽과 나 사이에는 운명적인 연결이 있다. 쇼팽이 겪었던 고난과 역경, 조국에 대한 향수, 민족주의 등에서 나와 공통점이 있다”며 “머리와 의도가 아니라 감정과 감성으로 완성되는 게 쇼팽의 음악”이라고 했다.
당 타이 손 서울 예술의전당 리사이틀 포스터. 마스트미디어 제공
3년 만에 내한해 지난 16일 춘천에서 공연한 그는 19일 통영국제음악당, 2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리사이틀을 이어간다. 이번 리사이틀의 전반부는 드뷔시와 라벨의 프랑스 곡으로, 후반부는 쇼팽의 왈츠·마주르카·폴로네즈 같은 춤곡으로 꾸민다. 그는 “처음 건반을 만진 순간부터 프랑스 음악에 다가가는 걸 배웠는데, 첫 스승인 어머니가 프랑스에 유학한 프랑스 음악 스페셜리스트였다”며 “프랑스 음악은 그 색감과 빛부터 시적 요소로 가득하다”고 했다.
임석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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