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이후 처음 녹음하는 곡으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골랐다. 유니버설뮤직 제공
“베토벤이 꿈꾼 유토피아, 그가 바라본 우주를 청중에게 전하고 싶었어요.”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선택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였다. 그가 지난 6월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이후 처음으로 녹음한 작품이다. 임윤찬은 28일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베토벤의 협주곡 3번과 5번을 칠 때면 베토벤이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썼던 유서를 떠올리게 된다”고 했다. ‘황제’는 임윤찬이 광주시립교향악단(홍석원 지휘)과 함께 녹음한 앨범 <베토벤, 윤이상, 바버>에 담겼다. 지난달 8일 경남 통영 국제음악당 연주회 실황 음반이다. 유니버설뮤직이 세계적 권위의 클래식 레이블 ‘도이체 그라모폰’(DG)을 통해 이날 발매했다.
그가 처음부터 ‘황제’를 좋아한 건 아니었다. ‘너무 화려한 곡’이라고 생각해 1번과 3번, 4번 협주곡을 더 즐겨 연주했다. 하지만 생각이 변했다. “인류에게 큰 시련이 닥친 뒤에 이 곡을 연습하다 보니 그저 화려하고 자유로운 곡이 아니었어요. 이 곡에 대한 느낌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임윤찬이 이 음반에 참여한 건 지난해 광주시향 송년음악회가 계기였다. 이 연주회에서 임윤찬과 광주시향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했다. 밴 클라이번 콩쿠르 결선 무대에서 연주했던 바로 그 곡이다. 그날 지휘자 홍석원은 깜짝 놀랐다. “10대 소년의 질풍노도와 같은 엄청난 파워와 에너지였어요. 너무나도 잘 친다고 생각했죠.”
음반 녹음을 계획 중이던 홍석원은 즉석에서 참여를 제안했고, 임윤찬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홍석원은 이번에 베토벤 ‘황제’를 협연하면서 임윤찬의 변화무쌍함에 또 한번 놀랐다. “작년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3번 때와는 전혀 다른 색깔의 연주였어요. 특히 2악장을 눈물이 흐를 정도로 슬프고 애절하게 연주했습니다.” 그는 “임윤찬은 연주할 때마다 색채와 스타일이 바뀌는데 그때마다 다 설득력이 있다”며 “천재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고 감탄했다.
임윤찬은 실황 음반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누가 치는지 모를 정도로 무난한 연주가 나올 가능성이 큰 스튜디오 녹음이 아닌, 관객과 함께 나눈 시간을 담은 실황 음반으로 나온 게 의미가 깊다”고 했다. 이 앨범엔 임윤찬의 뜻에 따라 공연 당일 선보인 앙코르곡 3곡도 수록했다. 작곡가 페데리코 몸포우의 ‘정원의 소녀들’, 알렉산드르 스크랴빈의 ‘음악수첩’, ‘2개의 시곡’ 중 1번이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28일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광주시향 지휘자 홍석원에게 마이크를 건네고 있다. 임윤찬은 지난달 광주시향과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했고, 이를 실황 앨범으로 발매했다. 유니버설뮤직 제공
임윤찬은 밴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직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우승으로 인한 관심은 3개월이다.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콩쿠르에 나가 운 좋게 1등 한 게 대단한 업적은 아니죠.”
그가 생각하는 ‘대단한 업적’은 뭘까. “베토벤 소나타 전곡, 모차르트 소나타 전곡과 협주곡 27곡 전곡 등을 녹음하고 싶어요. 피아니스트로서 근본이 되는 일을 해야죠.” 그에겐 ‘대단한 피아니스트’라면 해야 할 또 다른 일들이 있었다. “만약 신이 있어서 저에게 악기를 연주할 기회가 주어진 거라면, 제가 할 일은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을 (공연장으로) 부르는 게 아니라 제가 그분들에게 가는 겁니다.”
그에겐 “보육원, 호스피스 병동 등 음악회를 찾기 어려운 분들이 있는 곳을 아무 조건 없이 직접 찾아가 음악을 들려드리는 일”이 대단한 연주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게 손민수 선생님 밑에서 배운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저도 그런 분들을 위해 연주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한다”고 했다. 그는 “음악을 사람들과 나누는 건 음악을 모르는 이들에게 또 다른 우주를 열어주는 과정”이라며 “이는 돈 이상의 가치를 매길 수 있다”고 말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광주시향과 협연한 앨범 <베토벤, 윤이상, 바버> 표지. 유니버설뮤직 제공
임윤찬은 새달 1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연다. 밴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을 기념하는 리사이틀이다. 그런데 지난 6월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곡은 한 곡도 없다. “콩쿠르 때 연주했던 곡들을 연주해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콩쿠르 때 연주했던 곡들을 다시 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걷는 통상적인 길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이날 캐나다 태생의 ‘특별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를 여러 차례 언급한 것도 이런 점에서 눈길을 끈다. 평소 존경하는 피아니스트로 스승 손민수와 함께 주저 없이 글렌 굴드를 꼽곤 했다.
그는 이번 리사이틀에서 작곡가 올랜도 기번스의 ‘솔즈베리경-파반 & 가야르드’를 연주하는데, 글렌 굴드가 존경하고 자주 연주했던 작곡가다. 두 번째 연주할 곡이 바흐의 ‘인벤션과 신포니아 중 15개의 3성 신포니아’(BWV 787~801). 1번부터 차례로 연주하지 않고 글렌 굴드가 잘츠부르크 축제에서 선보인 연주 순서를 그대로 따른다. 이어 프란츠 리스트의 ‘두 개의 전설’과 ‘단테를 읽고: 소나타풍의 환상곡’을 연주한다.
이번 앨범엔 윤이상이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때 희생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듬해 작곡한 ‘광주여 영원히’도 수록됐다. 광주시향 지휘자 홍석원은 “이 곡을 광주시향보다 더 훌륭하게 연주할 악단은 없다고 단언한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북한 국립교향악단과 일본 도쿄심포니오케스트라가 이 곡을 음반으로 발매했지만, 국내 교향악단이 녹음한 음반은 없었다. 홍석원은 “‘광주여 영원히’를 광주시향이, 작곡가 고향인 통영에서 연주하고 녹음한 것도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앨범에는 새무얼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도 있다. 홍석원은 이에 대해 “애도의 의미를 담아 수록했다”고 했다. 이 곡은 영화 <플래툰> 삽입곡으로 쓰여 대중적으로 유명해졌다.
임석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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