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오슝의 오래된 아파트. 2016.12. 펜,수채. 26×21㎝
두 달 전, 짝지와 함께 42일 동안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프랑스에서 자동차를 빌려, 시계방향으로 프랑스·룩셈부르크·벨기에·네덜란드·독일·체코·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이탈리아·스위스·프랑스 순으로 10개국을 돌아봤다.
여행을 다녀와서 나는 다시 심한 우울증으로 무기력해졌고, 개인상담을 받고 있으며, 만들어 놓은 드로잉 수업만 겨우 버티면서 진행하고 있다. 허우적거리느라 일상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아 많이 힘들다. <한겨레>에 연재할 원고도 미리 써놓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미루고 미루어 끙끙대며 겨우 써서 보내고 있다. 무기력이 심하다 보니, 차라리 이번 여행을 가지 않았었다면 다시 우울증 증상으로 고생하지 않고 일상드로잉도 예전처럼 즐겁게 하며 드로잉 수업도 재미있게 진행하고 있지 않았을까, 괜한 후회도 든다. 하지만 이번 여행이 아니었더라도 또 다른 계기를 만나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질 게 뻔하다. 그래도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나를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래야 그나마 숨이라도 쉴 수 있으니까.
해외여행에 대해서도 나는 별로 흥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굳이 비싼 돈 들여 외국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거기나 여기나 사람 사는 건 똑같은데, 뭐 하러 여행을? 이런저런 이유를 떠올리며 가지 않으려 했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그건 단순히 해외여행 울렁증인 셈이었다. 짝지와 함께 국내에선 짧게 여행을 다녔는데, 짝지랑 다니며 서로 장난도 치고 함께하는 것이 나름 재미있었다. 여행이 좋다기보다 함께 여행하는 사람으로 인해 여행이 좋아진 셈이다. 나는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숙소를 잡고 여행 일정을 꾸리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한데 그런 것들을 짝지가 능숙하게 하다 보니, 가까운 일본으로 첫 해외여행을 가기도 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를 좋아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이나 거리를 걷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그렇게 많이 걸어 다녔다. 우리는 먹을거리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어서 국내 여행할 때도 각 도시의 대표 음식을 찾아 먹기보다는 분식집이나 패스트푸드점 같은 곳을 즐겨 찾는 스타일이었다. 일본은 근처 아무 식당을 가더라도 우리 입맛과 잘 맞아서 매번 맛있게 잘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일본은 세 번 여행을 다녀왔는데, 후쿠오카, 나라, 그리고 교토에는 드로잉을 목적으로 여행을 했다.
직장을 다닐 때 좀 긴 여행을 하고 싶어서 혼인신고를 하고 그 핑계로 일주일간 대만에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여행을 갔던 첫날에 짝지가 발목을 접질려서 일주일 동안 쩔뚝거리며 돌아다녔는데,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이 걸을 필요 없는 여행으로 일정을 수정했다. 다른 사람들은 대만이 먹을거리 천국이라 하던데, 우리는 맛집을 찾아다니지 않다 보니 대만 음식들이 느끼하고 입에 맞지 않아 힘들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때에도 편의점 도시락만 즐겨 먹었다.
지난해 봄에 퇴사를 하고 퇴직금이 들어오자, 아무 생각 없이 짝지에게 ‘유럽여행 한번 가볼까요?’ 제안을 했고, 비행기 표는 몇 개월 전에 싸게 구입해 뒀었다. 42일의 긴 시간을 어떤 식으로 여행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 막막했는데, 단골 카페 사장님이 한 해 전에 가족끼리 캠핑카를 렌트해서 다녀왔다며 여행 기간이 길면 차를 빌리는 것이 이득일 것이라 조언해 주셨다. 우리 둘 다 40대이다 보니 고생하며 여행을 다니고 싶진 않아서, 그렇게 차를 빌리기로 결정했다. 차를 빌리면 많은 짐들을 차에 싣고 다닐 수 있으므로 전기밥솥과 한국 식재료와 반찬, 양념들도 챙겼다. 우린 가난한 부부였으니 식비를 줄일 생각으로 한국음식들을 캐리어 가득 채워 갔다. 빨간 라면, 흰 라면, 검정 라면. 라면들도 종류별로 넉넉히 가져갔다.
짝지는 20년 넘게 아이들 영어를 가르친 경력이 있다 보니 영어에 능숙했다. 반면 나는 영어 울렁증이 있었다. 오래 여행을 해본 적이 없던 내게, 42일의 여행 기간은 너무 긴 시간이었다. 중간에 여행에 지쳐 심드렁해지기도 하고, 37일째, 38일째엔 너무 심하게 무기력해져 숙소 방에서 유튜브만 들여다보며 기운 없이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아직 일상생활로 복귀하지 못했고 언제 복귀할지도 기약을 할 수 없지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42일간의 여행은 나에게 많은 경험과 추억을 남겼던 것 같다. 유럽의 풍경에 압도되기도 하고,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그들이 사는 작은 도시들을 들여다보면서 내 안에 적지 않은 것들이 쌓여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여행지에서 느꼈던, 꼼짝없이 감금되어버린 것만 같은 무기력의 순간까지도.
여행은 인간을 성장시킨다고 하는데,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아끼고 아껴, 긴 시간을 여행한 것치고는 많은 비용이 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전보다 더 심해진 우울증 증상으로 인해 후회가 되기도 하니까. 그래도 여행에 관해 기록하고 함께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떠났던 내가 있고, 여기 돌아온 내가 있기 때문이다. 여행으로 아무것도 얻은 게 없더라도, 그것이 여행이 아닐 리 없다.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무의미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앞으로 2~3회에 걸쳐 서툴고 우울한 나만의 여행에 관해 기록해볼까 한다.
어반스케치. 2016.12. 펜. 26×21㎝
드로잉 여행 출발. 2016.8. 펜, 수채. 13×21㎝
학문의신 소 조각물. 2017.7. 펜·붓펜·색연필·마카. 13×18㎝
항공사 여직원들. 2017.6. 펜·마카·색연필. 2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