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년 영국의 식민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싱가포르는 100년 만인 1900년대 초에 세계 6대 항구도시로 성장했다. 많은 상인과 이주민이 몰려들었고, 도시 당국은 전염병 차단에 고심해야 했다. 사진은 1930년대 싱가포르강의 전경. 위키미디어 코먼스
전염병 전파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다. 우선 환경적 요인으로 열대의 기후에, 전염병을 매개할 수 있는 다양한 동식물이 존재할 경우 창궐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여기에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주변 지역과의 왕래가 잦아질수록 역외의 전염병이 면역체계가 없는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급속하게 퍼진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근대 영국의 식민 항구도시인 싱가포르였다. 싱가포르는 1819년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래 대량의 중국인, 인도인 이주민들이 모여든 지역이었고, 유럽, 서아시아, 동북아시아, 남아시아, 아메리카 등 전세계의 상인, 관료, 학자, 탐험가 등이 드나드는 핵심 허브 도시였다. 1920년대를 기준으로 싱가포르항에는 전세계 최대 360곳이 넘는 항구도시에서 온 선박들이 줄지어 있었고, 당시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6번째로 큰 항구도시였다.
1819년 이전 1천명도 살지 않던 지역이 100년 만에 수십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거대 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은 새로운 근대도시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아무런 도시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지역이 밀려드는 인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해 전염병에 취약한 환경으로 변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급증한 인구밀도는 주거의 문제, 음식 보존의 문제, 가난, 기아 등을 유발하였고, 빈번한 전염병 창궐을 야기했다. 영국 식민정부와 거주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중국계 공동체는 도시 환경의 파괴와 노동력의 심각한 손실을 가져오는 전염병과 끝없이 싸워야 했다. 150여년에 이르는 식민시기 싱가포르의 역사는 다른 한편으로 전염병 대응의 역사이기도 하다.
1819년 동인도회사에 의해 점령된 싱가포르는 1786년 자유무역항으로 영국령이 된 페낭, 1824년 네덜란드와의 협정을 통해 넘겨받은 믈라카와 함께 1826년 해협식민지라는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재편되었고, 1942년 일본 점령기 전까지 자유무역항이자 직접지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 해협식민지 시기 싱가포르에는 콜레라, 천연두, 장티푸스, 성병, 이질, 말라리아, 결핵, 각기병, 폐렴, 십이지장충 등 다양한 질병들이 유행하였다.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중국계 이주민의 숫자가 급증하는 시기의 전염성 질병 발생 추이를 보면, 이와 같은 질병들이 전 시기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질병들은 열대지방 특유의 기후로부터 오는 전염병도 있었지만, 유럽인들이 가져온 것과 중국 푸젠, 광둥 출신 중국인들이 가져온 전염병들도 있었다. 그 외에 서아시아에서 발생한 전염병이 유행하기도 했다. 식민시기 싱가포르인들의 삶에서 전염병은 매우 ‘일상적인’ 요소였고, 식민지 정부에 의한 방역과 의료체계의 형성 역시 행정체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고려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보건의료적인 측면에서 영국령 싱가포르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끊임없이 밀려들어 오는 중국계 이민자들이었다.
싱가포르의 세인트존스섬은 해변이 아름다운 휴양지로 유명하다. 싱가포르 식민당국은 이 섬에 전염병 환자를 격리 치료하는 시설을 만들었다. 존 에드먼드 테일러가 1879년에 그린 세인트존스섬의 격리시설. 위키미디어 코먼스
중국인들의 동남아시아 이주는 19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절정에 달한다. 여기에는 이 시기 청 제국 내부의 각종 반란과 관료들의 수탈, 아편전쟁 이후 서구 세계와의 잦은 접촉으로 자국민의 해외 이민을 서구식 국민국가의 관점으로 접근하기 시작한 청 제국 관료들의 인식 변화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무엇보다 제도적으로 이전까지 외국으로 이동을 금지했던 상황이 변하여 1896년 해외여행을 자유화한 것, 1877년 싱가포르에 영사를 파견하여 이민자들을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통계에 따르면 1871년 5만에 불과하던 싱가포르의 중국계 이주민 인구가 1911년 20만, 1921년 30만, 1931년 40만으로 급증한다. 당시 싱가포르 전체 인구의 70~80%에 이르는 숫자였다. 문제는 이들이 주로 싱가포르 도시의 하층민으로 극빈층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대부분 기아와 가난, 비위생의 상태에 처해 있어 이들의 주거지역에 질병이 쉽게 돌았기에 각종 전염병 전파의 온상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또 아편중독과 각종 범죄에도 쉽게 노출돼 사회적 병폐로 인식되기도 했다.
지금도 싱가포르의 관영 언론매체로 유명한 <스트레이츠 타임스>(Straits Times)의 1845년 9월23일 기사를 보면 이러한 문제가 일찍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당 기사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지 및 보건의료적 조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빈민지역이 범죄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약 3만6천명의 중국계 거주민들 가운데 3분의 1이 삶을 영위할 수단이 없고, 6천명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데다 연간 100명이 넘는 이들이 굶주림으로 사망한다는 점을 밝히면서 그 비참함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19세기 식민정부의 기조는 하층민인 중국계들을 위한 병원은 부유한 중국계 상인(華商)들이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 1821년 세워진 최초의 빈민병원은 거의 대부분 중국계 상인들의 세금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1847년 푸젠계 거부인 탄톡셍(Tan Tok Seng)이 세운 탄톡셍병원은 빈민병원으로 시작하여 지금도 싱가포르에서 가장 유명한 종합병원으로 보건의료의 중요한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빈민병원은 결과적으로 그리 큰 효과를 보지 못했는데, 당시 중국에서 막 건너온 중국계 이주민들의 서구식 의료체계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계 이주민들은 가족들과 격리시켜서 외과적 시술을 하고, 알 수도 없는 약을 처방하는 서구식 의료활동을 기피했다. 대신 이들은 서구인들의 눈에는 매우 미신적이고 비위생적으로 보이는 전통적 의료 관행에 따라 자체적으로 치료하였다.
탄톡셍병원 전경. 탄톡셍병원은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병원 가운데 하나다. 현재는 난양공대 의과대학의 수련병원이기도 하다. 위키미디어 코스
미들턴병원 정문의 모습. 전염병 감염자를 격리하기 위해 설립된 미들턴병원의 시작은 1907년 격리 캠프이고, 이후 1920년 미들턴병원으로 개칭되었다. 1985년 탄톡셍병원과 합병하면서 전염병센터(CDC: Communicable Disease Centre)가 되었다가 2018년 보건부 산하 국립감염병센터(NCID: National Centre for Infectious Diseases)로 확대 개편되어 싱가포르 감염병 예방의 헤드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 국립기록관
영국 식민정부는 19세기까지만 해도 이러한 중국 이주민 공동체의 내부 상황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오직 유럽인들이나 비유럽계 가운데 군인, 경찰, 행정관료로 유용한 인도인들만을 대상으로 의료행위를 행하던 영국 식민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변화하게 되는 것은 20세기 들어 급증한 중국계 이주민들 때문이었다. 1900년대 초 각기병, 성병,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이 매년 평균 수천건 발생하였고, 1900년에서 1920년까지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만 2693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통계는 병원 등 공식 보건의료 시설에서만 집계한 숫자였다. 서구식 의료체계를 불신하는 일반 주민들을 고려하면 실질적 감염자 수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식민정부는 백신을 적극적으로 보급하거나, 구역마다 외래진료소를 설치하여 좀 더 적극적으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였고,
현지인들을 치료할 수 있는 각종 병원 및 전염병 격리시설을 설립하는 등의 정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미들턴 병원’(Middleton Hospital)은 이때 만들어진 싱가포르 최초의 전염병 격리시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더욱 적극적인
예방을 위해 항구에서부터 모든 방문객을 검역하여 격리하는 선제적 방역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1902년 항만 검역관과 부속 조직을 설치한 것이 그 시작이다.
“만일 항구에 도착한 뒤 12시간 내에 사망자가 발생할 경우, 그리고 선내에 의사가 없을 경우에는 시체를 검역관이 볼 수 있도록 보존해야 함. 만일 항구에 정박해 있는 동안 전염병 케이스가 발생하면 항만 검역관에게 바로 신고해야 함. 정박하면 선원들과 승객들을 질서정연하게 모아서 줄을 세울 것. 그리고 건강 증명서, 선원 명단, 승객 명단, 선적 화물의 목록 등 모든 서류가 준비되어야 함. 항구에 도착한 상황에서 배가 더럽거나 비위생적일 경우 고소 대상임. 해협식민지의 시민이 아닌 중국 및 인도 출신 승객은 최근에 백신을 맞았다는 정당한 증빙이 없을 경우 추방의 대상임. 감염된 선박의 경우 역시 검역의 대상임. 검역에는 일정 비용이 소요. 항만 검역관의 근무시간은 평일 9시30분에서 5시까지, 토요일 9시30분에서 1시, 일요일 및 공휴일 10시에서 12시임.”
항만검역관은 1902년부터 매년 싱가포르를 포함한 해협식민지의 보건의료 관련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개별 병원의 상황, 전염성 질병의 전파 상황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사진은 1904년 보고서의 일부.
이는 1914년 항만 검역관이 싱가포르항에 방문하는 각 선박의 선장들에게 공지한 대응 매뉴얼의 일부다. 이 매뉴얼에 따라 1902년에서 1925년까지 항만 검역관에 의해 검역이 실시된 선박만 3만4181척이고, 승객과 선원 포함 총 896만여명을 대상으로 검역을 실시하였다. 연도별 선원과 승객의 수가 매년 전체 싱가포르 인구와 비슷하거나 훨씬 많아 당시 싱가포르의 인구 유동성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유동성의 절대다수는 홍콩, 샤먼, 광저우, 산터우 등 중국에서 오는 이민자들이었다. 1923년 기준 싱가포르에 방문하여 검역을 거친 승객 25만 가운데 16만이 중국계 이민자였다. 그런 이유로 싱가포르 역내의 전염병 창궐은 중국에서 오는 승객들이 감염원인 경우가 많았는데, 1903년 3월부터 10월까지 홍콩과 샤먼에서 페스트가 극성에 이르자 식민정부가 이 두 도시에서 오는 이민자들의 입국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콜레라 역시 주로 중국에서 온 선박이 감염원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당시 항만 검역관의 보고서를 보면, 도착하는 항구에서 검역하기보다 입항 승객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국계 이주민들이 출발하는 중국의 항구에다가 창고를 마련하여 위생점검, 검역, 백신 접종을 선제적으로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항만 검역관에 의해 감염자로 판단된 이주민들은 싱가포르섬 남쪽 맞은편에 위치한 세인트존스섬의 격리시설에 보내졌다. 통계에 따르면, 1903년에서 1925년까지 총 77만5135명의 감염자가 세인트존스섬의 격리시설에 수용되었다. 이 격리시설의 유지와 운영에는 중국계 공동체의 도움이 컸는데, 식민정부 산하 중국계 지도층 모임인 중국자문위원회가 수십명의 중국인 인력과 각종 물자를 지원해주었다.
싱가포르의 중국계 상인들은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하층 노동자들을 위해 자선의료기관을 설립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동제의원(同濟醫院, Thong Chai Medical Institution)이다. 1867년에 설립된 최초의 한의학 자선병원으로 인종과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거주민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었다. 사진은 1892년에 세워진 의료원 건물이고, 이 동제의원은 지금도 진료를 이어가고 있다. 위키피디아
1890년대로 추정되는 사진으로 당시 동제의원에서 진료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중국계 환자들의 모습. 싱가포르 국립기록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밀려드는 이민자들, 그리고 함께 들어오는 전염병을 관리하기 위해 식민정부와 중국계 공동체가 마련한 시스템의 흔적들은 현재 싱가포르 방역 시스템 곳곳에서 발견된다. 최근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싱가포르의 주요 의료시설인 공공병원 중 급성병원으로 분류되는 9개 종합병원 가운데 5곳이 식민시기에 지어진 병원이다. 그리고 1907년 전염병 환자를 격리하기 위해 지어진 시설이 1920년 미들턴병원으로 개칭되었는데, 이 미들턴병원이 현재 코로나 사태를 맞아 싱가포르 방역의 헤드쿼터 구실을 하는 보건부 산하 국립감염병센터의 전신이다. 1905년 급증하는 전염병과 질병을 치료하는 의료인력을 양성할 목적으로 탄지악킴(Tan Jiak Kim)을 비롯하여 싱가포르의 중국계 상인들이 출자하여 설립한 ‘해협식민지와 말레이 연방정부 부설 의료학교’는 현재 싱가포르국립대학 용루린의과대학의 전신이다. 무엇보다 20세기 초중반에 방문 선박에 대한 선제적 검역과 감염자의 격리 및 치료로 이어지는 근대적 방역 시스템을 일찍부터 경험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국이 동남아시아에 남긴 유산은 다양했다. 가장 두드러지는 유산 가운데 하나는 중국계와 인도계로 대표되는 대량의 이주민 그룹의 존재와, 수백만명에 이르는 이주민들을 어떻게든 관리하고 통제하려 한 제국의 제도, 인프라, 그리고 축적된 경험이다. 상당수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바로 이 제국의 노하우를 직간접적으로 이어받은 측면이 있다. 20세기 초 밀려드는 중국계 이주민들을 의료보건의 차원에서 관리하기 위해 식민정부와 중국계 공동체가 마련한 인프라와 노하우는 그대로 독립 이후 공화국 시기 싱가포르 방역 관련 제도의 핵심으로 작용하고 있다.
김종호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는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아시아 지역연구의 새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위해 40년간 지역연구에 매진해왔다. 동남아시아의 경제·사회·문화적 중요성이 커진 신남방 시대, 연구소는 그동안 연구 성과에 바탕을 두어 멀지만 가까운 이웃 동남아의 다양한 면모를 전한다. 랜선 여행을 하듯이 흥미롭게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