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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인형극으로 유희문화를 꽃피운 호모 루덴스

등록 2022-01-28 10:06수정 2022-01-28 10:16

랜선 동남아 인형극의 세계

와양 쿨릿 등 다양한 인형극
이야기와 음악·춤의 종합예술
궁중 암투, 왕의 치적 다루며
풍자와 해학으로 즐거움 선사
베트남의 수상인형극. 위키미디어 코먼스
베트남의 수상인형극. 위키미디어 코먼스

네덜란드의 역사가이자 철학자 요한 하위징아(1872~1945)는 유희가 인간의 본질 중 하나라면서 호모 루덴스라는 개념을 주창했다. ‘놀이하는 인간’이란 어쩌면 사람들이 잊고 있었던, 혹은 생각하지 않았던 가장 중요한 본성인지도 모른다. 그가 말한 호모 루덴스는 단순히 노는 것 이상의 정신적 창조 행위를 내포하는 말이다.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면 어느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있고, 어디에서도 유희하는 인간을 찾을 수 있지만 동남아도 예외가 아니다.

입체 인형 ‘와양 골렉’. 강희정 제공
입체 인형 ‘와양 골렉’. 강희정 제공

이데아의 그림자

동남아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양한 형태의 공연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캄보디아의 압사라 댄스나 인도네시아 발리의 케착 댄스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공연 방식과 춤사위는 아주 다르지만 둘 다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에서 그 내용을 따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마왕 라바나에게 부인 시타를 빼앗긴 라마가 원숭이 신 하누만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승리하고, 부인을 되찾는다는 ‘라마야나’는 인도에서 동남아로 전해진 뒤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줄거리가 바뀌기도 하고, 결론이 바뀌기도 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변하면서 동남아 전역에서 공연됐다. 어떤 의미에서는 ‘라마야나’야말로 가장 지역 친화적인 공연예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압사라 댄스나 케착 댄스는 사람들이 직접 춤춘다는 면에서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의 오광대놀이나 북청사자춤, 하회탈춤과 별 차이가 없는 연희이다. 그런데 동남아에서 이 못지않게 발달한 게 인형극이다.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를 끈 것은 흔히 와양이라고 알려진 인도네시아의 그림자극이고, 그 외에 미얀마의 요욱떼(욧떼), 베트남의 수상인형극 무아 조이(로이) 느억 등 동남아시아에는 다종다양한 인형극이 있다. 인형극을 즐길 수 있었던 사람은 역사적으로 소수의 왕실, 귀족,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었겠지만 이런 관람객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인형을 만들고 대본을 만들고, 공연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며 창작에 몰두한 이들이야말로 호모 루덴스의 생생한 예라 할 수 있다.

비단 동남아를 여행한 사람이 아니라도 일본이나 유럽, 혹은 미국 박물관 등지에서 와양을 접한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한번 보면 잊어버리기 쉽지 않은 게 와양 쿨릿이다. 아주 특색 있는 생김새의 평면 인형인데다가 아래에 긴 막대기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형 자체가 어떻게 생겼는지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와양 쿨릿은 그림자 인형극이니, 호사스럽게 색을 칠하거나 있는 대로 모양을 내도 관람객이 보는 것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게 원래 그림자극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어쩐지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인간이 보는 세상 만물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고, 우리가 보는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했던 플라톤의 말이 떠오르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와양의 그림자보다는 그 실체가 훨씬 호사스러운 걸 보면 이데아가 그림자보다 아름다우리라는 환상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와양 쿨릿은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공연되는 인형 그림자극이고, 와양 자체가 자바어로 ‘그림자’를 뜻한다. 이를 조종하는 사람은 ‘달랑’이라 부른다. 달랑은 인형을 조종할 뿐 아니라 전체 인형극을 연출하고, 일종의 변사로 대사도 한다. 인형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개성을 살려 목소리를 계속 바꿔가며 공연을 해야 하니 와양 쿨릿의 성패는 달랑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 10세기부터 왕의 생일이나 마을의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에 밤새 공연을 했는데, 그림자극이니만치 어두워질 무렵에 시작해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지속했다고 한다. 인형은 주로 물소 가죽으로 만드는데 가죽을 무두질해서 고르게 펴고 말리고, 염색하는 과정을 여러번 거쳐야 하므로 인형 제작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공연할 때는 하얀 무대 스크린을 펴고 뒤편에서 빛을 비추어 그림자가 무대에 잘 보이도록 한다. 막대를 이용해 인형을 움직이기도 하고 무대에서 멀리, 또 가까이 왔다 갔다 함으로써 그림자가 크게도, 작게도 비친다. 납작한 와양으로 무대에 거리감을 주는 방식이다.

평면 인형 ‘와양 쿨릿’. 강희정 제공
평면 인형 ‘와양 쿨릿’. 강희정 제공

유럽 인형극 부흥운동에 영향

얇고 판판한 평면 인형인 와양 쿨릿과 달리 와양 골렉은 완전한 입체 인형이다. 꼭두각시 같은 인형에 얇은 막대를 붙여 움직인다. 나무를 깎아서 얼굴과 몸통, 사지를 다 따로 만들어 이어붙여 움직임이 상당히 정교하다. 바틱으로 만든 화려한 인도네시아 전통의상을 입히고, 각종 장신구와 섬세한 치장을 해서 만인의 시선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장식도 장식이지만 얼굴이 아주 작은데도 들여다보면 섬뜩할 정도로 특징적이다. 인형마다 어찌나 개성이 뚜렷한지 얼굴만 봐도 극 중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짐작이 갈 정도이다. 이 역시 자바와 발리에서 공연되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인형극인데 원래는 뮤지컬 형식이었다고 한다. 동남아 대부분의 인형극이 그렇듯이 와양 공연 역시 내내 악단이 반주한다. 인도네시아 전통악기 가믈란으로 구성된 악단이 그때그때 공연 내용에 맞춘 곡을 연주한다. 통상 9시간 걸리는 공연이니 가믈란 연주자들도 같은 시간 동안 꼬박 앉아서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긴박감 넘치게 연주를 해야 한다. 달랑이나 악단이나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 것이다.

와양 쿨릿이나 와양 골렉 모두 인도 서사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주로 공연한다. 특히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판다바 오형제의 용맹한 전투 이야기가 인기 높았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신화나 전설, 역사 속의 이야기들도 종종 인형극으로 각색되었는데 궁중 암투나 영웅, 왕의 치적도 단골 소재로 채용되었다. 와양의 기원이 남인도에 있다는 설과 중국에 있다는 설이 있는데 인도의 서사시 공연이 많은 것을 보면 그림자극 자체의 기원은 인도로 보인다. 이를 드라마틱하게 각색하고 가공한 것은 자바였지만 말이다. 와양 인형극은 이야기와 음악, 때로는 춤이 어우러진 자바인의 종합예술이며, 오랜 세월 자바인들에게 기쁨을 안겨준 유희문화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와양은 서양 인형극에도 영향을 미쳤다. 네덜란드에서 자바의 와양 골렉을 처음 접하고 감명을 받은 리하르트 테슈너(1879~1948)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와 ‘피구렌 슈피겔’이라는 인형극 극장을 열었다. 와양 골렉처럼 막대로 움직이는 인형이었다. 그는 자바 인형극의 인물을 변형시켜 새로운 인물들을 창조하여 인기를 끌었고, 유럽에서 인형극 부흥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유럽 인형극의 대중적인 확산에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미얀마의 인형극 요욱떼(욧떼). 강희정 제공
미얀마의 인형극 요욱떼(욧떼). 강희정 제공

미얀마에서도 일찍부터 인형극이 발달했다. 생김새와 만드는 법, 조작법은 다 다르지만 꼭두각시 인형극이라는 점은 같다. 미얀마를 돌아다니다 보면 기념품 상점에서 비교적 쉽게 꼭두각시들을 만날 수 있다. 요욱떼라 부르는 미얀마의 꼭두각시 인형극도 다른 나라처럼 ‘라마야나’를 주로 공연한다. 그렇지만 불교 국가답게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인 자타카나 민담이 공연 주제가 되기도 한다. 워낙 낫이라고 부르는 민간 토속신이 많은 나라이니 그만큼 전설과 신화도 많을 터, 공연의 소재는 무궁무진했을 것이다.

요욱떼도 11세기께 발생한 전통극 쁘웨에 기원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확인되는 것은 15세기에 승려 라따사라가 남긴 기록이 최초이다. 적어도 요욱떼가 18세기에 집대성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꼰바웅 왕조의 제4대 왕 싱우 민이 왕립문화부를 세우고 인형극을 장려하면서 더욱 발전했다. 이때 엄격하게 규율을 정했고, 28개 인형이 등장하는 것으로 정형화됐다. 한국 관광객이 많이 가는 도시들, 바간, 만달레이, 바고, 양곤 등지에는 어김없이 인형극 극장이 있고, 저마다 숙련된 예인들이 공연을 펼친다. 인형을 움직이는 방식은 긴 줄을 인형 사지에 연결해서 위에서 줄을 조종하는 것이니 피노키오를 생각하면 딱 맞는다. 하지만 인형의 인물 생김새, 옷, 모자와 머리 장식은 딱 미얀마식이다. 인형의 움직임은 관절과 연결한 줄에 달려 있다. 인체랑 비슷하게 나무로 깎아 만든 팔, 다리, 손목, 발목 등의 관절마다 줄을 연결하면 할수록 훨씬 정교하고 섬세한 동작이 가능해진다. 인형마다 배역이 정해져 있고, 배역마다 줄거리에 따라 하는 역할이 있으니 그에 맞춰 동작을 미리 짐작해서 줄을 연결해야 한다. 실로 꼼꼼한 계획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공연도 공연이지만 배역에 따라 인형을 만들고, 줄과 소도구를 연결하는 것까지 세심한 작업이 요구되니 요욱떼의 전승도 쉽지 않은 일이다.

미얀마의 바간 기념품 상점에서 파는 요욱떼(욧떼). 강희정 제공
미얀마의 바간 기념품 상점에서 파는 요욱떼(욧떼). 강희정 제공

논에서 시작한 수상인형극

베트남의 수상인형극 무아 조이 느억은 베트남 북부 홍강 삼각주에서 시작됐다. 입체 인형으로 공연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나 앞의 인형극과는 좀 다르다. 사람들이 아예 물속에 들어가 대나무와 실로 연결된 인형들을 움직여 공연을 펼치는 특이한 방식이라서 관광객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 있다. 다른 공연처럼 베트남 전통악기가 연주되는데 인도네시아나 미얀마와 달리 음률과 곡조가 중국이나 우리나라 음악과 꽤 비슷해서 베트남 특유의 분위기가 산다. 애초에 농민들이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서로 나누기 위해 연못이나 호수에서 공연하기 시작했고, 그 내용 역시 악귀로부터 마을과 농사일을 보호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민담이나 전설이었다고 한다. 시대 비판적인 내용도 담았다. 정치나 사회문제를 풍자하는 대사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관광객을 주 대상으로 공연하다 보니 독설과 해학은 어디론가 증발했다. 같은 농업국가인 우리나라에서도 농번기의 고통을 수확의 기쁨으로 참아내고, 관리들의 횡포는 마당극으로 풀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베트남의 수상인형극은 그 발생 배경과 내용이 우리네 연희랑 비슷하다. 물에서 공연한다는 큰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물이 많은 베트남의 논에서 공연하기 시작한 게 수상극의 기원이라고 하는데 논이나 호수가 아니면, 일정한 너비와 깊이를 지닌 물탱크 설비를 해야 인형극이 가능하기에 나름 공연 장소의 제약을 받는다. 베트남 북부에서 발전한 인형극이라 수상인형극 전용극장도 주로 하노이에 있는데 1969년에 세워진 호안끼엠호 인근의 탕롱 수상인형극장이 가장 유명하다. 현재는 베트남에서만 볼 수 있는 수상인형극이지만 계속 전승자가 줄어들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다고 한다. 기로에 선 전통이다.

강희정 서강대 동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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