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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학술

케테 콜비츠, 모성애 넘어 인류의 고통과 아픔을 끌어안다

등록 2021-07-17 11:23수정 2021-08-03 16:35

[토요판]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46) 케테 콜비츠(1867~1945)

예술가 이전 사회주의자의 삶
선전미술 아닌 진실 추구 일관
비싼 유화 대신 대중 판화 집중

아들과 손자 전쟁에 잃은 뒤
비탄에 젖은 여인상 형상화
1930년 무렵의 케테 콜비츠. 위키미디어 코먼스
1930년 무렵의 케테 콜비츠. 위키미디어 코먼스

콜비츠미술관을 찾았을 때의 감동만큼 미술관 방문길에서 맛보는 뜻깊은 추억은 다시없다. 콜비츠는 유수한 세계의 미술관에 걸린, 비싼 값이 매겨진 그림을 그린 화가도 아니다. 그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는 도시의 골목 어귀에 자리잡은 작은 미술관을 물어물어 찾아가야 한다. 베를린이나 쾰른의 콜비츠미술관도 그렇다. 그가 남긴 기념비적인 조각들은 허물어진 교회의 폐허나 허름한 마을교회 또는 무덤 옆에 있다. 그 대도시 교회들은 허물어진 채로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그 속의 조각상은 미술관에 박제되어 굳어버린 유물이 아니다. 폐허 속에 폐허의 일부가 된 그 조각은 이미 돌조각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 폭격을 맞고 죽어가는 사람, 바로 그들이다. 대부분 동독지역에 있었던 그의 그림과 조각을 통일 이후 온전히 볼 수 있게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멀다.

사회주의자 남편과 평생 빈민촌 거주

콜비츠는 1867년 쾨니히스베르크(현 칼리닌그라드. 러시아 영토)의 사회주의자 미장이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여성은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존재로만 받아들여졌다. 유럽에서도 후진이었고 비민주적이었던 독일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은 3K, 즉 교회(Kirche), 요리(Küche), 아이(Kind)를 담당하는 인간으로 취급되었다. 콜비츠가 태어난 19세기 후반 가정에서 여성의 지위는 더욱 낮아서 남편에게 철저히 종속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콜비츠가 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진보적인 아버지 덕이었다. 아버지는 법학을 공부했지만, 판·검사 되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미장이를 선택한 특이한 사람이었다. 콜비츠의 오빠는 뒤에 영국 런던에서 엥겔스와 교류한 사회주의자였다.

콜비츠는 당시 우수성을 인정받은 관립 미술학교에는 입학할 수 없어서 여자미술학교에 다녀야 했다. 다행히도 훌륭한 스승을 만나 사회의식에 눈떠 판화를 배웠다. 판화에 열중한 이유는 명백하다. 유화는 값이 비싸 부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기 때문이다. 1891년 이후 콜비츠는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남편은 당시 독일에서 세계 최초로 시행된 의료보험제도의 선구인 의료보험공단에 속한 의사로, 그 또한 사회주의자였다. 부부는 베를린의 빈민촌에서 평생을 두고 빈민을 위해 일했다. 남편은 가난한 이들을 치료하고 부인은 그들을 그렸다. “구제받을 길 없는 사람들, 상담도 변호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 시대 사람들을 위해 한 가닥의 책임과 역할을 담당하려 한다.”

콜비츠가 하웁트만의 자연주의 희곡인 <직조공>(1844년 슐레지엔 삼베노동자들의 봉기를 다룸)을 1894년부터 4년간 판화로 제작한 <방직공의 봉기>와 1905년부터 그린 16세기 독일농민전쟁, 프랑스의 탄광소요 장면을 그린 판화 등은 제작 당시는 물론이고 그 뒤에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루쉰이 그를 절찬했다. 그러나 콜비츠 자신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의식했다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선전미술로 그 그림들을 그린 것이 아니었다. 콜비츠 판화의 미적인 우수함은 빼어난 소묘력에 있다. 그 소묘의 뛰어남은 단순한 숙련이 아니라 대상의 참된 이미지를 최소한의 선으로 표현하는 힘과 진실을 추구하는 예리한 눈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 뒤 사회적 주제를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표현했고, 특히 빈민 모자나 과부를 즐겨 그리고 조각했다.

콜비츠는 1차 세계대전 후 1919년에 프로이센(프러시아) 예술아카데미의 최초 여성 회원이 될 정도로 인정을 받았고, 특히 당시의 진보적 입장을 대변하여 반전화를 주로 그렸다. 이들 반전화는 1차 대전에서 전사한 아들 페터를 그린 작품도 포함된다. 1924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중부독일 사회주의 노동운동 청소년 대회를 위해 대형 석판화로 제작한 것이 <전쟁은 이제 그만>이다. 콜비츠의 첫 포스터인 이 작품은 전쟁으로 인해 얼굴은 앙상해지고, 숱이 빠진 채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한 사람이 팔을 들고 제목과 같은 비명을 절규하는 작품이다. 이어 같은 해 <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와 <빵을!>을 포스터용으로 그렸다. 그러나 어느 작품이나 단순한 선전이라기보다 완벽한 예술작품으로서의 감동을 준다.

케테 콜비츠가 1924년에 제작한 석판화 &lt;전쟁은 이제 그만&gt;. 위키아트
케테 콜비츠가 1924년에 제작한 석판화 <전쟁은 이제 그만>. 위키아트

나치로부터 탄압받아

1926년에는 ‘실업’, ‘기아’, ‘자식의 죽음’으로 구성된 목판화 연작 <프롤레타리아>를 그렸다. 이어 1932년 벨기에 로게펠데의 군인 평화묘지와 블라드슬로 브라드보스의 군인묘지에 위령비로 세워진 ‘아버지’와 ‘어머니’를 조각했다. 주문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작되지 않은 이 작품들은 지금 쾰른에 있는 성당의 폐허에도 세워져 있다. 1933년 콜비츠가 나치에 저항함으로써 일체의 전시가 금지되었다. 당시의 탄압 대상자 중에서도 콜비츠는 소설가 하인리히 만과 함께 대표적인 반나치 예술가로 지목되었다. 그 두 사람은 아카데미를 함께 탈퇴했다. 그 후 콜비츠는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 죽음의 그림들은 종교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역시 전쟁의 상처로 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2차 대전 중인 1942년 끔찍이도 사랑한 손자가 전사하자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를 그렸다. 괴테의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한 대목을 제명으로 삼은 이 작품은 공포에 질린 세 아이를 굳게 품에 보듬어 안은 여인을 형상화해 다시는 아이들을 전쟁에서 죽게 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콜비츠는 제1차 대전에서 아들을, 제2차 대전에서 손자를 잃었다. 그가 그린 모든 반전화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기에 다른 어떤 그림보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까? 그녀의 그림은 전쟁의 잔인성에 대해 어머니이자 할머니이고 아내인 여성의 강력한 항의이기에 우리에게 진실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까? 그녀가 어머니로서, 어머니이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했고 그런 입장을 작품에 표현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리라. 또한 ‘어머니=평화’라고 하는 암묵적 전제 역시 의심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아들을 깊이 사랑하면서도 전쟁을 긍정한 어머니들도 콜비츠와 같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콜비츠는 아들 페터가 전쟁에 자원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아들은 굳이 전쟁터에 나가 전사했다. 콜비츠의 당시 일기를 보면 그 역시 조국애로 인해 전쟁에 대한 반대 신념이 흔들리는 모순된 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확고한 신념으로 반전화를 그렸다고 과장할 필요는 없다.

베를린의 ‘전쟁과 독재 희생자 추모센터’(노이에바헤)에 전시돼 있는 피에타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베를린의 ‘전쟁과 독재 희생자 추모센터’(노이에바헤)에 전시돼 있는 피에타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아이 죽음의 슬픔에 매몰되지 않아

그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급격히 대두된 페미니즘운동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음을 우리는 일기나 전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페미니스트들 가운데서는 여성의 사회참여, 참정권 확보 등을 주장하면서도 모성을 여성의 천직이라고 본 이들이 있었다. 특히 제1차 대전에서는 전시에 필요하게 된 사회복지사업이 모성이라는 특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으며, 이에 많은 여성들이 전쟁을 벌이는 조국에 적극 봉사했다. 이 때문에 당시 페미니즘이 나치스의 인종주의적 모성 이데올로기와 협력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우수한 독일 민족의 혈통을 받아 자손을 늘리자는 나치스의 정책은 백인종 중심의 모성 이데올로기를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콜비츠 역시 그런 ‘모성’에 빠졌음을 우리는 일기를 통해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존재를 자식이나 손자의 미화된 죽음과 동일화하지는 않았기에 모성에 매몰되지 않았고, 자신이 지닌 고유의 가치를 스스로 긍정할 수 있었다. 콜비츠의 어머니 그림은 단순히 모성을 예찬하거나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을 묘사한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롭게 눈을 뜬 자아를 보여준다. 우리가 콜비츠의 그림에서 다시 읽어야 하는 점은 바로 그런 새로운 여성상이 아닐까?

▶ 박홍규: 전 영남대 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

케테 콜비츠가 1934년에 그린 자화상. &lt;한겨레&gt; 자료사진
케테 콜비츠가 1934년에 그린 자화상.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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