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계옥을 모델로 한 영화 <밀정>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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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 동네의 좁은 아스팔트 길을 달리는 승마꾼들을 피하다가 쓰러져 다쳤는데 그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멀리 사라졌다. 이런 건 교통사고가 아닌 모양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흙길 1차선이었는데 별안간 아스팔트를 깔더니 중앙에 흰 선을 그어 2차선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공간은 한 치도 안 남게 되었다. 대형 트럭이나 중장비와 마찬가지로 승마용 말들이 닥치면 멀리 피하거나 아니면 꼼짝없이 논두렁에 처박혀야 한다. 그래서 골프 이상으로 나는 승마를 싫어한다.
그럼에도 말을 탄 적이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몽골에서다. 한 시간 정도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말을 타고 초원을 천천히 산책하는 관광 코스였다. 거의 한 세기 전, 그곳 광야에서 말을 달리다가 사라진 현계옥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그 뒤 2016년 영화 <밀정>에서 현계옥을 모델로 했다는 배우 한지민(영화 속 연계순)은 현계옥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실망했다. 현계옥은 얼굴과 몸집이 크고 늠름한 모습의 대장부 풍모다. 그녀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로 전한다. 좁은 기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기보다 광야에서 말달리는 모습이 훨씬 잘 어울린다.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남자현(영화 속 안옥윤)도 마찬가지이다. 가냘픈 서구식 미녀가 아니라 강인한 생활력을 갖춘 우리 이웃 같은 억센 여장부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의 스토리는 실제의 역사와도 많이 달라서,
역사를 제대로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보지 말라고 권하곤 한다.
연인은 소설가 현진건의 형
현계옥은 1896년 경남 밀양에서 관기의 딸로 태어났으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 당시 천민이었던 악공 아버지는 딸을 어머니처럼 관기로 키우려 가무를 가르쳤다. 그러나 1908년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현계옥은 달성군으로 이주해 노래와 춤을 파는 동기(童妓)가 된다. 기생집에서 일하던 중 그는 노동야학 보조교사인 현정건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현정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 때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웠던 소설가 현진건의 셋째 형이다. 두 사람의 사랑을 안 현정건의 집안에서는 현정건에게 양반집 딸(윤덕경)과의 결혼을 강요했다. 하지만 현정건은 1910년 결혼 3일 만에 상하이로 가고 현계옥도 서울로 가서, 두 사람은 편지로 열렬한 사랑을 이어간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현정건은 상하이에서 무역을 했으며, 1919년부터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또 1920년에는 상하이 고려공산당 등에서 활동했다.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던 탓인지 그는 오랫동안 독립운동사에서도 잊힌 인물이었다.
승마복 차림의 현계옥(오른쪽). 1918년 3월5일치 <매일신보> 보도. 가운데는 기생 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인 정칠성.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디지털컬렉션 갈무리
17살 때부터 대구기생조합에서 활동했던 현계옥은 서울에서도 그 이름이 자자했다. 중국 혁명가 황싱(黃興)의 애인이자 기생 출신 혁명가였던 추진(秋瑾)을 사모하여, 임진왜란 당시 의기들이었던 진주 논개와 평양 계월향의 사당을 중수하기 위해 비녀와 가락지를 팔기도 했다. 이러한 일로 인해 그는 경찰의 취조와 고문 끝에 구류에 처해지는 등 감시의 대상이 됐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여장부가 되고자 서울에서 승마를 시작했으며, 말타기는 이후 몽골에 살 때까지 이어졌다. 1919년 2월에 현정건이 밀입국하자, 현계옥은 그에게 동지로 대해줄 것을 요구해 현계옥의 집은 독립운동 아지트로 변했다. 현계옥은 그해 3월 만주로 가서 현정건과 합쳤다가 이듬해 함께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에서 가야금 연주로 생활하면서 연극배우로 번 돈을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또 현계옥은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해 김원봉에게 폭탄 투척법과 권총 사격법을 배운다. 최초의 여성 단원이었던 그는 헝가리인 폭탄 전문가 마자르를 도와 폭탄 제조와 운반 작업을 수행하기도 했으나, 1923년쯤 의열단 일은 끝났다. 당시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이 주도한 조직인 청년동맹회가 의열단의 암살 활동을 테러리즘으로 매도하여 청년동맹회의 중요 멤버인 현정건과 대립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을 떠난 현계옥은 청년동맹회에 참여해 현정건과 함께 1926년에 잡지 <여자해방> 발간을 담당했다.
<여자해방>은 3호 정도의 발간으로 그쳤으나, 여성해방과 민족해방 및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이라는 삼위일체의 혁명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추구한 점에서 당시 국내에서 시작된 정칠성 등의 사회주의 여성운동과 연결되었다. 또한 그것은 나혜석이나 김명순 등의 연애 중심의 여성해방론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기도 했다. 최근 한국 학계에서 나혜석을 아나코페미니즘(무정부 여성주의)의 원조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적어도 엠마 골드만에게서 보는 아나코페미니즘을 나혜석의 그것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1925년 11월6일치 <동아일보>에 실린 현계옥 기사와 사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갈무리
최후 행적은 안 드러나
1927년 4월에 장제스(장개석)가 쿠데타를 일으켜 국공합작을 파괴하고 좌파를 탄압하기 시작하자, 중국에서 조선인 좌파에 대한 일제의 탄압도 거세어졌다. 그래서 이듬해 3월 현정건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돼 국내로 압송된 뒤 12월에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는 1932년 6월 출옥하기까지 평양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현계옥은 현정건이 출옥하기 1년 전인 1931년 7월 상하이를 떠나 모스크바로 가서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증빙 자료는 없다. 현계옥이 현정건의 출옥을 기다리지 않고 모스크바로 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출옥 후 현정건이 본처에게 돌아간 것은 사실이다. 현계옥은 본격적인 혁명가의 길을 택한 걸까?
현정건의 본처 윤덕경은 1910년 결혼 후 혼자서 시부모와 함께 거의 유폐 상태로 살다가 1917년 서울로 이주해 보통학교 과정을 다닌 뒤 자수 교사로 활동하면서 소비조합 등의 사회활동도 했다. 특히 1930년 초부터 정칠성을 알면서 여성운동에도 관심을 가진다. 기생 출신의 정칠성은 현계옥과 친했고, 사회주의 여성운동으로도 서로 통했다. 1932년에 현정건이 출옥하고 6개월 만에 병으로 죽자 윤덕경도 한달 반 뒤에 음독자살한다. 그리고 현계옥은 몽골 광야에서 야생마처럼 사라진다. 1924년에 세워진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몽골인민공화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까지 그곳에서 관련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안타깝기 짝이 없다.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박홍규 | 전 영남대 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