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976년 2월 22일 자, <경향신문> 1976년 10월 13일 자, 1980년 7월 25일 자. (왼쪽부터)
새 유물 4 70 점 추가 발굴
-신안 앞바다 보물선 내년 인양
오늘로부터 38년 전인 1980년 7월 24일,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앞바다에서 수백 점의 유물이 인양됐다. 이 가운데 훼손 없이 완전한 상태로 인양된 등나무 껍질의 원통형 상자가 눈길을 끌었다. 상자 안에서는 중국 길주요(중국 장시성 길안시 영화진에 있었던 옛 도요지) 계통의 흑유꽃병을 비롯해 청자 향로와 어용식 화병, 청동방울 등 희귀한 문화재가 쏟아져 나왔다.
사진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공식 누리집.
이른바 한국 최초의 수중 발굴 ‘보물선’에서 추가로 발굴된 유물들이다. 사실 ‘보물선’에 대한 본격적인 탐사는 1976년 10월 시작해 1984년 9월까지 8년 동안 10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신안 해저 발굴로 14세기 원나라의 사회·경제상과 조선술, 국제 교역사와 공예 미술 등의 연구에 쓰일 귀중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수중 발굴 과정이 한국의 수중고고학에도 큰 의미를 안겨주었다.
보물선의 ‘단서’가 된 도자기 6점
유물 발견의 첫 시작은 1975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안 해저에서 조업 중이던 어부의 그물에 청자매병 등 6점의 유물이 건져 올려졌다. 인양된 6점의 도자기는 이듬해 1976년 1월 매장 문화재로 신안군청에 제출, 신고됐다.
하지만 당시 문화재관리국에서는 해당 해역에 대한 조사와 보존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은 수중 유적에 대한 조사 경험이 없었고, 잠수를 위한 장비도 구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신안해저유물 발굴이 국가사업으로 진행된 데에는 뜻밖의 계기가 있었다. 도자기 6점이 인양된 이듬해인 1976년 10월, 목포경찰서는 수중 도굴꾼들을 검거한다. 당시 검찰은 검거된 도굴꾼들로부터 “잠수부까지 동원해 다섯 차례에 걸쳐 인양작업을 벌여 수백여 종의 문화재를 인양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또 검찰은 검거된 5명의 도굴꾼이 각각 다른 조직 소속이라는 점을 봤을 때 수중 도굴이 여러 조직에서 전문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도굴꾼이 검거되면서 비로소 발굴의 필요성을 확인한 문화재관리국은 <신안 해저 발굴조사단>을 꾸렸다. 발굴 현장은 전라남도 신안군의 중도와 임자도에서 각각 4㎞ 떨어진 곳이었다. 이 지역은 여러 섬 사이에 형성된 해류 출입구에 해당하는 곳으로 물살이 빠르고 물속이 어두운 게 특징이었다. 제대로 된 장비조차 갖추지 못한 문화재관리국은 국방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해군 51전대 소속 심해 잠수사들의 협조 아래 비로소 신안해저유물 발굴조사가 본격화할 수 있게 되었다.
수심 20m에 ‘보물선’이 있었다
신안 해저 탐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조사단은 앞으로 발굴될 유물의 엄청난 규모를 가늠하지 못했다. 그런데 1976년 10∼11월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제1·2차 예비 조사에서 송·원나라 도자기 약 5000여 점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사진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공식 누리집.
이어 수심 약 20m에서 선체 길이 28.4m, 폭 6.6m의 선박이 발견됐다. 그야말로 ‘보물선’인 셈이었다. 침몰선은 발굴 당시 총 720편으로 분리 인양되었다. 인양된 선체편은 침몰 당시의 선체 원형을 복원하기에도 충분했다. 침몰선은 용골(선체의 중심선을 따라 배밑을 선수에서 선미까지 꿰뚫은 부재)을 갖춘 첨저형(뾰족한 바닥의 형태)에 격벽이 이뤄진 구조로 당시의 조선술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1983년 신안 증도 앞바다에서 조사원들이 신안선 용골을 인양하는 모습.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조사단은 신안 침몰선의 제작기술과 나무의 원산지, 선원들이 사용했던 용품 등으로 미루어 이 배를 일본을 향해 가려던 중국 무역선으로 추정했다. 물론 이 선박이 고려를 경유해 일본으로 항해를 했는지를 밝혀줄 정확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선박 내에서 고려자기 등 고려 유물 몇 점과 함께 나막신, 칼코 등 일본 유물 20여 점도 발견돼 당시 동북아 삼국의 교류 상황을 추론할 수 있었다.
사진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공식 누리집.
당시 작성된 공식 조사기록을 보면, 제1차 조사(1976년 10월 27~11월 2일)와 제2차 조사(1976년 11월 9일~12월 1일)를 아울러 2개월 동안 실시한 본 조사로 해저 유적의 확실한 존재와 위치를 확인했다. 해군의 심해 잠수사들이 보고한 내용을 종합할 때 1척의 파손된 목선의 매몰도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실은 당시 도굴꾼의 도굴을 막기 위해 일반에게는 공개하지 않았다. 1977년 시작된 제3차 조사부터는 미국으로부터 해양 구조선 1척을 새로 들여와 발굴의 효율성을 높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학술조사와 발굴 인양을 목적으로 한 문화 조사에 군 장비와 인원이 대규모로 동원된 사례는 외국에서는 보기 드문 일로써 매우 이례적인 조처였다.
신안선에 실린 유물들
사진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공식 누리집.
유물들은 선체의 내부와 외부에 걸쳐 끊임없이 발굴됐다. 이 유물들은 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상품들이었다. 특히 도자기가 90%를 차지하고 있었다. 선체 내부에서 발견된 2만2000여 점의 도자기들은 70x70x50㎝ 정도의 목재 상자에 10~20개씩 포개어 끈으로 묶은 채 수십 개 또는 수백 개씩 담겨 격납돼 있었다. 이 밖에 동전 28t을 비롯해 금속공예품과 목칠 기류, 생활용품 등 2만3502점(동전 제외)에 달하는 문화재가 실려 있었다. 이 유물들은 7개의 격벽으로 나뉜 짐칸 속에서 인양되었다.
사진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공식 누리집.
신안 해저문화재는 단독 유적에서 수습된 유물로는 세계 고고학 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발견이었다. 특히 발굴된 도자기는 청화와 백자를 비롯한 모든 종류와, 온갖 도형들이 망라되다시피 모여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중국 도자기의 전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이는 중세 해상 무역이 ‘비단길(Silk Road)’과 견주어 ‘도자기의 길(Ceramic Road)’이라고 불릴 만큼 번성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뿐만 아니라 발굴된 보물선은 당시 아시아의 뛰어난 조선술을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가 됐다.
사진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공식 누리집.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바다를 이용해 독특한 고유의 해양 문화를 만들어 왔다. 그만큼 이와 관련한 수많은 문화유산이 육지와 바다 곳곳에 매몰돼 있다. 문화재청에 신고된 한국 해안 매장문화재 발견 신고지만 200여 곳(2011년 기준)에 이를 정도다. 신안 해저에서 다량의 유물이 인양된 것을 계기로 한국에서도 수중고고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사진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공식 누리집.
신안해저유물 발굴을 시작으로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 물품까지 포함한 여러 건의 유물들이 수습됐다.
1981년에는 충남 태안반도 일대에서 고려 시대 도자기류가 발굴되었으며, 1983년~1984년 전남 완도 해저에서는 11세기 고려 시대 도자기 운반선으로 추정되는 완도선과 많은 유물이 인양되었다. 1992년에는 진도에서 13~14세기 경의 중국 선박으로 추정되는 배가 발굴되었다. 이외에도 목포 달리도 앞바다와 제주도 신창리, 여천 앞바다 등에서 선박에서부터 도자기, 공예품, 동전류와 식물의 씨앗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물들이 발견됐다.
이후 한국 수중고고학은 40년 역사 동안 8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국내·외 난파선 14척(통일신라시대 1, 고려시대 10, 조선시대 1, 중국 14세기 2)과 문화재 약 10만여 점을 인양했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은 신안 해저문화재 발굴 40주년을 기념해 당시 인양된 흑유자 800여 점 가운데 180점을 특별 전시하고 있다. 한국 수중고고학의 첫 장을 열게 한 보물선 유물을 통해 약 700년 전 화려한 역사의 일부분과 마주해 보는 건 어떨까?
참고문헌
<국립해양유물전시관 >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신안해저발굴유물중 중요유물에 대하여 > 이호관
<신안선 유물 출수 위치의 고고학적 검토 - 신안선 선체 ·고려 ·일본계 유물을 중심으로 > 조진욱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공식 누리집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