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고문실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실이 발견되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서울(경성) 광화문 한복판에 자리한 조선총독부 청사는 1920년대 차례로 건립된 경성부청, 경성역, 조선신궁 등과 함께 서울의 식민지 경관을 ‘완성’하는 핵심 건축물이었다.
해방 이후 ‘민족성 회복’ 문제가 사회 전면으로 떠오르면서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 문제가 꾸준히 논의됐다. 1995년 당시 김영삼 정부는 ‘겨레의 얼을 되살린다’는 목적 아래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1993년 광화문 거리 풍경. 지금은 사라진 광화문 내 일제시대에 지은 조선총독부의 건물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 사진.
일제 식민지배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한국전쟁과 군부정권 등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혼란을 겪으며 그 용도도 변화했다. 조선총독부 청사가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건축물 자체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가졌던 이유다.
서울 한복판 조선총독부 지하에 존재한 고문실
“이 지하 공간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항일 애국지사들을 감금·고문하는 장소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오늘로부터 정확히 23년 전인 1995년 8월 8일, 옛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과정에서 고문실이 발견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하에서 발견된 고문실에서는 각 방에 배수로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당시 광복회 회원들은 배수로를 두고 물고문 또는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할 때 흘린 피를 물로 닦아내기 위한 시설로 추정했다. 지하 고문실을 공개한 국립중앙박물관 쪽은 “30년 경력의 전직 서대문형무소 교도관 2명이 지하실을 둘러본 결과, 잠금장치와 감시창 등의 시설로 미뤄 일제가 사용한 전형적인 고문·감금실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광화문이 헐린 뒤 일제 치하인 1927년에 들어선 조선총독부 건물. <한겨레> 자료 사진.
고문실은 건물 내의 유일한 지하 공간이었다. 중앙계단 아래에 위치했다. 지하 고문실은 89.25㎡(약 27평)로 모두 4개의 방과 복도로 이뤄져 있었다. 방은 한 사람이 간신이 들어갈 수 있는 0.2평 독방과 5평, 2평 정도의 크기였다. 각 방으로 통하는 14㎝의 두꺼운 철판문은 방음을 위해 나무와 모래로 속을 채워 넣었다. 여기에 잠금장치와 감시창을 따로 두었다.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발견된 고문실은 조선총독부 건물이 식민권력의 상징인 동시에 피지배자인 조선인에게는 억압과 수탈의 공간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골적으로 잔인한 일제 조선총독부 건물
경복궁과 조선총독부의 1926년 이후 모습. 조선총독부 건물 주변에 잔디밭이 보인다. 일제는 경복궁 전각을 헐어버린 자리에 한국인들에게 죽음을 상징하는 잔디를 깔았다. 푸른역사 제공. <한겨레> 자료 사진.
조선총독부 청사를 활용한 일제의 잔인함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제는 행정적 편의를 도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총독부 청사를 신축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진의는 다른 데 있었다. 일제는 경복궁 근정문 앞의 모든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거대한 서양식 석조 콘크리트 건물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신축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목조인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대조시켜 배치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일제의 식민지 야욕을 고스란히 품은 조선총독부 청사는 1926년까지 무려 10여 년에 걸쳐 지어졌다. 지상 4층 지하 1층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은 전형적인 식민지풍의 제국주의 건축물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당시 많은 제국주의 국가에서 권력을 상징하기 위해 박아 넣은 중앙에 높고 큰 돔도 잊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완공으로 당시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 통치는 더욱 가속화했다.
경복궁 앞에 새로운 건물이 건립되기 전까지 조선총독부(제일 오른쪽 건물·현재 서울 애니메이션센터 자리)는 남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왼쪽 위쪽에 명동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 사진.
반면 경복궁의 근정전은 조선총독부 청사에 가려져 더 이상 광화문 앞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경관 구축을 위해 서울의 전통 경관, 특히 도시 공간에서 조선의 권위를 나타내는 공간을 해체해나갔다. 이로 인해 일제는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 당시 한국 사람들이 일본의 식민 통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방편으로 삼았다.
한국의 정치와 조선총독부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에도 조선총독부 청사는 철거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았다. 기득권 세력이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이유에서 청사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제가 사용한 기간이 19년이었고, 나머지 50여 년 동안은 한국이 사용했다. 그만큼 건립에서 철거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정치·사회·문화를 담고 있는 건물이기도 했다.
1945년 9월 9일 오후 4시 조선총독부 제1 회의실에서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운데)가 남한 주둔 미군사령관 존 하지(오른쪽) 중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통치 이양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이후 조선총독부 청사는 미국의 손에 넘어가 미군정 청사로 쓰이게 된다. 실질적으로 한국이 사용한 때는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후부터다. 한국은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개조하지 않고 이곳에서 제헌국회 개원식을 열었다. 이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한때 북한군 청사로도 사용된다. 이때 내부가 훼손되었던 것을 그대로 방치하다가 1962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수리하고 정부중앙청사로 20년 동안 사용한다.
조선총독부 청사의 사용을 두고 ‘민족성 회복’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건 의외로 전두환 정권에서다. 정권의 정당성 문제로 대중적 지지 기반이 약했던 전두환은 조선총독부 청사의 국립중앙박물관 개편을 통해 국민적 지지를 얻으려 했다. 정권의 의도대로 조선총독부 청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편돼 1983년부터 1995년까지 사용됐다.
철거 작업으로 인해 외벽이 드러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구 조선총독부) <한겨레> 자료 사진.
그러나 일본의 잇따른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로 반일 감정이 격화하자 철거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결국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 논쟁은 1990년 10월, 경복궁 복원계획에 국립중앙박물관 신축 이전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본격화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옛 조선총독부 건물 중앙돔 해체공사 과정에 일제가 제작해 놓은 동판 상량문이 발견됐다. <한겨레> 자료 사진.
이후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4월1일 당선된 지 한 달여가 지난 시점에서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를 지시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를 두고 일부 학문적, 역사적, 미술적 관점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다시 광화문에서 경복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그마치 해방 50년 만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완공된 지 70년 만의 일이었다.
참고문헌
< 조선총독부 , 그 청사 건립의 이야기 > 허영섭
< 조선총독부청사 철거문제를 통해 본 한국건축계의 의식변화에 관한 연구 > 박혜인 김현섭
< 경복궁과 구 조선총독부 건물 경관을 둘러싼 상징물 전쟁 > 윤홍기
< 조선총독부 청사 실내공간의 표현 특성에 관한 연구 > 이근혜 오인욱
< 해방 이후 조선총독부청사의 변천과 그 의미 > 정희선
<경향신문>, <한겨레> 1995년 8월 8일 치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