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칼럼니스트
아버지는 당신의 차를 끔찍하게 아꼈다. 거의 삼일에 한 번 손세차를 했고 계절마다 정비도 꼼꼼히 챙겼다. 애정이 지나쳐 가끔 어머니가 짜증을 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자동차 사랑은 과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아주 예외적이거나 특이하다고 할 수는 없다. 아파트와 ‘중형 세단’이 중산층의 기준이었던 시절이 있었고, 아버지는 그런 시대의 한복판을 통과해온 분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당신 아버지 세대가 상상도 못했던 경제적 지위를 획득했다는 뿌듯함과 설렘은 어린 아들에게 전해질 정도로 강렬했다. 당신에게 ‘마이카’는 그저 편리한 이동수단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물질적 성취를 드러내는 상징이자 유년의 가난과 고통을 보상해주는 훈장이었다. 오늘날 자동차는 그런 뜨겁고 거대한 집단 감정이 응축되는 대상이 아니다. 구입해서 타다가 몇 년 지나면 교체하는 생활용품이거나, 아니면 취미 영역에 놓인 비싼 장난감이다.
대개 사내아이들이 그렇듯이 나도 어릴 때부터 각종 ‘탈것’들을 좋아했다. 자동차에 대한 관심 역시 대한민국 남성 평균은 될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내 명의의 차를 사 본 적은 없다(자전거는 숱하게 사 모았지만). 이유는 두 가지 층위에 놓여 있다. 첫째는 문화·정치적인 압력이다. 자동차를 한 대라도 덜 사야 화석연료를 덜 소모할 테니까. 입에 발린 소리로 들리기 쉽다는 건 인정한다. 녹색정치의 관점에서야 당연히 자동차를 안 타는 게 타는 것보다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하다면, 예를 들어 운전에 생계가 걸려 있다면 나는 자동차를 샀을 것이다. 물론 마음의 위안을 위해 하이브리드 자동차나 전기 자동차를 살 수야 있겠지만 확실한 건 적어도 내가 차를 사지 않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 문화·정치적 압력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사회·경제적 압력이다. 이건 라이프스타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는 자녀가 없고 가처분소득도 별로 없다. 주차난과 적지 않은 자동차 유지비를 감당하면서까지 차를 소유해야 할 필요를 느끼기 어려운 삶이다. 게다가 서울 강북의 지하철역 근처에 산다. 어쩌면 이게 더 핵심일지 모른다. 서울의 대중교통망은 국내의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 대도시와 비교해도 잘 갖춰진 편이다. 직접 차를 몰지 않더라도 권역 내의 웬만한 장소로 비교적 빨리 이동할 수 있다.
입에 발린 소리라고 말하긴 했지만 문화·정치적 층위가 단지 위선적인 명분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환경담론 등은 행정이나 정당 정책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결국에는 개인의 경제적 선택을 바꾸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20세기 자동차 산업은 ‘마이카’ 로망스를 동력으로 삼고 또 적극적으로 부추기며 막대한 부를 긁어모았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 자동차 업계 일각에선 ‘환경정치가 젊은이들을 물들여서 자동차를 사지 않는다’ 등의 볼멘소리가 튀어나온다. 과연 그게 환경정치 때문인지는 무척 의심스럽지만 젊은 세대가 점점 운전을 하지 않는다는 우려가 순전히 엄살은 아니다. 일본의 경우 18~24살 면허 취득자 중 실제 운전하는 비율은 1999년 74.5%에서 2007년 62.5%로 감소했다고 한다.
‘마이카’ 로망스가 작동하지 않는 시대이기에 더욱 중요한 문제가 대중교통이다. 특히 대도시 대중교통 체계를 어떻게 공공화하는가가 세계 각국의 고민거리다. 저렴하고 안전하며 촘촘한 대중교통 체계는 그 자체로 복지의 일종이며 삶의 질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인프라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무상버스’가 입길에 오르내린다. 그런데 보조금을 통한 시혜성 정책이란 비판이 비등한다. 시민은 거지가 아니다. 필요한 건 공짜버스가 아니라 공공의 버스, 시민 모두의 버스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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