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출시된 소일렌트는 전 세계에 ‘미래식 붐’을 일으켰다. 1969~70년대 우주식이 관심을 부른 뒤 처음이다. 소일렌트 제공
한 끼 식사를 선택하면서도 인간은 배고픔의 해소, 맛에 대한 욕망, 문화적 자부심 등에 지배받는다. 미래의 식사는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미래에는 알약 하나로 끼니를 때울 것이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미래형 식사’를 표방해 지난해 ‘랩노쉬’를 내놓은 ㈜이그니스의 개발자 6명은 정말로 한 달 동안 자신이 만든 미래식만 먹으며 버텼다. 밥 대신 하루 서너 끼니 랩노쉬로 대체했고, 술과 과자 등은 모두 끊었다. 일부는 가끔 커피만 마셨다.
“몸은 괜찮았어요. 다만 ‘쇼콜라 맛을 먹었는데 다음에는 요거트 맛을 먹어야겠다’ 생각하면서 좀 더 다양한 맛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가장 힘든 건 질린다는 거였어요.”(김지훈 기술이사)
“일주일에 한 번씩 모발을 뽑아서 영양검사를 맡겼지만 이상으로 나온 적은 없었어요. 맛있는 거 먹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죠. 몸무게는 3~4㎏ 빠졌습니다. 성인 남성이 (많이 먹을 때) 하루 3000~4000㎉를 먹는데, 랩노쉬만 먹을 경우 2000㎉ 이하를 먹게 되거든요.”(박찬호 이그니스 대표)
평생 랩노쉬만 먹고 살아도 문제는 없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이 식품은 단백질과 탄수화물, 지방 등 필수영양소가 함유됐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박찬호 대표는 한 달 장기복용 뒤 건강검진을 받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밝혔다.
실리콘밸리에서 불어온 유행
미국 실리콘밸리의 기술자들 사이에서 ‘미래식’이 열풍이다. 2013년 벤처사업가 롭 라인하트가 30일 동안 자신이 개발한 ‘소일렌트’만 먹는 실험을 블로그에 게재한 이후 소일렌트는 대규모 자본 투자를 유치하는 등 대박을 터뜨렸다. 뒤이어 100% 채식을 표방한 ‘휴엘’(영국), 유기농 재료만 쓰는 ‘암브로나이트’(덴마크) 등이 세계적으로 나오면서 미래식은 일군의 사용자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뉴욕 타임스>는 지난해 5월 이 현상을 다룬 특집 기사에서 “따로 앉아서 밥 먹지 않아도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오면 좋겠다”는 전기차 ‘테슬라’ 개발자 일론 머스크의 발언을 소개했다. 머스크가 소일렌트를 즐겨 먹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밥 먹을 시간조차 아까운 벤처 기술자들과 사업가들에게 미래식은 하나의 유행이 되었고, 미래식이 나오는 파티가 열릴 정도라고 이 신문은 전했다.
국내에서 지난해 ‘랩노쉬’와 ‘밀스’가 잇따라 출시됐다. 외국 제품과 마찬가지로 가루를 물에 타서 녹여 먹는 ‘파우더 식품’이다. 국내 제품 역시 필수영양소를 고루 충족하는 한 끼 식사를 표방하고 있다. 즉 이것만 먹고 살아도 영양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기자가 랩노쉬를 몇 번 먹어봤을 때는 공복감을 없애주기는 했지만 ‘미숫가루’ 같은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랩노쉬를 개발한 김지훈 이사는 선식과는 다른 식품이라고 지난달 30일 인터뷰에서 말했다.
-선식이나 미숫가루와 무엇이 다른가?
“미숫가루 같은 곡류로는 필수아미노산을 다 섭취할 수 없다. 장기 복용할 경우 (영양학적으로) 문제가 생기는지 여부가 차이일 것이다. 우리 제품은 오래 먹어도 괜찮다.”
-랩노쉬는 한 끼에 약 330~340㎉의 열량을 공급한다. 한 끼 식사의 평균 권장 칼로리가 500㎉인 걸 감안하면 적은 수치다. 아침에 먹는 다이어트 식품 아닌가?
“섭취의 불균형을 고려해 열량을 적게 한 것이다. 사람들이 과식을 많이 하는 최근의 풍조에서 영양소 결핍은 방지하면서도 잉여 에너지가 생기지 않게끔 열량을 조정한 것이다. 세 끼를 랩노쉬만 먹어도 괜찮지만 심리적인 요인 때문에 우리는 한두 끼만 권장한다.”
지난해 국내에 출시된 (주)이그니스의 ‘랩노쉬’. 이그니스 제공
사실 시대의 필요에 맞는 미래형 식사는 과거부터 존재했다. 지금은 일부에서 ‘정크푸드’라는 낙인이 찍혀 있지만, 켈로그 형제가 개발해 20세기 초반 대중화된 콘플레이크는 영양 균형을 잡아줄 아침의 대안식사로 선전됐다. 20세기 중반 튜브형 식사는 우주여행을 상징하는 미래식이었다. 1961년 우주인 1호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호에서 먹은 음식은 치약 같은 튜브에 담겨 있는 고기 퓌레와 초콜릿 소스였다. 미래형 식사는 대개 ‘효율성’에 착목해왔다. 잠잠했던 미래식에 대한 관심은 최근 부활하는 모양새다.
기능적인 식사와 정서적인 식사
식사의 본원적인 기능은 영양 섭취다. 그러나 인생에 빵과 장미가 모두 필요하듯, 식사는 빵을 주면서도 장미꽃 한 다발을 선사해야 한다. 기능적인 식사도 필요하지만 정서적 만족감을 주는 식사도 필요하다는 얘기다. 김지훈 이사는 맛과 영양의 양극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다.
“초반에 미국의 소일렌트로 연구를 많이 했다. 소일렌트는 제품 출시 초반기에 탄수화물 수치를 나오게 하기 위해 말토덱스트린을 썼는데, 이게 맛이 잘 안 나온다. 이들이 쓴 감자 전분은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탕수육 튀길 때나 쓰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아무 재료나 쓸 수 있다면 영양소를 채우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영양소를 채우면서도 맛의 미세한 부분을 잡는 것이다.”
-그래도 미국 실리콘밸리 노동자들은 소일렌트를 많이 먹는다.
“문화적인 차이다. 외국에는 파우더형 식사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맛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미숫가루로 아침 끼니를 때우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맛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 웬만큼 만들어선 안 된다.”
미래식이 실리콘밸리에서 인기를 끈 이유는 파우더형 식사가 시대의 최첨단에 선 이들의 직업적 자부심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음식을 먹으면서 계층 상승의 느낌을 갖듯이, 실리콘밸리의 노동자들은 ‘바쁜 일상, 미래 식사’라는 자신만의 문화 코드를 ‘소일렌트’에 투사했다. 반면 국내에서는 20~30대 여성을 중심으로 아침·저녁 식사 대용이나 식단 조절용으로 주로 소비된다고 한다. 소일렌트가 1회 500㎉를 제공하는 반면 국내 제품은 대개 300~400㎉를 제공한다. 지난해 ‘밀스’를 내놓은 인테이크푸즈의 노석우 홍보팀장은 “식사를 완전히 대체하겠다는 소일렌트의 철학을 지지하지만, 먹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정서 또한 포기할 수 없었다”며 “크라우드펀딩으로 1억원을 모금했고 판매량이 가파르게 느는 중”이라고 말했다. 주소희 이그니스 홍보팀장은 “매출은 상승세를 보이며 한 달에 7만개 정도 팔린다”고 말했다.
알약만 먹으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재미없을까. 그런 점에서 미래식은 ‘장미꽃의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뇌가 작용하는 바도 다르지 않다. 음식의 미세한 맛뿐만 아니라 음식 모양과 냄새,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를 판단해 뇌는 우리에게 ‘맛있어요’ 혹은 ‘맛없어요’라고 말한다.
국내 업체들은 미래의 식사가 극단적인 효율성으로 귀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마케팅 방향을 잡았다. 오히려 미래의 인류는 기능적인 식사와 정서적인 식사를 분리해 섭취하게 될 것이라고 김지훈 이사는 말한다. 즉 정서적인 식사로 인한 과식, 편식 등의 문제를 기능적인 식사로 보완할 것이라는 것이다. 남종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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