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충북 영동군 상촌면 둔전리 도마령마을에서 열린 산촌문화축제에서 주민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도마령마을 제공
유토피아는 영국 소설가 토머스 모어가 1515년 이상적인 사회를 꿈꾸며 쓴 소설 제목이다. 현실 사회의 고통과 모순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완벽한 사회를 그려 보였다. 하지만 그리스말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것에서 알 수 있듯 유토피아는 이상적이지만 실현 불가능한 사회를 상징한다.
농산어촌의 재생을 통해 지역균형발전을 달성하는 프로젝트에 ‘농산어촌 유토피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이런 의미에서 생뚱맞은 감이 있다. 하지만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포용성장·균형발전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송미령 단장(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농산어촌 유토피아는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고 말한다. 송 단장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은 일종의 ‘디스토피아’다. 도시는 집값과 취업난으로 아우성인데 농촌은 빈집이 늘고 있고 인력난을 겪고 있다. 이런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농산어촌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유토피아라는 말을 붙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미령 국가균형발전위원회 포용성장·균형발전연구단장이 1월26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회의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송 단장의 말대로 지금 한국 사회는 디스토피아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정도로 단기간에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삶의 질은 전혀 그에 걸맞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측정하는 삶의 지수가 2020년 기준 5.9점으로 38개 회원국 중 29번째다. 오이시디 평균 6.5점에 한참 못 미친다. 자살률은 10만명당 26.6명으로 오이시디 평균 11.5명의 두배가 넘는다. 노인 빈곤율과 청년 실업률, 출산율도 오이시디 최악 수준이다. 송 단장은 “무엇보다 삶의 지수 가운데 공동체 항목이 꼴찌 수준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당신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할 이웃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없다’는 답변이 많았다.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공동체 의식이 강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인 것”이라고 말했다.
농산어촌의 현실은 더욱 디스토피아적이다. 공동체 붕괴를 넘어 아예 지역이 소멸될 위기를 맞은 지 오래다. 국토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출생자보다 사망자가 더 많아서 총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는 인구 ‘데드크로스’는 2020년 전체 시·군·구의 66%(151곳)에서 일어났다. 특히 전체의 25%에 해당하는 57곳은 이미 2000년 이전부터 데드크로스가 시작됐다. 이들 지역이 모두 농산어촌이다. 65살 이상 고령층 인구가 20% 이상인 읍·면 비율은 2000년 55.1%에서 2015년 84.2%로 증가했다. 소멸 위험도를 나타내는 인구소멸위험지수(수치가 낮을수록 소멸 위험도가 높음)도 2020년 기준 농산어촌 지역인 읍과 면은 각각 0.81, 0.30인 반면 도시의 동 지역은 1.24다.
그럼에도 농산어촌은 ‘디스토피아의 탈출구’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우선 인구의 출생과 정주 기능을 담당하는 ‘인구댐’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다. 2019년 합계출산율을 보면 군(1.25명), 시(1.05명), 구(0.82명) 순으로 농산어촌 지역이 더 높다. 가장 높은 전남 영광군(2.538명)의 경우 가장 낮은 서울시 관악구(0.536명)보다 출산율이 4배 이상이다. 일자리와 자녀 교육 문제로 때가 되면 도시로 떠나는 인구가 많긴 하지만 농산어촌은 기본적으로 도시에 견줘 출산과 육아에 경쟁력이 있는 것이다.
더욱이 도시에서 농산어촌으로 유턴하는 귀촌·귀농 인구도 점점 늘고 있다. 농산어촌 인구는 1970년대 전체 인구의 60%에 가까운 1817만명이었으나, 급격한 산업화·도시화의 영향으로 2010년에 939만명(전체 인구의 18%)으로 줄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농산어촌의 순유입 인구가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귀촌 가구는 34만5205가구로 전년보다 2만7545가구(8.7%) 증가했다. 귀농(농업 중심으로 정착) 가구도 1만2489가구로 전년에 비해 1067가구(9.3%) 증가했다. 귀촌 가구는 2016년에 전년 대비 1.6%, 2017년 3.6%로 증가하다가 2018년 -1.7%, 2019년 -3.3%로 감소했다. 하지만 2020년에 8.7%로 증가 폭이 늘었다. 귀촌인도 2020년 47만7122명으로 전년 대비 7.3%(3만2658명) 증가했다.
귀촌·귀농이 50~60대의 ‘버킷리스트’인 것도 고무적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조사 결과를 보면 19살 이상 도시민 중에서 5년 안에 농산어촌에서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실천하기 위해 준비 중인 사람은
485만5000명으로 추정된다. 송 단장은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전염병에 취약한 도시를 떠나 농산어촌 지역으로 귀촌하려는 베이비부머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등 위기의 시대에 농산어촌의 가치는 더욱 도드라진다. 인구밀도가 높지 않고 쾌적한 자연환경과 건강한 음식문화 등 여유 있는 삶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수요는 50~60대 베이비부머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보통신(IT) 기술의 발달로 재택·원격 근무가 자유로워지면서 30~40대 대도시 직장인들의 관심도 끌고 있다.
일본 도쿠시마현의 소도시 가미야마의 사례는 주목할 만하다. 도쿄로부터 600㎞ 떨어진 산골마을인 가미야마는 한때 소멸 위험 지역으로 분류됐지만, 지금은 웹 디자이너와 벤처기업 창업자 등 정보통신 종사자들이 몰려드는 스마트워크 도시로 변했다. 이 지역 출신의 한 사업가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주민들과 함께 공공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마을의 변신이 시작됐다고 한다. 주민들은 2008년 비영리단체를 만들고 가미야마로 이주할 청년을 모집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빈집을 활용해 청년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주민들은 단순히 인구를 늘리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인구가 줄더라도 인구 구성의 질을 좋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전략은 통했다. 2010년 도쿄에 본사가 있는 한 정보통신 기업이 가미야마에 위성사무소를 설치했다. 직원들은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텃밭에서 채소를 기르면서 실시간 영상으로 업무를 본다. 이들이 일하는 모습이 일본 <엔에이치케이>(NHK)에 소개되면서 가미야마는 유명세를 탔다. 이를 계기로 대도시에 본사를 둔 16개 기업의 위성사무소가 설치되고 이주자가 늘면서 카페와 게스트하우스 등이 생겨났다. 한때 소멸 위기에 몰렸던 가미야마는 2011년부터 순유입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인구 6000명의 작지만 활력이 넘치는 도시가 됐다.
국내에도 농산어촌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마을들이 있다. 경남 함양의 ‘아이토피아’는 교육을 특화한 프로젝트로 눈길을 끈다. 경남 함양군 서하면의 서하초등학교는 2019년 말 전교생 10명에 학급 수가 3개에 불과해 폐교 위기에 몰렸다. 주민들은 2019년 11월 ‘서하초 학생모심위원회’를 구성해 학생을 유치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전학을 온 학생 가족들에게 빈집을 활용해 거주 공간을 제공하고 지역 기업 등과 연계해 일자리를 알선하는 프로그램이다. 모집 결과 2020년 새 학기에 학생은 31명으로 늘었고 학급 수도 6학급으로 늘었다. 학생 포함 전입 인구는 49명, 가구 수는 12가구에 이르렀다.
강원도 화천군의 ‘아이 기르기 좋은 지역’ 프로젝트도 비슷하다. 주민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주변 대도시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학입시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2017년에 조례를 만들어 지방자치단체가 대학생 학자금 지원과 거주 지원금, 대학 유학비, 고교 수업료 전액 지원 등을 할 수 있게 했다. 또 모든 학교에 원어민 영어교사를 배치하고 학생들의 국외 배낭연수도 지원했다. 이 밖에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채용, 어린이 전용 도서관 등 교육 관련 인프라 구축에 힘썼다. 그 결과 학생들의 타 지역 전학 비율이 2014년 49.3%에서 2020년 13%로 감소했다.
농산어촌이 디스토피아의 탈출구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을 갖춰야 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2020년에 한 설문조사를 보면
귀촌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저렴한 주거지 마련’(37.5%)을 꼽은 이가 많았다. ‘농산어촌에 대한 정보 부족’(33.7%)과 ‘맞춤형 교육 및 컨설팅’(31.6%) 그리고 ‘일자리’(25.5%)도 귀촌을 망설이게 하는 어려움으로 조사됐다. 특히 청년들은 일자리와 주거지뿐만 아니라 ‘또래 청년과의 네트워킹’도 중요한 조건으로 꼽았다(유정규 경북 의성군 이웃사촌지원센터장, 2021년 토론회 발표자료). 물리적 환경 개선뿐만 아니라 인적 네트워크 등 사회적 자본을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한다.
농산어촌 지역이 귀촌의 조건을 갖추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능력이다. 귀촌 인프라를 갖추기 위해서는 지자체의 과감한 재정 투입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인구 유출과 고령화 등으로 농산어촌 지역의 재정 상태는 매우 열악하다. 돈이 들어올 데는 없지만 쓸 데는 많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 지자체가 써야 할 돈을 줄여주는 전략이 필요하다. 마강래 중앙대 교수는 그의 책(<베이비부머가 떠나야 모두가 산다>)에서 농산어촌 지자체의 노인 기초연금(소득 하위 70%의 65살 이상 노인 대상)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농산어촌은 대도시에 견줘 기초연금을 받는 노인이 많다(가령 2019년 12월 기준 서울시 서초구는 수급자 비율이 25.6%밖에 안 되지만 전북 김제시는 82.1%나 된다). 기초연금은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함께 비용을 분담하고 있지만, 노인 빈곤과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농산어촌 지자체의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따라서 고령자의 부담이 높은 지역은 국가가 더 많은 기초연금을 부담해야 한다. 마 교수는 “노인복지 수요의 폭증으로 국가의 재정 부담이 너무 크다면 당장은 노인 인구 비율이 14% 미만인 지자체만 기초연금 부담을 지게 하자”고 제안한다.
귀촌 희망자의 또 다른 걸림돌은 종합부동산세다. 대도시에 집을 한채 갖고 있는 사람이 농산어촌 지역에서 집을 구입하게 되면 다주택자로 분류돼 종부세 부담이 커진다. 이런 경우 종부세를 완화해주면 귀촌·귀농이 더욱 활성화될 것이다. 하지만 부동산 관련 세제는 항상 빈틈을 노리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귀촌을 재테크 수단으로 악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치가 필요하다. 송미령 단장은 “인구가 적은 면 단위나 부동산 가격이 싼 지역으로 한정하거나 과세 유예기간을 두는 등 투기적 요인을 제거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춘재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cjlee@hani.co.kr, 녹취 김슬아 보조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