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입니다. 기러기, 토마토, 인도인….”
‘장애'에 대한 신선하고, 따뜻한 화두를 던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ENA)라는 드라마 속 주인공의 자기소개다. 그녀는 딱 봐도 이상하다. 그녀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졌다. 이 드라마는 그런 그가 변호사가 되어가는 과정과 변호사로서 ‘한바다’라는 일터에서 팀을 이루어 사건을 해결하며 성장하는 과정,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와 주변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 감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극 중 영우의 회사 ‘한바다'와 소속 동료나 선배들이 영우에게 보여주는 따뜻함. 단순히 장애인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동료로 인정하고 ‘함께 일하고자 하는' 노력들에 있다. 장애인이지만, 자신의 동료로 인정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 회사와 자신을 위해 자신에게 맡은 일을 서로의 다른 역할과 재능을 인정하는 동료 대 동료로서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참으로 바람직하다. ‘우영우'와 그의 일터 ‘한바다’는 드라마 속에나 있는 이야기일까? 천만의 말씀. ‘사회적경제 현장’ 속 실력 있고, 따뜻한 ‘한바다’를 만나보자.
사회적기업 유은복지재단 나눔공동체 직원들이 새싹 재배 작업장에서 활짝 웃고 있다.
#사례1. 전국 최고 품질의 새싹 재배 사업장
“내 일(역할)은 세금이 들어가는 장애인이 아니라, 일해서 세금을 내는 근로자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2008년 사회적기업으로 인증받은 이종만 유은복지재단 나눔공동체 대표의 회사 소개 첫 마디다. 직원도 벌써 50명. 그 중 33명이 자폐 등 장애인이다. 자기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정신 장애인, 전혀 들리지 않아 수화가 아니면 소통이 불가능한 농아인 등 중증 장애인이 대부분이다. 직원들은 근무일의 단 하루도 예외 없이 청결을 위해 우주복 같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작업장으로 출동한다. 마치 우주 공간에 숨겨놓은 씨앗을 주으러 가는 우주비행사 같은 느낌이다.
회사 내부 분위기도 예사롭지 않다. 알록달록 총천연색으로 가득하다. 초록, 노랑, 연두, 보라…. 이토록 선명한 색깔을 뿜어내는 이유는 이 곳이 새싹과 어린잎 채소를 키우는 농장이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맛있는 급식 제공은 물론 하루 종일 있어도 먼지 한 톨 마실 일 없는 깨끗한 근무 환경을 자랑한다. 새싹과 어린 잎 채소 재배엔 청결과 무공해 과정이 생명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곳에서 장애인들이 어떻게 일하게 된걸까. 우선 대표 내외가 한국 최초의 부부 수화통역사다. 농아인들과의 소통이 가능하다. 정신장애인들은 지적 능력이 크게 떨어지는 점을 감안해 작업 과정을 극도로 단순화·반복화 시켰다. 언어소통이 불가능하니, 배추는 ‘하트', 콜라비는 ‘별'. 이처럼 버튼이나 간략한 기호로 의사를 전달한다. 그럼 이들도 자기 역할을 해낼 가능성이 생긴다.
깨끗하고 정성껏 길러진 채소들은 마지막 작업인 포장실로 이동한다. 간혹 봉사 직원들이 와서 이들과 경쟁하면 100전 100패다. 특정 업무에 집중하는 자폐 장애인들의 특성을 잘 살려 반복적인 일을 실수없이 하도록 조직되어 있다. 비장애인 동료들도 여기선 누구나 예외없이 자기역할에 충실한 나눔공동체라는 생태계의 구성원일 뿐이다.
장애인들이 키운다고 해서 시장에서 겨우 버텨내는 수준의 생산성 정도를 추측한다면 오산이다. 이 곳은 전국 생산량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여전히 시장 요구 물량의 3분의 1을 채우지 못하는 ‘레어 아이템'을 가진 기업. 경쟁자들이 따라붙을 수 없는 업계 최상위 기업이다. 심지어 배송 중에도 콩나물이 자라는 최고 품질의 생산품을 만들어내는 혁신기업이다. 권남규 유은복지재단 나눔공동체 사무국장의 이야기는 한결같다. “장애인 근로자들을 내보내고, 비장애인으로 인력을 대체하면 당장 매년 십수억원의 추가 이윤이 발생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덜 벌어도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해 나갈 것이다.”
100% 재활용 가능한 친환경 종이컵을 생산하는 사회적기업 (주)제일산업의 직원들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100% 무형광 천연 펄프로 생산해 100% 재활용되는 친환경 종이컵을 생산하는 사회적기업 (주)제일산업. 연간 80억개의 종이컵을 생산하고 있지만, 불량률은 제로에 가깝다. 단순하지만 특정한 임무에 높은 집중도를 높일 수 있는 정신장애인 근로자들도 활약할 수 있는 작업 공정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량은 암보다 더 무섭다! 암은 고칠 수 있어도 불량은 고칠 수 없다.” 설립자 정범수 (주)제일산업 대표의 말이다. 장애인 일자리를 만든다는 이유로 적잖은 시련을 겪었지만, 지금은 시장 점유율 기준 전국 3위의 탄탄한 회사가 됐다. 지난해 납부한 법인세만 1억원이 넘는다.
2019년 4월 설립자 정범수 대표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기업과 지역 관계자들에게 무거운 슬픔을 안겼다. 뿐만 아니라, 당장에 닥친 경영 공백은 잘 나가던 회사에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를 가져왔다. 매각과 폐업 논의까지 오가는 상황. 장애인 근로자들의 일자리 역시 위기에 처했다.
모두 포기하고 있던 그 때,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은 위기의 우영우들에게 커다란 고래가 나타났다. 주인공은 바로 정범수 대표의 아들 정하일(91년생, 당시 27살)이다. 더욱이 그는 서울에서 경찰 공무원을 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주변의 많은 이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봤다. “저 어린 친구가, 더욱이 서울 생활을 하다가 시골로 와서 장애인 근로자들과 일을 해야하는데 힘들지 않을까?” 훤칠한 키에 흰 얼굴, 넓은 어깨의 신사같은 용모의 그는 당당하고, 용기있는 눈빛과 목소리를 가졌다. “제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아버지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후로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회사는 더욱 견실해졌고, 근로자는 되려 늘어 지금은 25명이 일하고 있다. 매출처를 다각화했고, 친환경 기조는 강화했다. 지금도 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신제품 연구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몸무게 22톤의 암컷 향고래가 500kg짜리 대왕 오징어를 먹고, 6시간 뒤에 1.3톤짜리 알을 낳았다면, 어미 고래의 몸무게가 얼마일까요? 답은 ‘고래는 알을 낳을 수 없다’입니다. 고래는 포유류이므로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우기 때문이죠. 본질에 집중하지 않으면 중요한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드라마 속 우영우의 말이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기업이다. 단지 경영자의 철학과 그 기업이 가지는 목적 함수가 여느 기업들과 조금 다를 뿐이다. 그들이 생산하는 제품과 그들이 품어내는 진주는 사회적 가치 바다의 선물이다. 작지만 천천히 손에 잡히고 발에 닿는대로 하나씩, 좋은 세상을 일구어 내는, 차가운 이성의 실력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현실 속의 한바다. 사회적기업과 그 안에서 기어이 삶을 일구어내는 현실 속의 우영우들을 응원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