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보험이 9일 5억달러어치의 신종자본증권을 조기상환(콜옵션 행사)한다. 지난 1일 조기상환 연기를 밝혔다가 엿새 만에 입장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시장 신뢰가 상당히 무너진 상황이라 채권시장 안정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8일 흥국생명에 따르면, 조기상환에 필요한 총 자금 5600억원은 회사 자체 보유 자금과 환매조건부채권(RP) 발행으로 조달한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는 채권을 담보로 환매조건부채권(RP)을 발행하고, 이를 시중은행이 사들이는 방식이다. 환매조건부채권에는 금융기관이 일정 기간 이후에 다시 사는 조건이 붙는다. 즉, 흥국생명이 가지고 있는 채권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다시 돈을 갚으면서 채권을 되찾아오는 식이다. 빠져나간 자금은 유상증자를 통해 태광그룹 계열사들이 채워 넣는다.
흥국생명이 자본 확충에 나서는 이유는 지급여력비율(RBC) 규제 때문이다. 이 규제는 보험사가 계약자의 지급 요청에 대비한 책임준비금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 나타내는 지표다. 보험업법 감독 규정상 지급여력비율이 150% 이상이어야 하는데, 흥국생명의 지난 6월 말 지급여력비율은 157.8%로 금융당국의 권고 수준을 웃돌지만 회사 자체 자금으로 5600억원을 조기 상환한다면 그 비율이 떨어질 수 있다. 이에 태광그룹으로부터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 흥국생명 쪽 계획이다.
금융당국도 지급여력비율을 일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속한 시일 내로 비율을 맞추면 문제는 없다고 보고 있다. 흥국생명 관계자는 “지급여력비율을 맞춰야 하므로 태광그룹에서 자본을 확충하는 것”이라며 “환매조건부채권 거래 자금은 단기자금이기 때문에 유동성을 확보하는 차원이 크다”고 설명했다.
금융당국도 흥국생명의 조기상환이 가능하도록 길을 터준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당국은 보험사가 유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금을 빌리는 요건을 제한하고 있는데, 최근 금융당국은 “예상치 못한 대규모 보험계약 해약, 퇴직연금 자금 이탈에 대비하고자 보험회사가 우량채권을 담보로 금융기관에 환매조건부채권 매도를 실시하는 것은 ‘유동성 목적 차입’에 해당한다”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보험업계 전반적으로 보험 해약이 증가해 유동성이 부족하다 보니 우량채권을 파는 상황이었다”며 “종합적으로 감안해서 조처한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흥국생명이 예정대로 조기상환에 나섰으나 채권시장의 불신을 되돌리는 데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이날 신한은행이 모집액보다 1억호주달러를 증액한 4억호주달러의 ‘캥거루 본드’(호주달러 채권)를 발행하는 데 성공했으나 시장 불안이 회복될지 반신반의하는 시선이 많다. 김준수 키움증권 연구원은 “(흥국생명의 조기상환은) 최악 대신 차악을 선택한 결정으로 보인다. 채권시장에서 신뢰는 한번 상실되면 입장을 번복했다고 해서 단번에 쉽게 회복되기는 어렵다. 이미 한국물에 대한 경계감이 높아진 상황이라 향후 발행되는 한국계 외화채에 대해서는 가산금리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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