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은 한푼도 유출돼서는 안 된다 .”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지난해 8 월 31 일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에 대한 한국 정부의 2900 억여원 배상 책임이 인정된 투자자 - 국가 국제분쟁 (ISDS) 사건 판정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 그는 “ 판정 무효 신청 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 ” 고 했는데 , 앞서 “ 피 같은 세금 ” 이라는 표현을 쓰는 바람에 그가 말한 ‘검토’는 판정 무효 신청을 전제로 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 한 장관은 특유의 자신감 있는 태도로 “ 끝까지 다퉈볼 만하다 ” 는 말까지 덧붙여서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켰다 .
론스타는 2012 년 11 월 한국 정부가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손해를 봤다며 투자자 - 국가 국제분쟁해결센터 (ICSID) 에 국제중재를 제기했다. 그로부터 10 년 뒤인 지난해 8 월 3 명으로 구성된 중재판정부는 2 대 1 로 우리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 론스타가 청구한 금액(약 6조3000억원)의 4.6% 에 해당하는 2 억 1650 만달러 ( 약 2924 억원 ) 와 이자 1370 만달러 ( 약 185 억원 ) 를 지급하라는 결정이었다 . 법무부는 중재판정부 중 1 명이 ‘ 론스타가 외환카드 주가조작 수사를 자초해 한국 정부의 책임이 인정되지 않는다 ’ 는 소수의견을 냈다는 이유로 “(무효 신청의 ) 승산이 있다 ” 고 주장했다 .
하지만 한 장관의 자신감은 ‘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 있다’는 지적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 포문은 < 조선일보 > 가 열었다 . 이 신문은 ‘ 론스타 소송 , 정부는 “ 승산 있다 ” 지만 … 이자만 175 억 더 물 수도 ’ 기사 (2022 년 9 월 22 일 32 면 ) 에서 “ 국민 정서 , 정치권 공세에 떠밀려 매각 승인을 미룬 끝에 3000 억원 배상 판결을 받았는데 , 똑같은 시행착오를 범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 고 지적했다 . 법무부는 승산이 있다지만 , 판정부 구성과 판정 요지를 자세히 보면 오히려 승산이 희박한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
중재판정부는 의장 중재인 1 명과 중재인 2 명 등 모두 3 명으로 구성돼 있는데 , 부심격인 중재인 2 명은 소송 당사자인 한국 정부와 론스타가 각각 선임했다 . 한 장관이 말한 “ 우리 정부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인 ” 중재판정부의 소수의견은 바로 한국 정부가 선임한 중재인이 낸 것이다 . < 조선일보 > 는 “ 우리 쪽 대변인의 소수의견을 근거로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을 기대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 고 지적했다 .
아이시에스아이디 는 판정 무효 사유를 △ 판정부 구성 잘못 △ 명백한 권한 일탈 △ 부패행위 △ 절차규정의 심각한 위반 △ 판정문에 이유를 쓰지 않음의 5 가지로 규정하고 있는데 , 이번 론스타 판정은 위 5 가지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만약 아이시에스아이디 가 한국 정부의 무효 신청을 기각하면 국민 세금으로 배상금을 물어줘야 한다 . 배상금은 첫 판결 당시 ‘2 억 1650 만달러 + 이자 1370 만달러 ’ 에 추가 지연 이자를 더한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 지연 이자는 1 개월짜리 미국 국채금리를 기준으로 삼아 복리로 계산한다 . 그동안 판정 무효 신청이 여러 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전부 무효가 된 사건의 심리 기간은 평균 2 년 2 개월이었다. 이 기간을 적용해 계산하면 추가로 지급해야 할 이자가 175 억원이라는 게 < 조선일보 > 의 분석이다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 민변 )의 송기호 변호사는 법무부가 지난해 9 월 28 일 공개한 판정문 원본을 분석한 뒤, “ ( 중재판정부의 )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의 다툼은 배상 책임 비율에 대한 것일 뿐, 5가지 무효 사유에 해당하는 것은 없다. 따라서 판정 무효가 될 가능성은 ‘제로(0)’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송 변호사에 따르면 판정문에 드러난 중재판정부의 기본 관점은 “금융당국 ( 금융위원회 ) 이 법과 원칙에 따라 론스타를 대우한 게 아니라 조직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자의적으로 직권남용을 했다 ”는 것 이다 . 여기서 ‘( 금융위 ) 조직의 이해관계 ’ 는 ‘ 론스타 먹튀 ’ 여론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의미한다 . 당시 외환은행 인수 가격을 조금이라도 깎아야 금융당국에 대한 여론의 비난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금융당국은 론스타의 외환카드 주가조작 유죄판결을 근거로 매각 승인을 지연시켰는데 , 중재판정부의 다수의견은 이를 한 - 벨기에 투자보호협정의 ‘ 공정공평대우 ’ 의무 위반으로 판단했다 . 론스타는 주가조작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이미 외환은행 매각을 추진했는데, 금융당국이 주가조작 판결 이후 취한 조처는 매각 승인 보류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론스타에 징벌적 매각 명령 ( 외환은행 지분을 거래소를 통해 공개 매도하도록 하는 것 ) 을 내리거나 , 론스타를 산업자본으로 규정해 론스타의 외환은행 대주주 승인을 취소하는 등의 조처 없이 금융위는 주가조작 판결 이전과 마찬가지로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인수 자격만 심사했다 . 중재판정부는 론스타 주가조작 판결은 하나금융의 인수 자격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봤다. 따라서 금융위가 주가조작 판결을 핑계로 매각 승인을 지연시킨 것인 부당하다는 판단이다 .
중재판정부가 이런 판단을 내린 결정적 증거는 금융위 내부문건이었다 . 금융위는 론스타의 주가조작 파기환송심 판결 (2011 년 10 월 ) 이 나오기 전에 “ 법적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하나금융의 인수를 승인해주면 정치적 논쟁 부담이 있다 . 론스타 먹튀를 도와주고 하나금융에 특혜를 줬다는 정치적 공격이 있을 것이다 ”는 내용의 문건 (2011 년 4 월 ) 을 작성했다 . 또 김승유 당시 하나금융 회장이 중재 재판에서 증언한 것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 김 전 회장은 오랜 친구 사이였던 김석동 당시 금융위원장이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인수 승인과 관련해 “ 굉장한 정치적 압박을 받고 있다 ”
“ 만일 그 압력이 줄어든다면 금융위는 하나금융의 외환은행 인수를 반대하지 않겠다 ” 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증언했다 . 김 전 회장은 또 존 그레이켄 론스타 회장에게 이메일을 보내 “ 가격을 내리지 않으면 금융위는 승인 절차를 진행하지 않을 것이다 ” “ 징벌적 매각 명령을 내리라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지만 , 하나금융은 그런 명령을 적용할 일이 아니라고 금융위를 설득해왔다 ” “ 우리는 금융위에 가해지는 정치적 압력을 덜어주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는 등의 메시지를 전했다 .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2022년 8월31일 법무부 청사에서 론스타 국제투자분쟁(ISDS) 판정과 관련한 정부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판정문은 법무부가 적극 검토하고 있는 판정 무효 신청이 승산이 거의 없음을 보여준다 . 송 변호사에 따르면 판정 무효 신청이 접수되면 심리에만 통상 3 년 정도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되면 배상 원금과 지연 이자 등을 합해 총 배상액은 3600 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 법무부가 ‘ 국민의 피 같은 세금 ’ 을 정말 아까워한다면 론스타 배상 판정에 책임이 있는 당국자와 하나금융 책임자들을 수사한 뒤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 . 하지만 한 장관은 수사 여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 그는 지난해 9 월 5 일 국회 예결위 전체회의에 출석해 구상권 청구 여부에 대해 “ 아직은 싸움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내부적인 과정을 짚어 가며 뭐가 문제라고 할 단계는 아니다 . 그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한다 . 다 결과가 나면 그때는 세심하게 짚어서 점검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 책임 문제는 그때 말씀드릴 수 있는 문제 ” 라고 말했다 . 법무부가 공개한 판정문에는 금융위 관계자와 하나금융 관계자의 이름이 가려져 있다 . 송기호 변호사가 지난해 9 월 이들의 이름을 공개하라고 정보공개청구를 했으나 법무부는 ‘ 국가안보 외교 사항으로 공개시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다 ’ 는 이유로 비공개 처분했다 .
법무부는 판정 무효의 ‘ 승산이 있다 ’ 고 판단한 근거를 자세히 밝히라는 시민사회단체의 요구에 모르쇠로 일관한다 . 참여연대 등은 국회 청문회와 검찰 수사를 통해 진상 조사와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해 10 월 론스타 사건 판정문에 ‘ 배상원금이 과다 산정됐다 ’ 는 등의 이유로 ICSID 에 정정신청을 하면서 “ 국민의 알권리 보장을 위해 후속 절차의 진행 상황에 대해서도 국민들께 신속히 알리겠다 ” 고 했지만 , 말뿐인 셈이다 . 법무부 담당 과장은 최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 투자자 - 국가 분쟁 (ISDS) 소송 경험이 없는 분들의 의견이라서 굳이 대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고 말했다 . 자칫 막대한 세금이 낭비될 수 있는 사안에 견줘 무책임한 답변이다. 법무부는 정부 관료 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대신 치르는 국민들에게 충분히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 . 법무부는 지난해 10월 신청한 판정문 정정신청 결과가 나온 뒤 판정 무효 신청 여부를 최종 결정할 것이라고만 밝혔다 .
투자자 - 국가 국제분쟁은 론스타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과 메이슨 , 스위스 승강기업체 쉰들러 등 외국계 투자자가 제기한 소송 6 건이 판정을 기다리고 있다 . 이 가운데 청구 금액이 가장 큰 사건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둘러싸고 엘리엇과 메이슨이 제기한 건이다 . 청구금액이 1 조원대에 이른다 . 엘리엇과 메이슨은 2018 년 “ 한국 정부의 부당한 조치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입었다 ” 며 각각 7 억 7000 만달러와 2 억달러를 청구했다 . 서면 공방에 이어 2021 년 11 월 최종 심리기일이 끝났고 , 중재판정부 결론을 기다리고 있다 . 국민은 그저 정부를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걸까.
이춘재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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