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전망 선진국 부채위기의 배경
경상수지 흑자 내려 고환율 유지…선진국 제조업 몰락
‘무역 불균형’ 해소 압력 강해 아시아도 내수 키워야 성장
경상수지 흑자 내려 고환율 유지…선진국 제조업 몰락
‘무역 불균형’ 해소 압력 강해 아시아도 내수 키워야 성장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는 아시아 국가들이 성장 방식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 전까지는 외채를 도입해 설비투자를 확대하는 외형 성장에 주력했지만, 외환위기 이후로 정부는 경상수지 흑자 유지를, 기업은 수익성 확대를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나라 전체로는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하지 못해 외채가 증가하고 외환보유액이 감소하면 또다시 외환위기를 겪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기업들은 수익성을 외면하다가는 또다시 위기가 왔을 때 현금 부족으로 도산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경상수지 흑자 유지를 위해 환율 하락을 막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효율성 확대를 위해 노동시장 유연화, 경쟁 확대, 규제 완화 등이 추진됐다.
그 결과 아시아 국가들은 경상수지 흑자 기조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으며, 기업 이익도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하고자 하는 아시아 국가들의 노력은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미국과 유럽 선진국들의 경상수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장기간에 걸쳐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면, 외채가 늘어나게 된다. 일반 가정에서도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더 많아 가계부에 적자가 생기면 돈을 빌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지금 선진국들이 겪는 문제는 가계와 정부의 빚이 지나치게 많아 생긴 것임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해 놓고 보면 선진국들의 경제위기가 마치 아시아의 책임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아시아의 책임이 완전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따지고 보면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아시아에 가혹한 구조조정을 요구했던 선진국들의 자승자박 성격이 더 강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외환위기 국가들한테 금리를 올려야 고금리를 노리는 외국 자본이 들어온다는 논리를 들이대며 금리 인상을 요구했다. 우리나라도 30%에 육박할 정도로 금리를 올렸다. 그러나 이런 고금리는 외국 자본 유입을 유도한 게 아니라 금융 비용을 견디지 못한 국내 기업의 몰락을 초래했고, 다시 대규모 실업 사태를 불러왔다. 그때 그 충격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아시아는 외환위기라면 치를 떨 수밖에 없었고, 경상수지 흑자 유지에 집착했던 것이다. 결국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선진국들이 지나치게 가혹한 구조조정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아시아도 그 정도로 경상수지 흑자 유지에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랬다면 선진국 경제위기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도 해볼 수 있다.
이제 선진국들은 아시아와의 무역 불균형 해소를 요구하고 있다. 아시아에 대한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가 위기의 원인이 됐음은 물론이거니와, 아시아가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환율 정책을 사용한 것이 선진국의 제조업 기반 몰락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상원이 환율 조작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아시아와의 무역 불균형을 해소해보려는 미국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잘 보여준다.
한-미 통화스와프 역시 같은 맥락에서 파악해 볼 수 있다. 한-미 통화스와프는 우리나라가 외환 유동성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에 원화를 빌려주고 대신 달러를 빌려올 수 있는 수단이다. 따라서 우리 입장에서는 실질적으로 가용한 외환보유액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어 외환 부문에서 안정성이 더욱 커진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나라는 외환보유액이 부족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한-미 통화스와프에 나설 이유가 없다. 반면 한-미 통화스와프가 미국에는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다. 한-미 통화스와프를 통해 한국에 달러를 제공할 경우 한국의 외환보유액 확보 노력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에서 달러가 필요한 상황이 벌어지면 우리(미국)가 빌려줄 테니, 한국은 외환보유액을 쌓기 위한 경상수지 흑자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우리(미국) 물건 좀 사다 쓰시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한-미 통화스와프가 우리 쪽의 반대로 양국의 합의문에서 빠졌다는 사실은 누가 더 통화스와프를 원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앞으로도 서구 선진국들의 무역 불균형 해소 요구가 점점 더 확대될 것이다. 아시아 국가도 결국에는 순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 최대의 수출 시장 구실을 해줬던 선진국들이 당분간은 빚을 줄이느라 소비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 내수 시장을 키워야만 경제성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 경제의 성장 패러다임이 완전히 달라질 것임을 의미한다. 과거의 패러다임이 아시아 저축과 선진국 소비라는 ‘불균형 확대’라면 앞으로의 패러다임은 ‘불균형 축소’가 될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의 내수 시장은 본격적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이지만, 지나친 내수 확대가 부채 증가로 이어져 먼 훗날 또다른 위기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자세 역시 필요하다.
전민규/한국투자증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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