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지 연구의 산증인인 김예동 남극대륙기지 건설단장이 극지연구소에 차려진 극지과학홍보관에서 남극의 세종기지로부터 세계 주요 도시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 앞에 서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김예동 ‘장보고 남극대륙기지’ 건설단장
장보고 기지도 내륙기지로 가는 중간단계 -처음 남극에 도착했을 때 느낌은 어땠나요? “흰색과 파란색 두가지밖에 없었어요. 창문도 없는 C-130 미군 수송기를 타고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출발해 7시간 반을 날아서 내리니까 눈부신 세계가 펼쳐졌는데 하늘만 파란색이고 그 아랜 전부 흰색이었어요. 다른 색은 어디에도 없었지요. 멀리 눈 덮인 에러버스 화산에서 증기가 올라가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적막한 얼음덩어리에서 피어오르는 희망의 수증기 같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죽음 속에서 느끼는 생동감, 그런 것이었지요. 그때 함께 간 미국 교수가 말했어요. 이 풍경이 진정으로 마음에 든다면 앞으로 계속 남극에 오게 될 거라고. 속으로 그럴 리가 했어요. 내 평생 또 올 기회가 있겠냐고. 그런데….” -오늘 감회가 남다르겠습니다. “그때는 학생으로 남의 나라 연구팀으로 따라간 거고 이번에는 대한민국 국기를 달고 온 거죠. 1983년에 명함 내밀 게 뭐가 있었겠어요. 독재자 밑에 사는 후진국 백성이란 이미지죠. 지금은 대등한 파트너로서 얘기하게 되니까. 맥머도 기지는 별로 달라진 게 없군요.” 그렇게 시작한 남극 인연이 평생을 이어졌다. 김 박사는 남극 연구로 1987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한국에서 세종기지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흔쾌히 거기에 몸담았다. 그 뒤 청춘이 남극과 함께 흘러갔다. 흥미로웠지만 이야기는 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서로 경황이 없었고 한정된 시간 동안 남극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김 박사와의 인터뷰는 달이 바뀐 지난 16일 인천 송도새도시에 있는 극지연구소 대륙기지사업단에서 이어졌다. -박사님 자료를 읽다 보니 좌우명이 ‘두려움을 떨치고 변화에 몸을 맡겨라. 남들이 모두 가는 길에서 얻을 것은 많지 않다’더군요. “탐험가와 마찬가지로 과학 역시 도전정신이 필수입니다.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면 남이 안 하는 것을 해야 해요. 남이 한 것을 따라가면 그 분야에서 빛을 보기 힘들죠. 요즘 이공계 젊은 친구들 의대나 가려 하지 기초과학 하지 않으려 하잖아요. 이건 국가적으로도 불행이에요. 진정으로 자기가 원해서 가는 길이면 하루를 살아도 행복한 거예요. 스콧만 해도 결국 최초 남극점 도달엔 실패하고 비명에 갔지만 자기 한몸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서도 암석 샘플을 끌고 온 그 정신으로 영원히 역사 속에 기억되고 있잖아요.” -걸어온 길에 만족하나요? “저는 흔한 말로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습니다. 정말 보람이 있어요. 저는 남들이 안 하는 남극 과학연구에서 최고 정상의 길을 걸어왔어요. 나 자신도 만족하면서 재미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청소년들을 만나면 항상 강조해요. 부모가 시키는 거 하지 마라. 자기가 원하면서 남이 안 하는 것 찾아라. 저는 우리나라의 극지 연구가 여기까지 오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스스로 자부합니다.” 1000km도로 뚫기 등 달 기지만큼 힘든 건설
중국은 3년전에 벌써 고원 정상에 기지 세워 -세종기지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셨는데 그때 얘기 좀 해보죠. “당시 남극에서 쇄빙선 없는 나라가 갈 수 있는 곳은 세종기지가 있는 킹조지섬밖에 없어요. 1987년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속도전으로 1년 만에 기지 건설을 끝냈지요. 월동대를 보낼 때 옷, 신발, 먹을 것까지 다 새로 만들어 보냈지요. 그 정도로 전혀 준비가 없었어요. 첫해에 15명이 남극 간다고 해서 영양사 통해 준비한 음식이 떨어진 거예요. 현대건설이 공사하는 동안 그들의 음식을 얻어서 먹고 살았어요. 그 정도로 자료도 없고 준비도 없던 시절이었죠.” -남극 생활의 가장 어려운 점은? “춥다는 건 문제가 안 돼요. 가장 큰 것은 심리적인 문제지요. 고립감. 겨울이 되면 몇달 동안 해도 없고. 남극에서는 삶이 단순해요. 블리자드가 불 때는 쉬어야 해요. 한번 불면 일주일씩 문밖 출입도 못하며 갇혀 있는 거예요. 블리자드 소리 들어보셨어요? 겁이 나지요. 맹장염이라도 걸리면 큰일 나는 거예요. 예전에는 인터넷도 없었어요. 위성전화 하나 가지고 갇혀 있는 거지요. 매년 몇달씩, 어떤 때는 1년 내내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도 어려움 중 하나죠. 그래도 저는 이 생활을 즐겼어요.” -남극 연구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나요? “2003년 전재규 대원이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였습니다. 해양연구원 극지연구센터장을 하고 있을 때죠. 결과적으로 그의 희생이 쇄빙선 아라온호 건조, 극지연구소 설립 등 우리나라 극지연구 발전의 기틀이 됐어요. 그 전에는 막말로 15명 파견해 놓고 죽든지 살든지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거든요. 남극에서 쇄빙선이란 것은 신발과 같은 것인데 신발을 안 신고 20년 동안 있었던 거예요. 당시 세종기지에서 가장 가까운 비행장이 바다 건너 칠레기지에 있었어요. 세종기지로 오려면 조그만 보트를 타고 언제 블리자드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바다를 10여㎞나 헤쳐가야 했지요. 빠르면 30분, 길면 한두시간도 걸려요. 남극은 기상예보가 없거든요. 일주일에 한두번은 건너야 하는데 길을 잃어 헤맨 적도 많았어요. 생각하면 아찔했던 순간들이었죠. 전재규 대원도 그 보트를 타고 수색작업을 나갔다가 유명을 달리했지요.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져 생긴 좁고 깊은 틈)도 도사린 위험 중 하나예요. 1996년에 설상차를 타고 세종기지 뒤 빙원에 가다 크레바스에 빠졌어요. 다행히 설상차가 중간에 걸리는 바람에 살았지요. 크레바스는 위쪽이 얇은 얼음과 눈으로 덮여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아요. 몇년 전 칠레 연구자 4명이 빠져 죽은 크레바스도 맨날 비행장 가던 길이었다고 해요.” 에너지·생물자원 풍부…인류미래 열쇠 쥔 땅
젊은이들, 남들이 가지않은 미지의 길 가보길 -남극 연구가 그런 어려움을 딛고 일생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나요? “물론이죠. 위험이 있지만 누군가 가야 하고 평생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에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증가로 오존층이 파괴되고 있음을 발견한 곳이 남극이었지요. 남극에 매립돼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천연자원은 수십년 내 에너지 고갈 문제에 직면할 지구의 한 대안으로 얘기되고 있어요. 이밖에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무수한 새로운 생물자원이 발견되는 등 남극은 인류 미래의 키를 쥔 무한한 가능성의 땅이에요. 그래서 매년 전세계에서 연구단이 파견돼 이곳의 고층 대기, 지질, 지구물리, 해양학적 환경 특성을 규명하고 동식물 생태계와 자원 등을 조사하고 있어요. 너무나 연구할 게 많아요. 남극 연구는 아직 첫걸음에 불과합니다.” -한국의 두번째 남극기지인 장보고 남극대륙기지 건설의 의미는? “세종기지는 섬에 붙어 있어 빙하 연구를 할 수 없었죠. 장보고 기지 건설로 드디어 본격적인 남극 연구의 장이 열리는 겁니다. 하지만 길게 보면 장보고 기지도 제3 내륙기지로 가는 중간 단계에 불과합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대륙 깊숙한 곳 빙원 위에 세울 제3기지죠. 중국은 우리와 비슷한 시기인 1985년 세종기지가 있는 킹조지섬에 기지를 지었지요. 그리고 1989년에 벌써 제2기지를 대륙에 지었고, 2009년에는 남극에서 제일 높은 고원에 제3기지인 쿤룬기지를 세웠어요. 내륙 깊숙한 빙원에 기지를 짓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우선 육로를 통해 1000㎞에 이르는 도로를 만들어야 해요. 장비도 스스로 개발해야 합니다. 내륙기지를 해야 남극 연구의 종결자가 되는 겁니다. 중국은 제2기지 건설에서 내륙기지까지 20년이 걸렸지만 우리는 2014년 장보고 기지 준공 이후 바로 시작해 2020년 완료할 겁니다. 내륙기지 건설은 엔지니어들에게는 달에 기지를 짓는 것과 맞먹는 도전이지요. 내륙으로 들어가는 코리안 루트를 개발해 고원 정상에 올라가 제3기지를 짓고 얼음을 시추하는 게 최종 목표입니다.”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겠군요. “남극 하면 아문센과 스콧 정도만 얘기하는데 그와 같은 시기 남극에 간 시라세 노부라는 일본 사람이 있어요. 100년 전인 1912년 1월16일 남극 땅을 밟았지요. 그는 당시 유럽인들보다 더 열악하고 힘든 상황에서 남위 80.05도의 극한지역까지 진출했지요. 그가 1911년 남극에 가겠다고 문부성에 지원을 요청했더니 당시 관리가 남극 같은 데는 체격 좋고 돈 많은 유럽·미국 사람들이나 가는 데지 우리가 갈 수 있는 데가 아니라고 얘기했다고 해요. 지금 일본에서는 시라세 남극탐험 100주년을 맞아 그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합니다. 우리도 남극과 같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 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시 한번 얘기하고 싶어요. 남들이 가지 않은 미지의 길을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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